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아시아연구소 소장 신년사
무엇을 해야 하는가? 지역학 연구의 국제적 허브를 꿈꾸며

채수홍 (서울대학교 아시아연구소 소장, 인류학과 교수)

어느덧 새해가 우리 곁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올해는 갑진년 청룡이 날아올라 기운이 넘치는 시간이라고 합니다. 모든 분께서 푸른 용의 기를 온전히 받으며 새해에도 건승하시길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지난 가을부터 서울대 아시아연구소 소장의 역할을 맡게 되면서 서울대 아시아연구소 내방객의 대다수가 몇 가지 사실에 즐겁게(!) 놀라는 모습을 자주 목격하고 있습니다. 손님들께서는 우선 기대 이상인 연구소 규모에 감탄합니다. 100명이 넘는 우수한 전임/공동/방문/객원 연구원, 조교, 행정직원이 6층의 독립건물에 북적거리는 모습을 목격하기 때문입니다. 한국은 물론이고 선진국에도 이러한 규모의 대학 산하 지역학연구소는 흔치 않습니다.

거의 하루도 쉼 없이 연구소에서 열리는 학술대회와 세미나의 양과 질에 깊은 인상을 받는다는 내방객도 많습니다. 동북/동남/중앙/서/남아시아/아프리카/베트남 등 아시아의 주요 지역을 연구하는 7개 센터와 환경/시민사회/이주/문명교류/지적 가치/발전/도시사회/한류의 문제를 탐구하는 9개 프로그램이 흥미로운 연구결과를 생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관심 있는 세미나에 참석할 기회를 자주 얻는 것이 저에게도 연구소에서 일하는 가장 큰 즐거움입니다.

지역연구에 관심이 있는 손님의 왕래가 잦아 여러 분야의 전문가를 만날 수 있는 것도 우리 연구소에 오시면 누릴 수 있는 혜택입니다. 실제로 아시아는 물론이고 서구의 주요 대학과 지역학연구소에서 아시아 연구의 흐름을 파악하고 협력 연구를 진행하기 위해 우리 연구소를 자주 방문하고 있습니다. 아시아 각 국가의 외교관이나 기업인의 방문도 많아 산·관·학 협력을 위한 네트워크 구축과 유익한 논의가 이루어지기도 합니다.

제가 서울대학교 아시아연구소의 인적·물적 자원과 활발한 활동을 길게 소개하는 것은 과장된 홍보를 하며 으스대기 위함이 아닙니다. 오히려 연구소의 활동 방식과 발전 방향에 대하여 성찰해 보고 본 연구소가 국제적인 아시아지역학 연구거점으로 거듭나기 위해 어떤 변화가 필요한지에 대한 화두를 던져보고 싶기 때문입니다. 그동안 저희 연구소는 설립과정을 이끄신 교수님과 후원자는 물론이고, 전임 소장의 리더십과 구성원의 노력, 그리고 연구소 외부의 학문적 협력을 바탕으로 비약적 성장을 거듭하였습니다. 이러한 유산이 헛되지 않기 위해서도 이제는 현실을 냉철하게 직시하는 자성과 미래를 지향하는 방향 설정이 이루어져야 할 시점인 것 같습니다.

지역학연구소 발전을 위한 목표 공유, 기획, 그리고 단계적 실천

대학을 비롯한 여러 기관과 일을 함께 하다 보면 한국사회 곳곳에 압축성장의 과실과 후유증이 공존한다는 사실을 느끼곤 합니다. 물리적, 양적 성장을 공모하고 추구하면서 발전의 목적과 방향을 상실한 채 헤매는 조직을 일상에서 쉽게 만나게 됩니다. 새로운 공간을 찾아내는 것이 신기할 정도로 나날이 새롭게 본교에 들어서는 건물을 보면서, 아시아연구소도 건설공화국의 성장 신화를 품고 있는 것은 아닌지 성찰해 보게 됩니다. 조직의 목적과 목표를 분명하게 인식하고 공유하고, 세밀한 기획에 맞추어 단계적 실천을 시도하면서, 인적, 물적 토대를 갖추어 가는 일의 순리를 거스르는 일에 익숙해 있지 않나 두렵습니다. 연구소가 얼마나 커졌고 활동이 많아졌는지 못지않게, 이러한 성장이 지역학연구소가 왜 필요한가에 대한 목표 인식을 토대로 단계적으로 발전하고 있는지에 대한 숙고가 필요하다고 느낍니다.

지역학연구소의 설립목적은 국가, 민족, 종족, 인종, 계급, 젠더의 축에 따라 분화해 있는 지역민과 상호 이해의 지평을 넓혀 지금보다 나은 삶의 가능성을 모색하고 상생을 추구하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다른 문화와 타자에 대한 이해를 시도하면서 인간의 삶이 향상되는 방안을 찾는 것이 지역학의 존재 이유일 것입니다. 이러한 목표에 대한 인식이 분명할 때 지역학은 인간이 어리석은 시행착오의 경험을 통해 축적해 온 지혜를 활용하여, 환경과 공존하면서 오늘날 만연한 전쟁, 이기적 생계양식의 추구, 문화적 증오를 극복하는 데 공헌할 수 있습니다.

물론 이러한 인식은 추상적일 뿐 아니라 복잡한 현실을 고려해 보면 이상적일 수 있습니다. 본 아시아연구소가 지역연구소로서 추구하는 목표가 설득력을 가지기 위해서는 보다 구체적일 필요가 있겠지요. 본 연구소가 모든 일을 할 수는 없을 뿐 아니라 주어진 시간 안에 할 수 있는 일도 제한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하여 발전을 도모하기 위해서는 몇 가지 원칙 아래 구체성과 현실성을 확보하려는 노력이 필요할 것입니다.

저희 아시아연구소가 미래를 향한 발전 목표가 명확하고, 구체적인 실천에 특화된 국제적인 지역연구소로 거듭나기 위해서는 우선 선택과 집중이 필요해 보입니다. 본 연구소의 우수한 연구자들이 관심을 가지고 제안하는 연구 어젠다를 듣고 있으면 욕심이 나지 않는 것이 거의 없습니다. 중요한 연구와 사업 제안이 너무 많아 지역연구소의 철학에 맞지 않거나 중요하지 않은 것이 무엇인지 의문이 생길 정도입니다. 그래서 모든 것을 다하겠다는 욕망을 내려놓고, 무엇을 먼저하고 어떤 주제를 집중적으로 다룰 것인지 아시아연구소 구성원이 공동으로 결정하고 역량을 집중할 필요가 있어 보입니다.

둘째, 연구소가 연구 프로젝트를 필두로 한 제반 사업을 실행하는 원칙과 순서를 공유할 필요가 있습니다. 주변의 학술중심 연구소가 추상적 필요성을 선험적으로 가정한 채 조직과 예산이 확보할 수 있는 새로운 사업을 기획하고, 이에 맞추어 몇 가지 조작적 실험을 한 다음, 비로소 현실적 필요성과 적합성을 구체적으로 만들어 내는 것을 자주 접하게 됩니다. 아카데미에 속한 연구소가 외부의 예산을 확보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 이유도 이처럼 순서가 바뀐 일의 진행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A4 몇 장으로 이루어진 짧은 기획서에 거창한 필요성을 언급하고, 필요한 조직과 예산을 힘주어 강조하고, 현실성과 일정도 명확하지 않은 실행 계획을 부록처럼 붙여서 지원을 결정하는 상대를 당황시키는 일도 다반사입니다. 이런 오류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일을 하는 필요에 대한 조직 내부의 공감 형성, 면밀한 기획, 현실성을 타진하기 위한 조사와 시험적 실행을 먼저 시도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를 토대로 외부의 지원을 확보하고 연구소의 조직과 예산의 투입을 단계적으로 확대할 필요가 있어 보입니다.

셋째, 민주적 의사결정이 긴요합니다. 연구와 사업이 목표대로 성취되기 위해서는 이를 실행할 담당자인 개별 연구자의 의견과 실천 의지가 가장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저희 아시아연구소도 개별 연구자의 자발성과 각 센터, 프로그램, 부서의 의견에 토대를 둔 사업이 의미 있고 가시적인 성과를 낸 바 있습니다. 반면 아래부터 위로 향하는 의사결정 방식을 훼손하는 연구와 사업은 제대로 실행되지 않은 채 말의 성찬과 실패에 대한 합리화에 머물러 있습니다. 동의와 공감을 얻어내는 민주적 의사결정은 조직 내부의 권력이 남용되는 것을 방지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연구소 구성원의 자율적 실행을 이끌어내기 위해서도 반드시 필요합니다.

연구역량 집중, 네트워크 중심의 국제화, 그리고 협력연구 심화

저희 서울대학교 아시아연구소는 이미 지난해부터 선택과 집중, 일을 실행하는 올바른 순서의 공유, 그리고 민주적 의사결정이라는 원칙 아래서 장단기 발전계획을 세우고자 논의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학술연구부, 국제교류부, 인재개발부 등 여러 부서와 각 센터 및 프로그램이 발전계획을 세우고 이를 공유하는 시간을 가지기도 했습니다. 또한 몇몇 특별위원회(task force)가 발전계획에 맞는 조직의 변화를 위해 머리를 맞대고 있습니다. 2024년 봄이 오기 전에 이러한 논의를 토대로 연구소 전체의 장단기 발전계획과 단계적 실행방법을 수립할 예정입니다.

향후 구성원의 논의를 토대로 보다 구체적 모습이 드러나겠지만, 연구소의 발전방향은 크게 세 가지를 지향하게 될 것으로 예견됩니다. 하나는 미래지향적 어젠다를 설정하고 이에 기초하여 아시아지역의 현안해결을 모색하는 데 연구역량을 집중하고 확충하는 방안을 찾아갈 것입니다. 아시아연구소가 그동안 관심을 가져온 아시아의 사회문화적 문제, 정치-외교적 갈등, 지구촌의 환경과 적정기술 활용의 문제 등에 관심을 지속하겠지만, 보다 문제-중심(problem oriented)의 구체적 접근을 시도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제가 개인적으로 관심이 있는 몇 가지 예를 들어보면 아래와 같습니다, 한국의 출산율은 장·단기적으로 정말 문제인가? 국가-민족 중심주의의 대안은 무엇인가? 서구 근대국가와 자본주의가 강화하고 있는 기술과 법의 권력에 종속되는 사회의 대안은 있는가? 급격한 환경변화 속에 인간사회는 지속가능한가? 아시아연구소 연구자들은 이와 같은 문제 중심의 질문을 공동으로 설정하여 아시아의 맥락에서 탐색하는 작업을 실행해 갈 필요가 있습니다.

본 연구소의 발전을 위해 또 하나의 시급한 과제는 국제화입니다. 지역학 연구자에게 국제화는 숙명이자 딜레마를 안고 있는 어려운 숙제입니다. 지역연구는 타자와의 협력이 필요하고 이를 지향하지만, 동시에 자신이 속한 집단의 이익과 상충하는 모순을 경험하기 마련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권력의 불평등이 지식의 지배와 종속을 낳는 현상을 목도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이런 상황으로 인하여 더더욱 타자와의 접촉과 상호이해의 폭을 넓혀갈 수밖에 없는 모순의 회로에서 벗어나기 쉽지 않습니다.

다행스러운 것은, 국내외의 많은 지역학 연구자가 타자에 대한 따뜻한 시선과 공감을 나누고 있다는 점입니다. 국제화는 세계적으로 인지되는 연구조직을 만드는 것만이 아니라 인간주의적 공감대를 지역에서 확산시키는 작업에 초점이 맞추어져야 할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 본 연구소는 국제화를 경쟁의 논리 속에서 진행하기보다 협력의 틀과 대상을 확대하기 위해 노력할 필요가 있습니다. 본 연구소가 네트워크 개념의 국제협력 모델을 모색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국내외 아시아 연구자 네트워크를 구축하고 이를 토대로 데이터와 지식을 공유하는 체계를 만들어 지역연구자가 함께 활용할 수 있도록 만들어 갈 수 있길 소망합니다.

마지막으로, 본 아시아연구소는 산·관·학 협력을 대폭 강화할 계획을 가지고 있습니다. 기업과 정부가 필요로 하는 인적 네트워크와 지식을 공급하고 교류하는 체계를 만들어 갈 것입니다. 물론 지역학 연구자에게 산·관·학 협력은 국제화와 마찬가지로 모순을 안고 있습니다. 기업과 정부가 필요로 하는 다양한 정보가 연구대상 지역민의 이해와 상충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오랫동안 베트남 노동계급의 삶을 연구해 온 연구자로서 저는 지역의 정보, 네트워크, 지식의 공유가 상생 가능성을 확대할 수 있다고 감히 말할 수 있습니다. 베트남 노동자의 정치경제적, 사회문화적 삶을 이해시키고, 현지 사회의 맥락에 맞는 노사관계를 해외투자기업에게 이해시키고 대안을 제시하는 것이, 현지인의 삶의 조건을 향상시키는 데 도움이 되는 것을 여러 번 경험한 바 있습니다. 기업이 필요로 하는 인적 네트워크를 확보해 주고, 현지인을 향한 편견과 오해를 해소하여 불필요한 갈등을 줄이는 작업이 기업과 현지인 모두의 이익에 봉사한다는 점을 깨달은 적이 많습니다. 현지에 대한 아시아지역에 진출한 해외공관과의 협력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중요한 것은 어차피 중립적이지 않은 지역학 연구자와 연구가 생산하는 지식 자체가 아니라 평화와 상생을 위한 시각이 아닐까 합니다.

갑진년 새해를 맞이하여 국제적 지역학 연구 허브가 되기 위해 저희 서울대학교 아시아연구소가 어떤 방향으로 발전해야 하며, 저 자신을 포함한 구성원이 무엇을 해야 하나 사색하다 보니 신년사가 다소 주제넘은 “훈시”나 “선언”처럼 들리지 않았는지 염려됩니다. 제 견해가 사변에 머물지 않고 새롭게 거듭나기 위해서는 연구소 내부는 물론이고 학내외 다양한 분의 조언과 협력이 긴요합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올해도 저의 연구소와 함께 해주시길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 이 글의 내용은 아시아연구소나 서울대의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4권 1호 (2024년 1월 2일)

저자소개

채수홍(chae4811@snu.ac.kr)

현) 서울대학교 아시아연구소 소장, 인류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