트럼프 2.0 시대와 동남아, 아세안
미국 대선 결과 트럼프의 재집권은 또 한 번 미국과 동남아 사이 불편한 4년을 예고한다. 아세안 주도의 다자협력, 개별 동남아 국가에 대한 미국의 관여는 또 바닥을 칠 것이다. 몇몇 동남아 국가는 미국과 관계를 재정립하거나 긴장관계로 갈 수밖에 없는 과제가 있다. 경제적으로 보호무역, 지역 무역질서의 혼란, 일부 국가에 대한 관세 압박도 예견된다. 미국 경제를 위한 정책이 간접적으로 동남아 국가의 성장에 먹구름도 드리울 것이다. 더 근본적으로 트럼프의 재집권으로 동남아 국가들의 미국에 대한 확신과 신뢰는 또 한 번 크게 흔들릴 것이고 이는 미국 리더십의 장기적 추락을 예고한다.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트럼프(Donald Trump)가 예상을 깨고 쉽게 당선되면서 트럼프 2.0 시대가 되었다. 모두 트럼프 2.0 시대 미국의 대외정책을 예상하고 분석하느라 떠들썩하다. 동남아/아세안도 예외는 아니다. 대강의 큰 방향은 예상할 수 있다. 큰 이변이 없는 한 트럼프 1기의 대외 정책, 대 동남아 정책이 다시 돌아올 것이다. 문제는 더욱 그 정책의 강도가 강할 것이라는 점이다. 1기의 경험을 바탕으로 대강의 그림도 있고, 1기의 경험을 바탕으로 충성파들로 핵심 자리들을 채울 것이다. 상, 하원 모두 트럼프의 공화당이 우위에 있다. 하겠다고 공약해 놓은 것은 많고 이번 4년이 지나가면 더 대통령을 할 기회도 없으니, 모든 걸 다 하려고 자신의 대외정책을 포함한 모든 정책을 강력하게 밀어붙일 가능성이 높다.
동남아 국가들에게 트럼프의 당선은 그리 반가운 소식이 아니다. 미국의 아세안 지역 관여는 줄어들 것이다. 동남아 지역 전체 혹은 아세안이라는 지역기구 입장에서 미국과 중국 사이 동남아를 둘러싼 경쟁과 균형 자체는 나쁜 일이 아니다. 두 강대국이 경쟁할 때 동남아 국가들은 양쪽에 대한 일정한 협상력(leverage)을 가질 수 있다. 그러나 미국이 중국에만 집중하고 중국에 대한 전선을 좁게 가져갈 때 동남아 지역에서 오히려 미-중간 힘의 균형은 무너질 수 있다. 미국이 중국과 경쟁의 전선을 넓게 펴 동남아 국가와 아세안 지역에 관심을 두고 강력하게 관여정책을 펴는 것이 동남아 국가 입장에서는 더 바람직하다. 그러나 미국의 이익을 우선시하는 미국 우선주의(America First) 정책 기조 하에서는 트럼프 1기 때 그랬던 것처럼 동남아 국가, 개발도상국의 모임인 아세안에 미국은 큰 관심을 보이지 않을 것이다.
결정적으로 이런 미국의 동남아 관심 퇴조는 아세안 주도의 지역 다자기구에 대한 소홀함으로 나타난다. 트럼프는 1기 때 아세안 주도의 정상회의인 동아시아정상회의(East Asia Summit, EAS)에 한 번도 참여하지 않았다. 그는 임기 첫해인 2017년 회의 개최지인 필리핀까지 갔다가 정작 EAS에는 참여하지 않고 돌아갔다. 아세안 주도 다자협력인 아세안안보포럼(ASEAN Regional Forum, ARF), EAS, 아세안확대국방장관회의(ASEAN Defense Ministers’ Meeting Plus, ADMM+) 등에 미국이 참여하지 않으면 이 제도에 대한 국제사회의 관심도 줄어든다. 이런 제도에서 구현되는 아세안중심성(ASEAN Centrality)도 약화된다. 아세안중심성이 약화되면 아세안 회원국들 사이에서도 아세안을 중심으로 한 구심력보다는 원심력이 더 크게 작용할 가능성이 높다.
몇몇 개별 국가도 정치적으로 미국과 관계 조정을 하거나 잠재적 긴장 상태를 맞이할 수 있다. 필리핀은 마르코스(Ferdinand Marcos Jr.) 대통령 취임 이후 남중국해 영토 분쟁을 매개로 바이든(Joe Biden) 행정부와 안보 협력을 크게 증진시켰다. 마르코스 행정부가 트럼프 행정부와 이와 유사하거나 더 높은 수준의 해양 안보 협력을 하기는 쉽지 않다. 남중국해에서 중국의 활동이 갑작스럽게 현상 변경을 가져올 정도로 수위가 높아지거나 필리핀이 미국의 협력에 상응하는 대가를 미국에 지불해야만 가능할 것이다. 2025년 아세안 의장국을 맡는 말레이시아는 헤징(hedging)이라고 하는 위험 분산 전략의 대가다. 특히 안와르 이브라힘(Anwar Ibrahim) 총리가 2022년 취임한 후, 중국은 물론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러시아와도 거리를 좁히고 있으며 최근에는 BRICS에도 가입했다. 이런 말레이시아의 아세안 리더십도 잠재적으로 트럼프 행정부의 미국과 일정한 긴장을 만들어 낼 수 있다.
인도네시아와 싱가포르는 동남아 지역에서 세력균형의 문제에 가장 민감한 국가다. 미국의 관여가 줄어들면서 생기는 힘의 공백 혹은 균형의 붕괴를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고심해야 한다. 베트남은 줄곧 미국 정부가 남중국해 문제에서 베트남이 중국에 대해 가진 비판적 자세로 인해 미국의 주요 파트너로 삼았던 국가다. 그러나 역시 트럼프의 탈 동남아 노선이 이런 기존의 관계에 중요한 변화를 가져올지 모른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이와 더불어 미국 시장 무역 3대 흑자국 중 하나인 베트남은 잠재적 무역 압박에도 대비해야 한다. 미얀마의 군부는 미국이 동남아 특히 미얀마 문제에 큰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면 트럼프 행정부 등장이 나쁜 소식은 아니다. 트럼프 1기 때, 즉 미얀마의 아웅산 수치(Aung Saan Suu Kyi) 민간정부가 서방국가의 지원을 필요로 할 때 미국은 거기 없었다. 이런 미국의 정책이 반복된다면 미얀마 군부에게 자유롭게 움직일 공간을 제공할 것이고 미얀마의 정치 상황 변화는 더욱 요원해진다.
경제적으로도 전망이 밝지 않다. 무역에 의존하는 동남아 개발도상국가는 경제성장을 위해 미국 시장 접근이 중요하다. 대부분 동남아 국가에게 중국이 최대 경제협력 국가인 것은 맞지만 여전히 투자, 무역에서 미국이 차지하는 비중은 2~3위권으로 매우 높다. 동남아 국가들이 미국 시장 접근을 위해 기대를 가졌던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rans-Pacific Partnership, TPP)의 부활은 고사하고, 바이든(Joe Biden) 행정부 시기 고육지책으로 만들었던 인도-태평양경제프레임워크(Indo-Pacific Economic Framework, IPEF)도 형해화 되거나 사라질 전망이다. 이런 상황에서 미국이 동남아를 포함한 인태 지역의 자유무역질서 강화를 위한 리더십을 발휘해주기 바라는 것은 연목구어(緣木求魚)와 같다.
경제적으로 미국 우선주의는 보호무역과 동전의 양면이다. 미국 시장에서 지금까지 흑자를 많이 냈던 국가들은 미국의 중국에 대한 관세 압박이 자신들에까지 확산되는 상황을 맞이할지도 모른다. 2023년 기준으로 베트남은 미국 시장에서 중국, 멕시코에 이어 제3위의 무역흑자국이다. 태국,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등도 미국 시장에서 무역 흑자를 보는 상위 15개 국가에 속한다. 미국의 중국에 대한 관세 압박 등으로 인해 인접한 동남아 국가들로 생산기지가 넘어오거나 단기적으로 대미 수출이 늘어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 대미 수출이 늘어난 효과는 곧 관세 폭탄이라는 압력으로 돌아올 수 있다.
국내 경제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트럼프가 꺼내든 대중 무역 압박, 관세 인상은 미국 소비자들이 원하는 값싼 소비재 수입을 억제하고 그 여파로 미국 내 물가 상승을 부채질할 수 있다. 여기에 강력한 이민자 단속은 그동안 가용했던 값싼 노동력을 활용하기 어렵게 만들고 이는 임금 상승으로, 그리고 나아가 인플레이션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 국내적으로 인플레이션 압박을 받게 되면 연방준비위원회는 금리 인상의 유혹을 느끼게 된다. 높아진 금리는 다시 동남아를 비롯한 해외의 달러가 미국으로 돌아오게 만들고 이로 인해 동남아에 대한 해외직접투자는 줄어들게 된다. 뿐만 아니라 달러 외채를 가진 동남아 국가들의 외채 상환 및 이자 부담도 덩달아 늘어난다. 경제적 악재가 줄지어 나타날 수 있다.
트럼프의 백악관 복귀가 직접적으로 동남아와 관계에 미치는 영향보다 더 중요한 문제는 단기간에 눈에 보이지 않는 변화일지 모른다. 동남아 국가와 아세안이 미국에 대해 가지는 확신과 신뢰의 붕괴라는 근본적 문제가 나타날 수 있다. 냉전 기간 미국의 냉전 수행 목적으로 동남아에 관여했던 미국은 냉전이 끝나자마자 동남아를 떠났고 이후 미국의 외교·군사 정책의 초점을 중동에서 아시아로 이동시키겠다는 오바마(Barack Obama)의 피봇 정책까지 약 20여 년간 동남아에서 사실상 부재했다. 이 시기 동남아에서 중국의 영향력 확산은 이런 미국의 공백에 힘입은 바 크다. 오바마의 아시아 중시 정책이 10년을 넘기지 못하고 트럼프 1기 행정부는 4년간 동남아에 무관심했다. 바이든 행정부는 트럼프의 대외정책을 돌리려 했지만 사실상 동남아 지역에 대한 관여에서는 큰 흔적을 남기지 못했다. 트럼프 행정부 이후 줄어들던 동남아 국가의 미국에 대한 확신이 바이든 취임을 계기로 반짝 반등했다가 바이든 행정부 2023년 설문 조사에서는 중국과 같은 수준까지 내려갔다.
다시 동남아에 무관심할 것으로 보이는 트럼프 행정부를 맞이하는 동남아 국가의 미국에 대한 확신과 신뢰는 바이든 행정부 마지막 보다 높지 않을 것이다. 여기에 미국 우선주의를 상징하는 트럼프의 MAGA(Make America Great Again,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라는 선거 구호가 겹치면 동남아 국가, 더 나아가 글로벌 사우스(Global South)가 가진 미국에 대한 신뢰는 크게 줄어들 것이다. 한때 전 세계에 공공재를 공급하고 리더십을 챙겼던 미국이 이제 트럼프 2기 행정부를 기점으로 확실하게 흔한 일반적인 국가들 중 하나로 가는 내리막길을 걷고 있는 건 아닌가?
* 이 글의 내용은 아시아연구소나 서울대의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Tag:미국, 트럼프, 동남아시아, 아세안, 리더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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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소개
이재현(jaelee@asaninst.org )
현) 아산정책연구원 수석연구위원, 해양경찰청 자문위원, 한국동남아학회 부회장.
전) 외교부 정책자문위원, 신남방정책특별위원회 민간자문위원, 한국동남아학회 국제이사.
주요 저서와 논문
Southeast Asian Perspectives of the United States and China: A SWOT Analysis (The Asan Institute for Policy Studies, 2022).
『피벗: 미국 아시아 정책의 미래』 Kurt Campbell, (역서), (아산정책연구원, 2020).
『지정학적 시각과 한국 외교』 (공저), (사회평론 아카데미, 2019).
“강대국 경쟁 속 동남아의 생존 전략: 역사적 관점과 통시적 비교,” 『세계지역연구논총』 42(1), 20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