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과 싸우는 전쟁의 유해
한국전쟁은 비극적인 민족 내전임과 동시에 세계사적인 국제전이었다. 이 전쟁의 전사자 유해 역시 민족과 국가의 영역을 넘어 변화하는 국제관계와 세계질서에서 자유롭지 않다. 지난 1990년도 탈냉전 과정이 이들의 향방에 특히 중요한 시간이었다. 탈냉전 시대의 종식 그리고 심지어 신냉전의 시대가 언급되는 오늘, 파괴의 역사를 몸으로 증언하는 이들의 입지를 통하여 이 땅의 평화를 생각해본다.
죽음의 민주주의
한국전쟁 정전협정 70주년 기념식이 2023년 7월 27일 부산에서 있었다. 유엔 참전 용사 여러분이 귀빈으로 참석한 가운데 “헌신으로 얻은 자유, 동맹으로 이룰 미래”라는 기치를 내걸고 유엔군 참전의 날을 함께 기념한 행사였다. 부산이 어딘가? 세계에서 독특한 유엔묘지(유엔평화공원)가 있는 곳이 아닌가? 13개국 2,300여 명의 한국전쟁 유엔군 전사자들이 묻혀있는 곳, 자유를 위한 헌신이 무엇인지, 국제주의적 연대가 무엇인지 경험할 수 있는 곳이다. 도대체 왜 이 많은 이국의 젊은이들이 이 땅에서 그들의 생명을 잃어야 했는지 질문하면서 말이다.
유엔묘지는 여러 면에서 독특하다. 먼저 종교적 상징을 들 수 있다. 이곳에는 기독교 문명의 십자가와 함께 이슬람의 유일신을 상징하는 초승달을 둔 묘지들이 있다. 후자는 462인의 튀르키예 전몰 용사들의 그것이다. 더하여 이곳에 왜 한국군과 전쟁 초반부터 함께 싸운 미국군의 묘지가 거의 부재한지 궁금하다. 36,000명 이상의 많은 전사자를 초래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무엇보다도 인종과 국적의 차이를 넘어서 이렇게 여러 다양한 배경의 장병들이 함께 묻힌 위령의 공간은 세계에서 전례를 찾기 힘들다. 한 예로 현대 전사자 위령문화의 표본인 세계 제1차대전의 위령 공간은 다양한 국적의 전사자들을 그들의 국적에 따라서 프랑스군, 영국군, 미군, 호주군 (그리고 독일군) 묘지 등으로 따로따로 담고 있다. 이 점에서, 즉 특정한 국가가 아니라 다양한 국가들의 연합체를 구현하는 의미에서 부산 유엔평화공원은 현대 전사자 위령문화에서 예외적이다.
현대 전사자 묘역은 평등과 민주의 근대 정치문화의 원칙을 따른다. 기존의 신분이나 계층 간 차이, 그리고 군조직 내의 계급의 차이를 무시하고 전사자는 동등하고 동일한 모습의 쉴 자리를 갖는다. 그리하여 이른바 “죽음의 민주주의”라는 시민사회의 시민으로서, 죽음을 통해 산 자들의 모범이 되는 이상사회를 구현한다고 이해된다. 이를 두고 이상적 근대민주주의 사회는 어쩌면 죽은 자들의 자리에서나 가능한 것이라고 이해할 수도 있겠다. 왜냐면 전사자 묘지가 구현하는 완전한 평등은 묘지 바깥의 산 자들의 사회에서는 실제로 찾아보기 힘들기 때문이다. 어쨌든 그렇기 때문에 전사자 묘역은 근대 국민국가의 신성한 상징물이 되었고, 이는 한국인에게도 마찬가지이다. 근대적 전사자 매장 문화가 1914∼1918년 유럽의 엄청난 파괴의 현장에서 시작하여 오늘날 거의 전 지구적 문화로 발현되었다면, 1950∼1953년 한반도를 휩쓴 폭력은 이 문화에 또 다른 중요한 변화를 가져왔다. 이 변화를 알아야만 부산 유엔묘지의 모습을 이해할 수 있다. 나아가서 그렇게 해야만 오늘날 한반도와 동아시아가 처한 위기의 현실을 타개할 수 있는 길, 작지만 의미 있는 길이 보일 수도 있다.
한국전쟁 전사자 유해
지난 2000년도 후반 필자는 한국전쟁 전사자의 주검을 대면할 기회를 가졌다. 한국전쟁 발발 50주년 사업으로 2000년 발주한 대한민국 육군 전사자 유해발굴단에서 발굴 작업의 책임자이자 형질고고학의 권위자인 충북대 박선주 교수의 초청으로 외부 고문으로 일할 때였다. 당시 발굴단은 주로 구 낙동강 전선 영역에서 발굴을 진행했었고 이후 우리가 고지전으로 알고 있는 중부 전선으로 영역을 확대하였다. 당시 시민들의 관심이 대단했는데 여기엔 2004년 강제규 감독의 전쟁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의 영향이 컸다. 시작과 끝이 유해 발굴 현장으로 구성된 당시 최고의 블록버스터였다. 낙동강 전선의 유해 발굴은 그야말로 내전의 현장, 동족상잔의 현장이었다. 거의 모든 주검이 코리안의 그것인데 체질인류학 언어로 “섞임(commingling)”의 현장에서 유해를 수습하고, 수습된 유해를 아군과 적군으로 구별하고, 아군의 유해는 신분 확인을 위한 DNA 추출을 포함한 여러 노력이 소요되었다. 북한군이 낙동강 전선에 포진할 때쯤에는 대한민국의 수많은 청년과 학생들이 그들의 전쟁에 동원되었다는 역사적 사실은 국군 유해발굴단에 큰 도전이었다. “섞임”의 현실은 중부 전선 옛 고지전의 현장에서도 종종 발견되었다. 물론 이 현장은 내전 혹은 동족상잔의 성격과 함께 국제전으로서 한국전쟁, 한편으로는 유엔군 다른 한쪽은 중국지원군과 북한군 사이 전쟁의 성격을 강하게 갖고 있었다. 정치와 이념의 차이에 국가와 인종적 차이가 더해진 발굴 현장이다.
2000년에 한시적으로 시작한 국군 유해 발굴 사업은 2010년에 이르면 그 규모가 확장되고 영구적인 정부 주도 사업으로 업그레이드되어 오늘날까지 이르고 있다. 그 시기는 앞서 언급한 것처럼 한국전쟁 50주년 그리고 60주년 기념일과 겹친다. 2010년도 중반에 이르면 유해발굴 사업은 또 다른 전환점에 이른다. 2014년을 시작으로 중부지방 유해발굴 과정에서 수습된 중국지원군 유해가 중국으로 송환되어 선양의 항미원조열사묘에 안장되었다. 현재 거의 천명에 육박하는데 한중 외교사에서 중요한 에피소드이다. 그런데 여기서 꼭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한국군과 한국 정부의 이 사업이 한반도에서 근래에 진행된 전사자 유해발굴 사업 중에 처음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탈냉전의 유해발굴
1989∼1991년 베를린장벽이 무너지고 구소련 제국이 해체되는 과정, 말하자면 20세기 중후반 세계질서를 규정했던 냉전이 종식되는 과정에 동아시아에서는 일련의 중요한 체질인류학적 사건들이 있었다. 그 현장은 주로 태평양전쟁 이후 미국이 아시아에서 또다시 전쟁에 개입해야만 했던 한반도와 인도차이나였다. 1995년 베트남이 미국과 수교하기까지 베트남전쟁에서 실종된 미군 유해의 복구와 본국송환은 두 국가의 외교관계가 정상화되는 지난한 과정에서 그 무엇보다도 첨예한 이슈였다. 물론 1975년 전쟁이 종식된 이후 1980년대를 통틀어서 미국의 대베트남 엠바고와 외교적 고립 정책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베트남 공산당과 군은 이 현실을 깊이 인지하고 있었고 1995년 7월 수교에 이르기까지(그리고 그 이후에도) 미국 행정부와 군 당국의 미군 유해발굴 작업에 긴밀히 협조하였다. 중부 산악지역과 라오스와 캄보디아 국경의 밀림에서 실종된 미군 유해를 찾기 위하여, 그리하여 미국의 민심을 달래기 위하여 베트남 공산당은 심지어 그들의 기존 종교정책에 반하여 민간의 신점(神占) 전문가들을 동원하기까지 했다는 것은 비밀 아닌 비밀이다.
같은 시기 미 행정부(특히 클린턴 행정부)는 한국전쟁 중 북한 지역에 남겨지거나 이 지역에서 실종된 미군 유해 복구에 지대한 관심을 두었다. 시작은 미국이 아니라 북한이었다. 1990년 북한은 판문점 유엔사를 통하여 5구의 미군 유해를 송환했다. 1953년 정전 이후 1954년 8월 유엔군 전사자 4천여 명의 유해를 송환한 후 처음 있는 일이었다. 이어서 1990∼1994년에 북한이 그들 단독으로 발굴한 208구의 미군 유해가 관에 담겨 전달되었고 이는 역사적인 북미 공동 유해발굴 작업의 성사로 이어졌다. 1996∼2005년 기간에 33회의 공동 유해발굴이 진행되어 220구의 미군 유해가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전쟁 유해를 매개로 한 이러한 외교적 움직임은 2018년 6월 싱가포르 북미정상회담에서 다시 확인되어 당시 핵 폐기와 함께 주요 의제로 논의되었었고, 이어서 같은 해 7월 27일 북한에서 건너온 55구의 한국전쟁 참전 미군 전사자 유해가 오산 주한미군기지에서 하와이의 진주만 히캄공군기지로 출발하기도 했다.
마지막 한 사람까지
냉전의 종식과 함께 미국이 한반도와 인도차이나에서 진행한 이러한 유해 발굴은 전사자 유해에 관한 그들의 독특한 전통의 연장선에 있다. “마지막 한 사람까지(Until the Last Man Comes Home)”라는 구호가 대변하듯이 미국은 19세기 후반 대스페인 전쟁(그리고 심지어 19세기 중반 대멕시코 전쟁과 그들의 내전인 남북전쟁) 시기부터 해외의 전장에서 죽은 자국민의 시신과 유해를 그들의 고향에 안장하는 것을 “죽음의 민주주의” 영역에서 그들만의 원칙으로 지켜왔다. 이 원칙은 그들의 초기 이민사의 출발점인 유럽, 그들과 문화적으로 가까운 유럽의 양차 대전 전장과 달리 인종적, 문화적으로 생경한 아시아의 전장에서는 더더욱 중요한 원칙이었다. 그래서 1950년 말 한반도 북반의 한국전쟁 전장은 미국의 군사문화사에서 일종의 트라우마이다. 중국의 참전으로 황급하게 후퇴하면서 잃거나 수습하지 못한 수많은 자국민의 임시묘지와 시신들이 그 트라우마이다. 같은 이유로 부산의 유엔묘지에 미군의 유해가 부재하다. 한국전쟁 중 유엔군의 주축이었던 그들이 말이다. 그들의 유해는 인천, 대전, 대구 등지의 임시묘지에서 부산에 모여져 수송선으로 그들의 법의학과 체질인류학 실험실이 있는 일본 시모노세키 근처 캠프 고쿠라로 이송되었다. 아직 하와이에 그들의 유해 관련 조직 JPAC (Joint POW/MIA Accounting Command)이 자리 잡기 이전의 일이다. 그곳에서 나중에 하와이로 자리를 옮기는 일본의 인류학자 후루에 타다오를 비롯한 여러 체질인류학자들이 쓰나미처럼 밀려오는 한국전쟁 유해, 미국 전사자 유해를 상대하여 밤낮없이 3교대로 일했다. 이렇게 한국전쟁은 전쟁이 종식된 후가 아닌 전투가 한창 진행 중일 때 이미 전사자의 시신과 유해가 수습되어 전장을 떠나 본국으로 이송되는 근현대전쟁사에서 유례가 없는 새로운 역사를 기록하게 된다.
유해 송환의 외교
이 역사는 현재도 진행 중이다. 그리고 그 중요한 표적은 현재 휴전선 이북의 한반도, 전쟁의 포화가 멈춘 지 어언 70년이 지난 오늘날 아직도 그 파괴의 역사에서 벗어나지 못한 이 땅이다. 한반도를 비롯해 세계정세가 심상치 않은 오늘이다. 2022년 2월 푸틴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유럽은 이차대전 이후 초유의 사태에 직면해 왔다. 점차 힘들어져 가는 대러시아 우크라이나 방어를 위해 프랑스의 마크롱 대통령은 심지어 유럽의 병력이 이 전장에 참전할 가능성을 언급하고 있다. 한반도도 이미 이 전쟁에 깊이 관여되어 있다. 이란의 드론과 중거리 미사일과 함께 북한은 단거리 미사일과 엄청난 양의 포탄을 러시아의 서부전선에 지원하고 있다. 대한민국 역시 우크라이나에 대한 기존의 인도적 지원을 넘어서 군사적 지원을 하도록 미국과 유럽연합으로부터 요청받고 있다. 어려운 문제다. 이런 상황에 북한은 세계질서가 소위 “신냉전”의 구도에 진입했다고 정의하고 격렬한 언어로 자신을 내세우고 있다. 한국전쟁 이후 1950년대 말부터 중러 두 강대국을 뒷배경으로 그들 사이에 줄타기 외교를 하면서 자신의 외교적 입지를 구축했던 그들에게 익숙한 옛 질서의 귀환이며, 이 질서 속에서 어찌 보면 그들에게 편안한 주체 노선의 복원, 새로운 주체 외교의 전개이다. 중국은 점증하는 경제 위기에도 불구하고 홍콩을 넘어 이제는 타이완을 병합한 강하고 완전한 중국 건설의 노선에서 아직 변화를 보이지 않는다. 1950년 6월 한반도의 전쟁으로 인하여 양안 통일이 좌절되고 당해 10월 중국이 이 전쟁에 참전할 때 그들 지원군의 주력이 양안 전쟁을 위해 중국 남부 해안지역에 집결해 있던 부대들이었음을 상기할 때 점증하는 양안의 위기는 결코 남의 일이 아니다.
유럽의 전쟁문화사 연구자인 죠지 모시(George Mosse)는 그의 저작 『전사자 (The Fallen Soldiers, 1990)』에서 이차대전의 파괴가 어떻게 일차대전의 (불안정하고 잘못된) 기억행위로부터 연유하는가 논한다. 바이마르 공화국의 1차대전 패배에 관한 굴욕과 분노 그리고 전사자의 이름을 도용한 영광의 회복 군중정치가 여기에 속한다. 이는 오늘날 러시아가 유라시아 서쪽 끝에서 저지르고 있는 파괴의 행위에도 적용된다. 이 불행한 전쟁의 기원에 관하여 논란이 있지만 한 지도자의 잘못된 생각, 냉전 시기 제국의 향수와 이후 패배와 굴욕의 시간에 관한 분노를 빼놓을 수 없다. 유라시아 동쪽 끝단에 있는 한반도에서는 절대 파괴의 역사가 반복되는 불행이 있어서는 안 된다. 이것이 우리의 염원이고 현재 우리의 지상과제이다. 모시가 천착했던 기억과 위령의 영역에서 파괴의 재현을 막기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들이 있다. 그중 하나, 한반도의 남쪽은 중국에 (그들이 원하든 원하지 않던) 그들의 유해를 이 땅에서 계속 수습하여 예우를 다해 그들에게 송환하는 것이다. 다행히 중국 중앙군사위원회와 외교부는 올해 초 미국과 유해발굴 협력(2차대전 중 중국 남부에서 실종된 소수의 미군 유해)을 재개하기로 결정했다. 한반도의 북쪽은 “신냉전”이라는 검증되지 않고 아직은 이론일 뿐인(사실 이론이라고 할 수도 없는) 언사에 자신의 운명을 베팅하지 말고 보다 훨씬 현실적인 균형노선을 추구할 수는 없는지 묻는다. 중러가 아니라 미·중 사이의 균형노선이다. 이 노선에서 중요한 행위, 지금 할 수 있는 행위가 북미 간에 한국전쟁 미군 유해 송환을 재개하는 것이다. 만약 협의가 어렵다면 그리고 만약 자존심이 이를 허락하지 않는다면 준비되었으니 와서 가져가라 할 수도 있지 않은가?
마지막으로 옛 고지전 전장의 어느 곳에 작은 비석 하나 세우면 어떨까? 물론 부산의 유엔묘지와는 성격이 다르지만, 이곳에도 수많은 젊은 생명들의 주검이 있었다. 비석에 대한민국 국군과 북한군, 중국군과 유엔군 전사자들이 각기 다른 그들의 고향 땅으로 혹은 고향에 가까운 곳으로(북한군 유해는 휴전선 근처 파주 북한군 임시묘지에 안장된다) 자리를 옮기기 전에 여기서 서로 이웃하고 지냈다는 소박한 문구를 적으면 어떨까? 70년이란 오랜 세월을 함께 말이다. 그래서 평화를 염원하는 이 땅의 청년들과 아시아와 태평양의 젊은이들이 그들의 산행길에 잠시 발길을 줄 수 있는 곳, 그래서 20세기의 위령문화를 넘어서는 새로운 위령문화의 작은 초석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전쟁을 막는, 전쟁과 싸울 수 있는 전사자 위령문화 말이다.
* 이 글의 내용은 아시아연구소나 서울대의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Tag: 한국전쟁,유해,유엔묘지,위령문화,전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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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권헌익 (2022). “제 3 세계 운동의 기원으로서 한국전쟁-버마의 우 누의 중립주의를 연결고리로.” 『역사비평』 224-250.
- 김성인 (2020). “애도불가능성을 전복할 연대의 시선을 찾아서: 권헌익 (정소영 옮김)” 『전쟁과 가족: 가족의 눈으로 본 한국전쟁』, 『비교문화연구』 26(2), 139-151.
- Kwon, H. (2023). “Religion and the Cold War: A View from Korea.” Journal of Korean Religions 14(1), 87-113.
- Kwon, H. (2020). “Anthropology and World Peace.” HAU: Journal of Ethnographic Theory 9, 279-288.
- Kwon, H. (2020). “The Violence of the Cold War.” Cambridge World History of Violence 4. Cambridge University Press.
저자소개
권헌익(hk2159@snu.ac.kr)
현) 서울대학교 아시아연구소 HK교수, 캐임브리지대학 트리니티칼리지 Senior Research Fellow in Social Science, 영국 학술원 회원
전) 서울대 사회과학대학 초빙석좌교수, 런던정경대학 인류학 교수
주요 저서
Spirit Power: Politics and Religion in Korea’s American Century (Fordham University Press, 2022).
After the Korean War: An Intimate History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20, <전쟁과 가족>).
North Korea: Beyond Charismatic Politics (Rowman & Littlefield, 2012, <극장국가 북한>).
The Other Cold War (Columbia University Press, 2010, <또 하나의 냉전>).
Ghosts of War in Vietnam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8, <베트남 전쟁의 유령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