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특집: 아시아 MZ세대와 사회변화(4)
베트남 근현대사 속의 청년과 청년단

윤대영 (서울대학교)

이 글은 베트남 근현대사 전개 과정에서 활동했던 청년들의 역할을 살펴본다. 식민지 조국을 ‘해방’시키기 위해 노력했던 청년들은 독립 이후의 남북 분단과 무력에 의한 흡수 통일을 각자의 방식으로 경험하게 되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다양한 형태로 분출된 사회 문제는 청년들의 태도와 행동에 영향을 미쳤다. 그래서 개혁과 개방을 선택한 베트남 정부의 지속가능한 도이 머이(Đổi Mới, 쇄신)는 청년들의 다양한 움직임을 조율하는 데 달려 있다.

닌 빈(Ninh Bình)성, 닌 띠엔(Ninh Tiến)의 청년단 대표 대회(2022-2027년 임기)
출처: http://thanhphoninhbinh.vn/

삼기개고(三圻皆苦) 아당안지(我當安之)

19세기 중반부터 선교의 자유와 통상을 목적으로 베트남에 접근하기 시작한 프랑스는 1860년대에 남부(Cochinchine, 남기[南圻]) 지역을 점령한 후 식민 지배권을 중부(Annam, 중기[中圻])와 북부(Tonkin, 북기[北圻])로 확대해 나갔다. 결국, 1883년에 체결된 아르망(Harmand) 조약에 의해 베트남은 프랑스의 보호국임을 공식적으로 인정하기에 이르렀다. 이후 아르망 조약의 내용은 1884년에 체결된 빠뜨노트르(Patenôtre) 조약으로 약간 수정되었는데, 1945년 베트남이 독립할 때까지 양국의 관계를 결정하는 기본적인 방침이 되었다. 이처럼 남부, 중부, 북부 ‘삼기[三圻]’가 식민지화되어 베트남 사람들이 ‘고통’을 겪고 있던 상황에서, ‘내’가 나라의 독립을 회복하여 세상을 ‘안정’시키겠다는 제1세대 청년들(1860-1880년대 출생)이 등장하게 되었다.

프랑스인들은 1860년대와 1870년대에 베트남어를 알파벳으로 표기하는 방식(현재의 베트남어인 꾸옥 응으[quốc ngữ, 國語를 말함])으로 사용하도록 했고, 이 과정에서 베트남의 전통적인 한자와 베트남식 한자 놈(nôm)이 사라진다면 남부 지역을 보다 쉽게 통치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당시에 이 정책을 고통스럽게 받아들였던 수많은 문사(文士)들과는 달리, 선진적인 베트남 청년들은 새로운 베트남어 표기 방식을 수용함으로써 자국어를 용이하게 표현하면서 교육적인 효과를 거두었다. 이후 1906년의 전통 교육 개혁, 1919년의 전통 교육 폐지, 프랑스어·현지어[꾸옥 응으와 한자] 교육 의무화 등과 같은 식민지 교육 정책이 진행되었는데, 청년들은 지배의 도구였던 꾸옥 응으를 오히려 민족적인 자각과 투쟁의 무기로 바꾸어 버렸다.

아울러, 중부 출신의 청년 판 보이 쩌우(Phan Bội Châu, 1867-1940)는 근왕(勤王) 운동(1885-1896)이 전개한 반불 무장 투쟁에 참가하기를 원했지만, 너무 어리다는 이유로 의병이 될 수 없었다. 이후에 쩌우는 후배들을 일본으로 파견하여 유학시키는 동유(東遊, Dông Du) 운동(1905-1909)을 전개했다. 그리고 그는 전국을 돌면서 민족의 새로운 도약을 지원할 수 있는 기업들을 발전시켜 지배자들에게 대항할 수 있는 ‘근대적인’ 기술로 갚아 주자고 동포들에게 촉구하며 개혁과 혁명의 길을 모색하는 선구자가 되었다.

청년의 혁명과 자유하노이의 청춘

1910-1920년대를 거치면서 ‘개혁’과 ‘혁명’을 오가던 베트남의 제2세대 청년들(1890-1910년대 출생)은 점차 급진적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에 관심을 가졌다. 이러한 흐름에서 등장한 대표적인 인물이 민족주의자 응우옌 아이 꾸옥(Nguyễn Ái Quốc, 1890-1969, 1941년부터 ‘호 찌 민’이라는 이름을 사용함)이었다. 그는 1925년 6월에 베트남 최초의 공산주의 단체 베트남 청년 혁명 동지회(Việt Nam Thanh Niên Cách Mạng Đồng Chí Hội, 흔히 ‘청년’으로 약칭함)를 조직했고, 1930년 2월에 창당된 베트남 공산당은 코민테른의 지시로 8개월 후에 인도차이나 공산당으로 변경되었다.

그리고 1931년 3월 20일부터 26일까지 열린 인도차이나 공산당 중앙위원회 최고 집행 위원회 제2차 회의에서, 당 중앙은 “청년 공산당 조직은 무산 계급의 중요한 부분을 수복(收復)하기 위한 임무이고, 당이 해결해야 할 절실한 과제이다”라고 평가하면서 각 청년 조직을 통일하여 인도차이나 공산 청년단으로 만들자고 주장했다. 아울러 투쟁적인 청년을 공산주의로 견인한다는 목표가 설정되었다. 결국, 1931년 3월 26일에 설립된 인도차이나 공산 청년단(1931-1937)은 인도차이나 민주 청년단(1937-1939), 인도차이나 반제 청년단(1939-1941), 베트남 구국 청년단(1941-1956), 베트남 노동 청년단(1956-1970), 호 찌 민 노동 청년단(1970-1976) 등으로 이름을 바꾸며 유지되었다. 특히, 호 찌 민 노동 청년단은 1969년 9월에 사망한 호 찌 민 주석을 추모하기 위해 채택된 이름이었고, 당시 남부의 남부 혁명 인민 청년단도 호 찌 민 혁명 인민 청년단으로 바뀌었다.

1945년 9월 2일 베트남의 독립을 선포한 호 찌 민은 베트남민주공화국의 수립을 선포했지만, 이듬해 1946년 말부터 프랑스와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에 돌입해야 했다. 이 과정에서 1950년 2월에 제1차 전국 청년단 대회가 “전투와 미래 건설”을 위해 개최되었다. 전쟁이 종결된 후, 1956년 10월 말과 11월 초 사이에는 “북부의 사회주의 건설”을 목표로 제2차 전국 청년단 대회가 개최되었다. 아울러, 1952-1956년 동안 진행된 토지개혁에서는 강제 징병으로 적군(敵軍)에 가담해야 했던 젊은이들을 항전에 참여하도록 유도하기 위해 일정 정도의 땅이 할당되는 경우도 있었다.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이 베트남 측의 승리로 끝나자, “나비 날개 같이 가벼운 분홍빛, 초록빛의 아오 자이(áo dài)를 입은 젊은 여배우들”과 “자전거를 타고 아오 자이 자락을 바람에 날리는 아름다운 처녀들”이 다시 ‘자유’ 하노이 곳곳에 나타났다. 또한, 노천극장에는 “쌍쌍이 앉아 있는 청년 남녀들”로 가득했다. 그리고 쭉 바익(Trúc Bạch) 호수 주변의 녹음 아래에 놓여 있는 나무 의자에는 청년 남녀들이 쌍쌍이 앉아서 정답게 속삭이다가 사람이 지나가도 피할 줄 모르고, 다만 여인이 자기 머리에 썼던 논(nón)을 손으로 끌어내려 그 남자의 머리까지 가릴 뿐이었다. 그리고 호안 끼엠 호수 근처에서 “쌍쌍이 웃음을 짓거나” 바익 타오(Bách Thảo) 공원 일대를 “희희낙락하며” 자전거로 오가는 청년 남녀들도 볼거리였다.

아울러, 당시 하노이 교외의 농촌 지대에 위치한 미술 학교의 교실에서는 학생들이 나체 모델을 놓고 데생 연습을 하고 있었는데, 젊은 여인이 반쯤 드러누워 있거나 여성 한 명이 웅크리고 앉아 반나체의 포즈를 취하고 있었다. 1953년부터 정부가 특별히 관리하던 영화 또한 정치 선전만을 표현하는 수단이 아니었다. 예를 들면, 1958년부터 응우옌 홍 응이(Nguyễn Hồng Nghi)와 팜 히에우 전(Phạm Hiều Dân)이 제작한 『한 줄기의 강』(Chung Một Dòng Sông, 1959)은 벤 하이(Bến Hải) 강의 임시 남북 경계선 때문에 헤어지게 된 어떤 젊은 커플의 슬픈 사랑 이야기를 연출해 내었는데, 이 영화의 등장은 현대 베트남 영화가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전쟁과 통일, 그리고 청춘의

그러나 1960년부터 본격화된 남북의 긴장 상태는 결국 ‘베트남전쟁’의 발발로 이어졌고, 이 전쟁은 결국 1975년 4월 30일 사이공의 함락과 흡수 통일로 막을 내렸다. 시골 출신의 북베트남 군인들은 호 찌 민 시의 친절한 젊은이들을 만났는데, 이 젊은이들의 권유로 전승의 영광과 기쁨을 함께 나누는 놀라운 경험을 했다. 그리고 1976년 12월에는 남부의 호 찌 민 혁명 인민 청년단과 북부의 호 찌 민 노동 청년단이 호 찌 민 공산 청년단으로 통합되었다.

1985년 당시 공산당 간부학교의 어떤 교과서에 의하면, “합작사 형태의 집산화 덕분에 근대적인 시설이 확충되었고, 생산성과 국민의 삶도 향상되었다. 이 과정에서 해방된 일부의 젊은이들은 전쟁터로 나가서 전투에 참가했고, 인도차이나 전투에서도 총력전을 펼쳤다.” 그런데 통일 이후 향후의 10여 년은 베트남 청년들이 ‘덫’에 걸려 몸부림치는 기간이기도 했다.

통일 정부는 1975년부터 1983년까지 남부 이주를 조직적으로 장려하면서 이주민들의 토지 점유를 쉽게 인정해주었지만, 정작 필요했던 이주 관리에는 소홀했다. 그 결과, 토지를 빼앗긴 현지 주민들이 고향의 수많은 젊은이들과 함께 이주민들과 적지 않은 충돌을 일으켰다. 그리고 1983년 9월 28일 하노이에서 개최된 베트남 작가 협회 제3차 전국 대회를 계기로, “제국주의자와 팽창주의자가 우리 젊은이들의 정신을 타락시키려고 가져온 심리전의 유해한 결과들을 무력화하기 위한” 치열한 투쟁이 남부에서 시작되었다. 그러나 기성의 권위와 문화 권력을 정당화하던 영웅적인 시기가 청년 작가들에게는 더 이상 이전처럼 중요하지 않았다. 그래서 빈 딘(Bình Định) 출신 여류 시인 팜 티 쑤언 카이(Phạm Thị Xuân Khải, 1946년생)는 1986년 3월 31일에 잡지 『선봉』(Tiền Phong)에서 다음과 같이 비판했다.

당신들은 눈 뜬 채로 장님인 체하고, 귀를 열어 놓고도 못 들은 척한다. 당신들은 아첨해야 하는 상황을 한탄하기는 하지만, 옳은 말은 무시한다. 권력에 집착하는 당신들은 젊은이들이 자신들보다 낫다는 사실을 두려워하면서, 옛날 사람들의 말을 망각하고 있다. ‘아버지보다 나은 아이가 집안에 복을 가져온다는 그 말을.”

지속가능한 도이 머이: 소년이로(少年易老) 혁난성(革難成)

통일 베트남은 10여 년 동안 체제가 경직화되었고, 중국과 전쟁을 치렀고, 국제 사회에서 점차 고립되면서 심각한 경제 위기를 맞았다. 그래서 결국 1986년 12월에 개최된 제6차 전당대회는 도이 머이(Đổi Mới) 정책을 선포했다. 이 과정에서 청년 때 독립운동에 투신한 팜 반 동(Phạm Văn Đồng, 1906년생), 쯔엉 찐(Trường Chinh, 1907년생), 레 득 토(Lê Đức Thọ, 1911년생) 등과 같은 늙은 지도자들이 교체되었고, 중앙위원회와 정치국에는 젊은 멤버들이 참여하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실업 상태에 있던 도시의 젊은이들에게 일자리를 보장하는 사회경제적 임무가 중요한 사안으로 떠올랐다.

사실, 1980년대가 지나면서 전쟁을 직접 기억하고 있는 젊은이들은 점점 줄어들었다. 그리고 새로운 환경에서 소외를 당한 청년들이 증가했는데, 도시화, 자유주의 경제 개혁과 국영 기업들의 구조 조정, 그리고 캄보디아에서 철수한 제대 군인들 때문이었다. 1989년 당시 적어도 500만 명의 실업자들이 있었는데, 대개 소비 욕구가 강한 도시의 젊은이들이었다. 아울러, 1997년 아시아 금융 위기로 경제 활동이 위축되자, 농촌의 젊은이들도 무작정 도시로 떠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청년 작가들의 사회 비판이 다시 등장하기 시작했다. 동베를린 훔볼트(Humboldt) 대학에서 유학한 후 1983년에 귀국한 타인 호아(Thanh Hóa) 출신 팜 티 호아이(Phạm Thị Hoài, 1960년생)는 자서전 형태의 장편 소설 『천사』(Thiên Sứ)를 통해 자신을 기만하는 주변 세계를 분석해 나갔다. 그리고 바오 닌(Bảo Ninh, 1952년생)은 『전쟁의 슬픔』(Nỗi Buồn Chiến Tranh, 1990)에서 모든 젊은 군인들이 전쟁에서 패배했다고 솔직히 이야기하면서 ‘신성한’ 민족 해방 투쟁에 대해 의문을 제기했다. 또한, 사회적·정치적 지도층 인사이자 작가 판 티 방 아인(Phan Thị Vàng Anh, 1968년 하노이 출생)도 물질적·정신적으로 초라한 일상생활, 여성에 대한 낡아 빠진 전통의 무게, 그리고 특히 외부에서 들어온 ‘근대화’로 정체성 위기에 직면한 젊은이들의 깊은 실망감을 토로하고 있었다.

작가들의 이와 같은 사회 비판에 화답한 혁명 원로의 움직임도 주목할 만하다. 공산당의 연로한 투사 쩐 반 자우(Trần Văn Giàu, 1911-2010) 역사학·철학 교수는 호 찌 민 시에서 영향력을 행사하며 주 3회 발간되던 신문 『청춘(Tuổi Trẻ)』을 격려하고 있었다. 특히 그는 가족의 출신 성분 때문에 부당한 대우를 받는 젊은이들의 수호자가 되었고, 『청춘』 1988년 10월 27일자에서 젊은이들의 정당한 체제 비판을 공개적으로 지지하기까지 했다.

이미 ‘혁명’을 달성한 공산 정권이 ‘개혁’을 완수하기 위해서는 여전히 많은 난관을 거치며 적지 않은 시간을 기다려야 했던 것 같다. 그래서 2001년 4월의 베트남 공산당 제9차 전당대회는 ‘대단결’을 강조하며 베트남 최대의 청년 조직 호 찌 민 공산 청년단을 강화하는 데 특별한 주의를 기울였다. 이 청년단은 당의 지속적인 혁명 활동에서 전위대, 예비병대, 후계자 역할을 맡았고, 청년단의 제1비서는 정계의 요직으로 진출하는 ‘청요직(淸要職)’이기도 했다. 제11차 전국 청년단 대회(2017)의 보고에 의하면, 대략 총 2,360만 명의 베트남 청년들(16-30세) 중에서 지역별·학교별·직능별로 조직된 단원의 수는 대략 640만 명(27%)이었다. “뭐 하러 청년단에 가입해요?”라고 회의적으로 되묻는 베트남의 젊은이들도 적지 않다. 그래서 향후 베트남 ‘개혁’의 미래는 청년단의 젊은이들과 청년단 외곽에서 ‘자유로운’ 삶을 선택한 젊은이들이 소통하고 통합하는 데에 달려 있다고도 볼 수 있다. 베트남 현지의 언론이 한국의 MZ세대를 주목하는 이유도 바로 한국의 청년들을 통해 자국 청년들의 동향을 전망할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 이 글의 내용은 아시아연구소나 서울대의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2권 33호 (2022년 7월 4일)

Tag:
베트남, 개혁개방, MZ세대, 호찌민청년단, 도이머이

이 글과 관련된 최신 자료

  • 서울대학교 아시아연구소. (2022). “아시아의 청년세대.” http://diverseasia.snu.ac.kr/
  • 이영관. (2019). “베트남 문화와 도이 머이 정책 이후 베트남 경제 발전과 지속가능성에 대한 논의.” 『한국사상과 문화』 97호, 49-76.
  • 최병옥. (2019). “도이 머이(Doi Moi) 이후 베트남 교육에 관한 고찰.” 『예술인문사회 융합 멀티미디어 논문지』 9권 8호, 307-315.
  • 홍문숙. (2022). “정의와 다양성, 두 마리 코끼리 사이에서: 미얀마 MZ 세대 청년운동의 도전과 과제.” 『아시아브리프』 2권 31호. https://snuac.snu.ac.kr/
  • Quoc et al. (2022). “Building and developing a team of Vietnamese youth according to Ho Chi Minh’s will.” International Journal of Multidisciplinary: Applied Business and Education Research 3(1), 111-116.

저자소개

윤대영(sansfin@snu.ac.kr)

현) 서울대학교 아시아연구소 HK연구교수
전) 서강대학교 동아연구소 조교수

 

저서와 논문

“남중국해 문제의 기원과 쟁점화: 중국과 베트남의 파라셀 군도 및 스프래틀리 군도 영유권 분쟁과 관련하여.” 『동양사학연구』 148호, 2019.
“Between Korea and Vietnam: Kim Yung Kun’s “Ever-Changing and Impermanent” Life.” Journal of Asian History, 2016.
“The Loss of Vietnam: Korean Views of Vietnam in the Late Nineteenth and Early Twentieth Centuries.” Journal of Vietnamese Studies, 2014.
Les Idées et les Mouvements Réformistes en Corée et au Việt Nam, 1897-1911. (Editions universitaires européennes, 20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