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안게임과 유동하는 아시아의 경계

박해남 (계명대학교)

아시안게임은 큰 규모와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대륙 스포츠 이벤트이다. 정체성 형성의 계기도 약하고 경제적으로 개최 능력도 부족했음에도, 아시안게임은 아시아의 정의와 지향을 둘러싼 동상이몽과 함께 지속되었다. 그렇기에 탈식민과 냉전, 데탕트와 탈냉전을 거치는 동안 아시안게임 참가국 명단과 아시아의 경계는 유동하였다. 1990년 이후 약 30년간 잠잠했던 아시아의 경계에 대한 질문은, 2023년 항저우아시안게임과 더불어 다시금 떠오르고 있다.

<그림> 항저우 아시안게임 개막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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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인 아시아, 여럿인 아시아

1951년 뉴델리에서 시작된 아시안게임은 2023년 항저우에서 개최되는 대회로 19번째를 맞이한다. 같은 해부터 시작된 팬아메리카게임(팬암게임, Pan American Games)과 더불어 가장 오래된 역사를 지닌 대륙별 종합 스포츠 이벤트다. 각각 1963년과 1965년에 시작된 퍼시픽게임(Pacific Games), 아프리칸게임(African Games) 보다 오랜 역사를 지니며, 2015년에 시작된 유러피언게임(European Games)과는 역사와 권위 면에서 비교할 수 없을 정도다. 1913년에 시작된 아시안게임의 전신 극동선수권대회(Far Eastern Championship Games)를 포함한다면 아시안게임의 역사는 한 세기를 훌쩍 넘긴다.

규모 면에서도 아시안게임은 다른 대륙의 대회들보다 훨씬 크다. 2023 항저우 아시안게임의 참가 선수의 수는 11,907명으로 11,420명인 2020 도쿄올림픽보다 많다. 6,857명이 참여한 2023 크라쿠프 유러피언게임, 4,386명이 참가한 2019 아프리칸 게임, 6,909명의 선수가 참가할 예정인 2023 산티아고 팬암게임이나 약 5,000명이 참가할 예정인 2023 솔로몬제도 퍼시픽게임과 비교한다면 훨씬 큰 규모다.

이렇게 규모가 큰 이유 중 하나는 올림픽보다 더 많은 종목이 개최되기 때문이다. 전 세계적으로 잘 조직된 스포츠 기구에 일정 수 이상의 선수와 심판을 필요로 하는 올림픽과 달리 아시안게임은 주최 측이 유연하게 개최 종목을 정할 수 있다. 그리고 아시안게임을 주최하는 도시들은 포용적인 자세로 아시아의 도처에서 인기를 얻고 있는 다양한 스포츠들을 다수 개최한다. 남아시아에서 인기가 많은 카바디와 크리켓, 동아시아에서 인기가 많은 야구, 바둑, 샹치, e스포츠, 동남아시아에서 인기가 많은 세팍타크로와 용선(dragon boat), 일본, 중국, 우즈벡 등의 전통 무술인 가라테, 우슈, 쿠라쉬 등이 대표적이다.

이처럼 가장 큰 규모를 지닌 대륙 스포츠 이벤트가 지속적으로 개최되고 있다는 것은 어찌 보면 다소 의외다. 2차 대전 종전 이전까지 대부분이 식민지 상태였던 아시아의 역내 교역이나 교류는 그다지 활성화되지 않았고, 지역으로서의 정체성은 발전하기 매우 어려웠다. ‘아시아’라는 개념부터가 에게해 동쪽 전체를 지칭하기 위해 유럽인들이 사용한 말이었기에 지역 정체성을 표방하기에는 난점이 있다. 게다가 아시아는 경제발전에 있어 후발주자였다. 아시아에 대한 소속감이나 아시안게임의 의미와는 별개로 개최가 결코 쉽지 않았던 것은 당연했다.

이 같은 난점에도 불구하고 아시아의 국가들이 지속적으로 아시안게임을 개최하게 된 배경에는, 역설적이게도 ‘하나인 아시아’가 아닌 ‘여럿인 아시아’가 있었다. 이후에 구체적으로 살펴볼 바와 같이, 아시안게임이라는 무대를 두고 아시아는 여러 차례 갈등하였다. 그 무대를 어떻게 연출할 것인지, 누구를 세우고 또 누구를 제외할 것인지, 각본은 저마다 달랐다. 그리고 서로 다른 각본과 서로 다른 연출의 의지야말로 아시안게임이라는 무대가 지속되도록 하는 동력이 되었다.

이 글의 목적은 아시안게임을 둘러싸고 존재했던 서로 다른 각본들과 연출들을 톺아보는 데 있다. 아시안게임은 “어디가 아시아인가”, “누가 아시아인인가?”, 그리고 “어떤 아시아를 지향하는가?” 등의 질문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었으며, 이에 대한 답은 아시안게임의 참가를 둘러싼 포함(inclusion)과 배제(exclusion)의 정치로 이어졌다. 탈식민과 냉전, 데탕트와 탈냉전이라는, 아시아가 경험한 사회 변동 속에서 아시안게임을 둘러싼 포함과 배제의 정치는 어떻게 전개되어 갔는가? 이 글은 1950년대에서 1980년대에 이르는 시기를 중심으로 아시안게임을 둘러싼 포함과 배제의 정치를 파악하여 보고자 한다.

아시안게임의 탄생

앞서도 잠시 언급했지만, 아시안게임의 역사를 멀리 거슬러 올라가면 1913년이 나온다. 영국과 미국을 중심으로 한 개신교 선교단체 YMCA(Young Men’s Christian Association)는 서울, 도쿄, 상하이, 마닐라 등 아시아 주요 도시에서 선교 활동을 진행하고 있었고, 근육기독교인(muscular Christianity) 이라 불리는 이상적 인간형을 양성하기 위하여 농구와 배구 등 스포츠를 아시아에 전파하고 있었다. 그런 YMCA의 네트워크를 주축으로 중국, 일본, 필리핀이 모여 만든 스포츠 이벤트가 극동선수권대회였다. 1913년 대회에는 홍콩, 말레이, 시암(태국)까지 6개국이 참여했지만, 1915년부터 1927년까지는 3개 국가가 참여하였고, 1930년도에는 3개국에 더하여 인도가, 1934년도에는 3개국에 더하여 네덜란드령 동인도가 참가하였다. 이런 극동선수권대회는 1920년대를 지나며 정부가 직접적으로 관여하게 되고, 1930년대 들어 국가 간 갈등의 무대가 되었다. 1934년 대회를 앞두고 일본은 만주국의 극동선수권대회 참가를 요구했고, 중국은 이에 반발하며 만주국의 참가를 무산시켰다.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면서 극동체육협회는 해체되고 더 이상 대회는 개최되지 못했다.

구루 손디(Guru Dutt Sondhi)는 현지인에게 일부 권한을 양도하는 영국 정부의 방침에 따라 1932년 IOC위원이 된 인물로, 1930년 극동선수권대회 참가 이후 그로부터 영감을 얻었다. 그는 파티알라의 국왕 야다빈드라 싱(Maharaja Yadvendra Singh)과 함께 아프가니스탄, 팔레스타인보호령, 실론(스리랑카)을 초청하여 델리에서 1934년 서아시아경기대회(Western Asiatic Games)를 개최하였다. 4년 후에는 팔레스타인에서 2회 대회가 개최될 예정이었으나 팔레스타인 독립전쟁으로 대회는 더 이상 개최되지 못했다.

전후 아시안게임 탄생을 주도한 것도 인도의 인사들이었다. 독립 이후 인도의 외무장관이었던 자와할랄 네루(Jawaharlal Nehru)는 UN으로 대표되는 새로운 세계질서 속 아시아의 지위 상승을 위한 연대의 필요성을 주장했고, 1947년 뉴델리에서 아시아관계회의(Asian Relations Conference)를 개최하며 인도를 아시아의 리더로 만들고자 하였다. 이 회의에는 한국, 중국, 필리핀, 티벳, 몽골, 북베트남,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시암, 인도네시아, 말라야연방, 버마, 실론, 부탄, 네팔, 아프가니스탄, 팔레스타인, 이집트, 튀르키예, 그리고 소련 내 공화국이었던 아르메니아, 아제르바이잔, 조지아, 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 대표단이 참가하였다.

손디는 이 회의에서 아시아를 아우르는 스포츠 이벤트 계획을 발표하였고, 각국 대표들로부터 호응을 얻었다. 몇 달 후 총리가 되는 네루 또한 이를 적극적으로 지원할 의사를 밝혔다. 이를 바탕으로 손디는 1948년에는 런던올림픽에 참가한 아시아 각국 대표단과 회의를 가진 뒤 1949년 아시아경기연맹(Asian Games Federation, AGF)을 창설한다. 그리고 1950년 뉴델리에서의 1회 아시안게임 개최를 결정한다.

제1회 대회 준비 과정은 결코 순탄하지 않았다. 손디는 1947년 아시아관계회의에 참석했던 국가들과 지속적으로 연락을 주고받았고, 파키스탄을 포함하여 이란, 이라크, 레바논, 시리아 등 인도 서쪽에 위치하는 국가들과는 별다른 연락을 취하지 않았다. 이에 파키스탄은 무슬림게임을 따로 만들 계획을 세웠다. 동아시아 측에서는 인도의 경기장 건설 및 경기 진행 능력을 의심하며 인도 개최가 무산될 경우 극동선수권대회를 부활시킬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1년의 지연 끝에 경기장은 완성되었고, 1951년 제1회 대회가 뉴델리에서 개최되었다. 참가국 리스트에 포함된 것은 인도, 아프가니스탄, 버마, 실론자치령, 인도네시아, 이란, 일본, 네팔, 필리핀, 영국령 싱가포르, 태국으로 총 11개국이었다.

자유 아시아 VS 비동맹 아시아

분단국 참가 문제는 1950년대 초 국제 스포츠계의 중요 이슈였다. IOC는 기본적으로 1국가 당 1개의 올림픽위원회만 존재해야 한다는 입장이어서, 이전에 설립된 올림픽위원회를 계승한 자본주의 국가들이 참가 자격을 얻었다. 1952년 개최된 헬싱키 올림픽에는 서독과 남한만이 참가했다. 다만 중국에 대해서는 달랐다. 전전 시기 설립된 중국올림픽위원회의 주요 인원이 대만으로 이동하였지만, 중국의 인구와 영토가 압도적이라는 사정을 고려하여 중국과 대만 모두 참여를 허용하였다. 그러나 중국은 1국가 당 1개 올림픽위원회 원칙에 어긋난다는 점을 지적하며 헬싱키대회 이후 한동안 올림픽에 참가하지 않았다.

필리핀 마닐라에서 개최될 예정이었던 제2회 아시안게임 조직위원회 역시 누구를 초청할지 정해야 했다. 입장은 명확했다. 필리핀 정부는 탈식민 이후에도 친서방 기조를 유지하고 있었고, 조직위원들 역시 1930년대부터 존재했던 IOC 인맥을 중시했다. 이에 따라 아프가니스탄, 버마, 캄보디아, 실론, 홍콩, 등 총 18개국이 초청을 받았는데, 분단국 중에서는 한국, 대만, 남베트남이 초청 리스트에 포함되었다. 이스라엘 역시 초청한 조직위는 새로운 아시아의 정체성으로 ‘자유’와 ‘민주’를 강조하며 ‘자유 아시아’ 연대의 공간으로 아시안게임이라는 무대를 연출하였다.

‘자유 아시아’의 모범생이었던 일본의 수도 도쿄에서 1958년 열린 제3회 대회 역시 마찬가지여서, 한국, 대만, 남베트남, 그리고 이스라엘이 다른 15개국과 더불어 초청국 리스트에 포함되었다. 이렇게 제2회와 3회, 두 대회를 지나며 아시안게임은 냉전 정치의 수단이 되었다. 그리고 ‘자유 아시아’를 표방한 아시안게임의 무대에서 사회주의 국가들은 배제되었다. 아라비아반도의 국가들은 아시아경기연맹(AGF)에 조차 가입하지 않은 상태였다.

1962년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에서 열린 제3회 대회와 더불어 아시안게임의 무대 연출은 크게 변화한다. 1955년 인도네시아 정부는 반둥회의에 23개의 아시아 국가(아프가니스탄, 예맨, 이라크, 이란, 인도, 캄보디아, 사우디아라비아, 시리아, 실론, 태국, 중국, 일본, 네팔, 파키스탄, 버마, 북베트남, 남베트남, 필리핀, 요르단, 라오스, 레바논, 튀르키예, 키프로스)와 7개의 아프리카 국가(가나, 이집트, 수단, 에티오피아, 리비아, 라이베리아)를 초청하였고, 이를 통해 비동맹세력 내지 제3세계 리더로서의 지위를 확보하고자 하였다. 그런데, 1950년대 수마트라 지역에서 PRRI·Permesta 반란이 발생하였고, 비동맹 운동을 위한 두 번째 회의는 1961년 유고슬라비아의 베오그라드에서 개최되기에 이르렀다. 반란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수카르노 정부는 서방세계와 멀어지고 사회주의 국가들과 가까워졌다.

이런 상황에서 수카르노 정부는 아시안게임을 개최하여 ‘비동맹 아시아’의 새로운 무대를 연출하고자 했다. 서구 제국주의의 지배에서 벗어나 새로이 떠오르는 세력의 모습을 보여주는 무대로 아시안게임을 선택했던 것이다. 무대에 오를 이들의 명단은 당연히 이전과 달라야 했다. 조직위원회는 이라크, 사우디아라비아, 이집트, 튀르키예 – 이집트와 튀르키예는 아시아관계회의에 참여한 아시아 국가로 여겨졌다 – 를 새로이 초청하고자 하였고, 인도네시아와 국교가 없었던 한국, 대만, 이스라엘은 명단에서 빼고자 하였다. 조직위원회는 새로운 국가를 초청하는 데는 실패하였지만, 대만과 이스라엘 선수단의 참가를 막는 데는 성공하였다. 개최국을 포함하여 참가국 리스트에 포함된 국가는 총 17개였다.

IOC회원국의 아시안게임 참가를 거부한 박탈한 조치는 IOC의 반발을 불러왔다. 1963년 초, IOC는 인도네시아를 제명하고 올림픽에의 참가 자격을 무기한 박탈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러자 인도네시아는 새로운 무대를 만들기로 결심한다. 가네포(GANEFO)라고도 불리는 신흥국 경기대회(Games of the New Emerging Forces)를 통해 제국주의를 벗어나 새로이 부상하는 국가들의 무대,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와 유럽의 사회주의국가들을 포괄하는 새로운 무대를 만들고자 한 것이다. 때마침 소련의 영향력에서 벗어나고자 했던, 그리고 올림픽과 아시안게임에는 출전할 수 없었던 중국이 재정을 후원하였다. 그 결과 1963년 자카르타에서 개최된 제1회 가네포대회에는 아시안게임보다 더 많은 51개국에서 선수들이 참가하였다. 그 중에는 중국이나 북한처럼 올림픽과 아시안게임에서 볼 수 없었던 국가들도 있었다. 제2회 가네포대회는 아시아 17개국의 육상 선수들이 모여 1966년 겨울 캄보디아 프놈펜에서 개최되었는데, 이는 방콕 아시안게임 일주일 전이었다.

제5회 아시안게임은 베트남전에 참전한 미군의 휴양지로 유명해진 태국의 방콕에서 개최되었다. 이는 아시안게임의 연출이 ‘자유 아시아’를 중심으로 다시 구성되었음을 의미한다. 조직위원회는 한국, 일본 등 다른 15개의 국가와 더불어 이스라엘과 대만을 초청하였다. 본디 서울에서 개최될 예정이었던 1970년 제6회 아시안게임 역시 방콕에서 개최되었다. 경기장 건설 비용을 부담할 수 없던 한국 정부가 개최권을 반납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과 대만은 이번에도 다른 17개 국가들과 함께 아시안게임 초청 리스트에 포함되었다.

데탕트와 아시안게임의 재구성

1960년대 말부터 아시아에는 변화가 찾아왔다. 대륙의 동쪽에서는 중국과 미국 사이의 화해와 접근이 시작되었다. 1972년에는 일본과 중국이 수교를 맺었다. 대륙의 서쪽에서는 아라비아 반도에 큰 영향력을 행사해왔던 영국이 손을 떼면서 아랍에미리트와 바레인, 카타르가 독립 했고, 미국은 베트남전에 묶여 중동에 큰 영향력을 행사하기 어려웠다. 그리고 소련은 아직 이 지역에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하고 있었다. 중동 국가들은 국제 석유가격을 조정할 수 있는 힘을 갖게 되었고 이를 바탕으로 부를 쌓기 시작했다. 데탕트라 불릴 수 있는 이 변화는 아시아의 스포츠 지형과 아시안게임에 큰 영향을 미친다.

이러한 변화를 반영한 것이 1974년 제7회 테헤란 아시안게임이었다. 중동지역에서 강대국의 힘이 일시적 공백을 맞이했던 상황에서 중동과 인도양의 리더 지위를 얻고자 했던 이란 정부는 이 각본을 구현할 무대로 아시안게임을 선택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중동과 인도양을 중심으로 많은 국가들이 아시안게임에 참여할 수 있어야 했다. 1971년 국왕의 형이었던 골람 레자 팔라비(Gholam-Reza Pahlavi)는 아시아경기연맹(AGF) 회장이 되었고, 그간 AGF에 가입되어 있지 않던 아라비아반도의 여러 국가들과, 아랍문화권인 터키와 리비아, 그리고 인도양의 호주와 뉴질랜드를 아시안게임에 초청할 것을 요구하였다. 이에 따라 바레인, 쿠웨이트, 사우디아라비아, 이라크가 먼저 참가 자격을 얻었고, 레바논, 시리아, 아랍에미리트는 74년 대회 중 AGF 회원이 되었다. 그러나 호주, 뉴질랜드, 터키, 리비아의 가입은 승인되지 않았다.

이 시기 가장 중요한 화두는 중국이었다. 1971년의 이른바 ‘핑퐁외교’로 중국은 미국과의 관계 개선에 나섰고, 그해 가을 UN에서 대만의 자리를 대체하였다. 이란은 더 적극적이어서, UN보다 앞서 중국과의 국교를 체결한 상태였다. 소련을 견제하기 위해서는 중국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조직위원회는 중국의 아시안게임 참가를 주장하기 시작했고, 1972년 중국과 국교를 맺은 일본은 이를 지원하고 나섰다.

하지만, 중국의 아시안게임 참가는 쉽게 결정되지 못했다. ‘1 국가 당 1개 올림픽위원회’라는 원칙을 고수하던 IOC가 회원국인 대만을 제외해선 안된다는 방침을 분명히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테헤란 조직위는 서구가 주도하는 IOC의 뜻을 따를 수 없고, 중국이 참여하지 못한다면 진정한 아시안게임이 될 수 없음을 주장했다. 그리고 투표를 통해 중국의 참가를 관철시켰고, 북한과 몽골의 참가도 허용했다. 그러자 대만은 아시안게임의 참가를 중단했다. 그렇게 개최된 아시안게임의 참가국 리스트에는 전보다 6개 많은 26개국이 포함되었다.

‘비동맹 아시아’를 지향하고 대만의 참가를 중단시켰다는 점에서 테헤란 아시안게임은 1962년 자카르타 아시안게임과 유사한 측면이 있었다. 아라비아반도 국가들과 중국, 북한, 몽골까지 참가시켰다는 점에서는 자카르타 아시안게임의 구상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간 측면도 있다. 테헤란의 조직위는 IOC와의 갈등이 최악으로 치달을 경우 제2의 가네포대회를 만들 생각까지 갖고 있었다. 그러나 IOC의 반응은 1962년과 달랐다. 데탕트라는 전 지구적 변동 속에서 중국의 존재를 무시할 수는 없었다. IOC는 이란에 대하여 아무런 제재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그랬기에 1978년 제8회 아시안게임은 방콕에서 개최되었지만, 참가국 리스트에 큰 변동이 없었다. 재정난을 이유로 싱가포르와 파키스탄이 개최권을 반납한 이 대회는 중동 국가들의 재정지원에 힘입어 방콕에서 개최될 수 있었다. 그런 이 대회의 초청 리스트에는 중국이 포함되었고, 대만은 그러지 못했다. 중요한 변화는 이스라엘이었다. 중동 국가들의 요구로 이스라엘은 아시안게임 초청 리스트에서 배제되었다. 쿠웨이트의 왕족 파하드 알 사바(Fahad Al-Ahmed Al-Jaber Al-Sabah)의 재정 지원을 받은 1982년 제9회 뉴델리 아시안게임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 대회 이후 알 사바의 주도로 아시아경기연맹(AGF)을 대체하여 아시아올림픽평의회(Olympic Council of Asia)가 만들어졌고, 이스라엘의 회원 자격은 영구 박탈되었다.

하지만 1980년대 말까지 지역에서 냉전의 그림자가 아주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1986년 서울에서 열린 제10회 아시안게임은 중국이 참가함으로써 동북아시아 냉전 종식을 향한 첫걸음을 내디뎠지만, 북한을 포함하여 베트남, 라오스, 몽골, 남예멘, 아프가니스탄, 시리아 등 사회주의 국가들은 대회에의 참가를 거부하였다.

탈냉전으로의 전환을 알리는 아시안게임의 무대는 1990년에 만들어졌다. 개막식에 모습을 드러낸 대만 선수단을 향해 환호하는 중국 관중들, 남북한이 공동으로 결성한 응원단이 준비하여 펼쳐 든 한반도기, 이러한 장면이 연출된 1990년 제11회 북경아시안게임이 냉전의 일단락을 고하는 무대가 되었다.

유동하는 아시아의 경계

1990년대 들어서면서 아시안게임의 참가를 둘러싼 포함과 배제의 정치는 휴식기에 접어들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시아의 경계가 고정된 것은 아니었다. 소비에트연방에서 독립한 국가들 중 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 타지키스탄, 키르기스스탄은 아시아를 선택했지만, 아르메니아, 아제르바이잔, 조지아는 유럽을 선택했다. 이후 카자흐스탄의 축구는 유럽을 선택했고, 호주와 뉴질랜드의 축구와 농구는 아시아를 선택했다.

경계를 둘러싼 질문은 2023년 제19회 항저우아시안게임을 두고 다시금 제기되었다. 아시아의 경계 바깥에 있다고 생각했던 국가들의 참여가 타진되었기 때문이다.

첫 번째는 호주와 뉴질랜드였다. 2010년대 들어 축구와 농구 등 몇 개 종목에서 이미 아시아 소속이 된 두 나라는 2019년 아시아올림픽위원회(OCA)가 결정한 2022 항저우 아시안게임 초청 리스트에 포함되었다. 다만, 모든 종목이 아닌 축구, 농구, 배구, 비치발리볼 등 일부 종목이었다. 하지만 2022년 봄 두 나라는 COVID19 상황을 이유로 불참 의사를 밝혔고, 대회가 1년 연기되었음에도 참가 의사는 표명하지 않았다.

두 번째는 러시아와 벨라루스였다. 2022년 초 우크라이나를 공격한 러시아와 이를 도운 벨라루스에 대하여 유럽 내 경기 출전을 금지한 IOC는 2023년 초부터 이들 국가 선수들의 타 대륙 스포츠 이벤트 참가를 타진하였다. 그러자 OCA가 나서 2023 항저우 아시안게임에 두 나라 선수들이 옵저버 자격으로 참가하도록 길을 열어주었다. 이후 IOC와 OCA가 갈등을 형성하고, IOC가 참가 불허 방침을 굳히면서 이는 없던 일이 되었다.

이러한 해프닝 속에서 시작된 2023 항저우 아시안게임은 1990년부터 크게 변하지 않고 지속되어 온 아시안게임의 참가국 리스트가 재구성될 시기가 다가오고 있음을 알리게 되었다.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아시안게임 초청 리스트에의 포함은 “어디가 아시아인가?”, “누가 아시아인인가?”라는 질문에만 기초한 것이 아니었다. “어떤 아시아를 지향하는가?”라는 질문이야말로 아시안게임 초청 리스트를 만드는 데 있어 중요한 변수로 작용하여 왔다. 그렇다면, 향후 연출될 아시안게임은 개최 국가가, 그리고 아시아가 어떤 아시아를 지향하는지를 드러내는 무대가 될 것이고, 초청 리스트는 그 각본이 될 것이다.

* 이 글의 내용은 아시아연구소나 서울대의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3권 49호 (2023년 10월 16일)

Tag: 아시아,아시안게임,자유아시아,비동맹아시아,제3세계

이 글과 관련된 최신 자료

  • 박해남 (2023). “2022 카타르 FIFA 월드컵의 정치학.” 『아시아브리프』 3(15), 아시아연구소. https://asiabrief.snu.ac.kr/
  • Huebner, Stefan (2016). Pan-Asian sports and the emergence of modern Asia, 1913-1974. National Univerersity of Singagore Press.
  • Krieger, Jörg (2020). “The foundation and early years of the Olympic Council of Asia: A controversial body making controversial politics.” The Routledge handbook of sport in Asia. Routledge, 107-117.
  • (2023). “Better, Bigger, Bitter: The Rise of the Asian Games in a Toxic Political Environment.” Sports Mega-Events in Asia. Springer. 123-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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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소개

박해남(parkhn@kmu.ac.kr)

현) 계명대학교 사회학과 조교수
전) 서울대학교 아시아연구소 HK연구교수

 

주요 논문 및 저서

“동북아시아 메가이벤트와 지역 (불)균형 발전: ’70 일본만국박람회와 ’93 대전세계박람회를 중심으로” 『지역사회연구』 30(1), 2022.
“Nationalism and the Representation of National Sport Heroes in 1990s South Korea”(ed.) Journal of Asian Sociology 50(3), 2021.
“서울올림픽과 도시개조의 유산: 인정경관과 낙인경관의 탄생” 『문화와사회』 27(2), 2019.
『서울사람을 웃고 울린 스포츠』 (서울역사편찬원, 20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