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아시아연구소 신임소장 특별 기고
인간주의 얼굴을 가진 지역학의 딜레마와 실천

채수홍 (서울대학교)

정치경제적 조건이 다른 지역과 사회에 대한 관심을 확대하고 지역학을 발전시킨다는 실용주의적 관점이 지역연구의 목표와 방향성을 규정할 수밖에 없는 것일까? 이러한 질문에 답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권력에 얽매여 있지만 동시에 권력의 억압, 통제, 불평등에 대응하는 역설적 위치를 고민해야 하는 지역학의 숙명을 자각할 필요가 있다. 지역민의 삶을 문화적 정체성과 정치경제적 여건을 연계하여 이해할 때 그리고 지역민이 말하는 바와 실제 현실에서 벌어지는 현상의 차이를 구분할 때 우리는 이러한 딜레마를 극복하고 ‘인간주의의 얼굴을 가진 지역학’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그림> 인간주의 얼굴을 가진 지역학
출처: UNESCO https://bangkok.unesco.org/

구성물로서 지역과 인간의 능동적 실천

아시아는 존재하는가? 동남아시아 지역을 연구하는 인류학자로서 이따금 스스로 반문해보는 질문이다. 연구대상으로서 아시아가 역사적 실재인지 사회문화적 구성물일 뿐인지는 지역학의 범주만이 아니라 목적과도 연계되어 있는 근본적인 의문이기 때문이다. 에드워드 사이드의 『오리엔탈리즘』(Said, 1978)에 관한 연구는 이런 점을 적나라하게 드러낸 바 있다. 그는 오늘날 아시아와 유사한 범주로 널리 쓰이고 있는 ‘동양’은 유럽이 스스로의 정체성을 만드는 과정에서 구성한 타자화의 산물일 뿐이라는 사실을 규명한 바 있다. 마찬가지로 에머슨(Emmerson, 1984)도 동남아시아라는 지역명이 서구인의 시각에서 아시아의 두 거점인 인도의 동쪽, 중국의 남쪽이라는 어원을 가지고 있고, 2차 대전을 수행하기 위한 군사전략의 일환으로 탄생하였다는 점을 밝혀낸 바 있다.

이러한 구성주의(constructivism) 관점은 지역학의 역할을 정의하는 데 장점을 가지고 있다. 우선 인간이 세계를 구분하는 범주가 언어와 문화의 영향 속에서 만들어지는 것이라는 명백한 사실을 상기하게 함으로써 동양, 아시아, 동남아시아처럼 자연스러운 것으로 간주되는 실체를 탈(脫)신비화한다. 그 결과 오늘날 통용되는 지역 범주와 이에 기초한 지역학이 (특히 근대 서구) 권력의 필요와 전략의 산물일 뿐 필연성과 영속성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점을 직시하게 한다. 이와 같은 기존 담론의 해체는 권력의 불평등을 비판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토대를 제공한다. 그럼으로써 지역학이 권력에 의한 인간의 억압을 어떻게 완화할 수 있을지 고민할 필요가 있다는 숙제를 남긴다.

구성주의는 이러한 장점에도 불구하고 중요한 두 가지 한계를 가지고 있다. 하나는 지역의 범주화와 지역학의 형성을 관념의 산물로 간주하는 과정에서 물질세계, 인간의 실천, 관념의 상호작용을 단순화할 위험이 있다. 예를 들어, 지역으로서 아시아에 대한 인식은 언어와 문화의 산물이기도 하지만, 수천 년에 걸친 인간의 자연에 대한 적응과 이를 위한 다양한 인간 공동체의 협력과 갈등의 결과물이기도 하다. 부단한 물질적, 사회적, 정치적 과정 속에서 지역에 대한 구분과 지역학의 필요성이 역사적으로 대두되었다는 점을 간과할 위험이 있다. 그 결과 인간이 세계를 범주화하고 타자의 세계를 이해하는 적실한 개념을 구성하고자 했던 동기와 근거를 망각할 수 있다. 지역학은 권력의 간지(奸智)와 언어적 구성만이 아니라 사회적 동물로서 인간이 타자를 필요로 하고 이해할 필요성에 의해 탄생했고 존립의 근거를 유지하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구성주의적 관점의 지역학이 지니고 있는 또 하나의 문제는 권력과 언어·문화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과정에서 부지불식간에 인간 실천의 영향을 상대적으로 경시하게 된다는 점이다. 에드워드 사이드가 주장한 것처럼 오리엔트 혹은 동양이라는 관념은 서구 오리엔탈리즘의 생산물일 수 있다. 하지만 많은 지역학 연구가 시사하고 있듯이, 서구에 의해 동양이라는 범주의 지역에 거주하는 타자가 되어버린 동양인은 구성된 관념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데 그치지 않았다. 오히려 동양인이라는 상징적 자산을 능동적으로 활용하여 불평등한 세계에 대응했던 것이다. 예를 들어, 동남아시아라는 지역의 탄생은 미국과 유럽의 군사전략적 필요성에 의해 급진전 되었지만, 동남아시아인은 이러한 지역 범주를 비판적으로 해체하는데 몰두하기보다는 자신의 이해관계와 정체성을 강화하기 위하여 실천적으로 활용하고 있다. 정치문화 공동체로서 아세안의 활동과 최근 한·중·일을 포함한 소위 동아시아 공동체 형성의 움직임은 이러한 능동적 실천의 한 사례일 뿐이다.

지역학에서 정치경제적 이해의 선차성

인간의 세계에 대한 인식과 실천을 탐구하는 분과학문들의 협업 결정체인 지역연구는 크게 두 갈래로 나뉘어 진행되어 왔다. 하나는 정치경제적 이해관계(political-economic interests), 다른 하나는 사회문화적 정체성(social-cultual identity)의 탐색이다. 이러한 두 갈래의 초점을 시간과 공간의 축을 고려하며 연구해 온 것이 지역학이다. 이 가운데 어느 갈래가 학술적으로 중요한가를 가늠하는 것은 분과학문의 편협한 영역 싸움에 불과한 어리석은 시도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자 가운데 어느 것이 선차적(primary) 혹은 근본적(fundamental)인가는 유물론과 관념론이 인간의 삶을 이해하기 위해 오랫동안 벌여온 중요한 논쟁거리임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지역학의 발전과정과 지향점의 성찰도 이러한 철학적 논점과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다.

한국 학계에서 아시아 지역연구에 대한 관심이 어떻게 형성되고 발전해왔는지를 살펴보면 이러한 논쟁에 실마리를 얻을 수 있다. 좁게는 한국 학계, 넓게는 한국 사회가 아시아의 다른 사회에 본격적으로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은 한국의 “성공적” 경제성장이 가시화되면서 부터이다. 동북아시아에 머물던 한국 지역학이 아시아의 다른 지역에 눈을 돌리게 된 것은 전지구화로 인한 시장의 확대와 세계가치사슬(global value chain)의 형성으로 한국의 자본과 노동이 국내에만 매여서는 생존할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세계자본주의의 이러한 정치경제적 변화는 다른 지역의 시장, 안보, 사회문화적 특성에 대한 이해를 필요로 했고, 한국의 아시아 지역학도 이러한 국가와 산업의 요구에 부응하며 발전해갔다.

필자가 20년 넘게 연구해온 베트남에 대한 한국학계의 관심이 비약적으로 증가한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1990년대 말만 하여도 한국 사회과학의 지역연구는 일본과 중국에 집중되어 있었고, 동남아시아는 인류학이나 비교정치학과 같은 ‘특수한’ 학문분과의 관심 영역일 뿐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의 베트남 지역연구에 대한 수요는 캄보디아나 라오스와 별반 다를 바가 없었다. 하지만 베트남의 개혁개방정책(Doi Moi)으로 시작된 공격적인 산업화와 임금상승으로 인한 한국 노동집약적 산업의 해외진출이 맞물리면서 2000년대 이후 베트남에 대한 산업적, 학문적, 사회적 관심이 급증한 바 있다.

이러한 사례가 입증하듯이, 지역학의 발전은 정치경제적 이해관계와 밀접하게 조응해온 것이 사실이다. 한국에서 동북아시아와 동남아시아가 다른 아시아 지역에 비해 빠르게 지역학의 관심을 얻고 기반을 다지게 된 것도 사회문화적 친연성보다 지리적 근접성과 정치경제적 조건이 지역학의 발전을 추동하고 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학문적 견지에서 바람직한가라는 질문과는 별개로, 지역학은 제국주의적 관심, 자본주의적 이해관계, 산업적·사회적 수요에 의해 흥망성쇠를 겪어온 것이 역사적 현실이다.

이 지점에서 지역 연구자에게 몇 가지 의구심이 생길 수밖에 없다. 정치경제적 조건이 다른 지역과 사회에 대한 관심을 확대하고 지역학 발전의 토대가 된다는 실용주의적 전제가 지역연구의 목표와 방향성을 규정할 수밖에 없는 것일까? 다른 지역과 사회의 사회문화적 정체성에 대한 관심은 궁극적으로 정치경제적 이해관계에 종속된 부차적인 것에 불과한 것인가? 지역연구에서 정치경제적 조건과 사회문화적 정체성은 어느 지점에서 상응하고 어느 지점에서 모순과 딜레마를 만들어내는 것일까? 지역학이 타자인 인간의 삶에 대한 이해의 지평을 확대하는 것의 일환이라는 근대학문의 인간주의적(humanistic) 지향점을 폐기하지 않으려면 이러한 질문에 답하기 위한 숙고와 성찰이 긴요할 것이다.

지역학의 딜레마와 인간주의의 지향

지역학의 발전에서 정치경제적 이해관계가 선차적이고 근본적이라는 사실과 지역학이 발전하기 위해서는 정치경제적 이해관계에 부응해야 한다는 주장은 일견 일맥상통한 것처럼 다가온다. 하지만 양자 사이에는 논리적 간극이 존재한다. 정치경제적 이해에 기초하여 지역학이 발전하고 있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지만, 연구자와 연구대상자가 속한 지역민의 정치경제적 이해관계는 단일한 것일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지역학은 항상 누구를 위한 정치경제적 이해관계인가라는 질문을 안고 살아야 하는 숙명을 지니고 있다.

지역학이 연구대상으로 삼고 있는 사회와 지역민은 국가, 종족, 계급, 젠더에 따라 다양하고 이들의 정치경제적 이해관계와 사회문화적 정체성은 협력과 통합만이 아니라 갈등과 적대감의 원천이 되기도 한다. 따라서 지역연구자는 자신과 연구대상자의 세계관과 당파성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 지역학의 발전을 이끄는 가장 큰 힘인 국가와 자본의 이해관계를 다양한 지역민의 이해관계와 동일한 것으로 간주하는 오류에 빠지지 않도록 주의할 필요가 있다. 이처럼 지역연구의 첫 번째 딜레마는 지역학의 발전을 위해서는 국가주의와 자본의 힘이 필요하지만 동시에 이에 종속되지 않는 지향점을 고수할 필요가 있다는 사실에 기인한다. 권력에 얽매여 있지만, 권력의 억압, 통제, 불평등에 대응하는 모순적 위치를 자각하고 고민하는 지역학이 불가피한 것이다.

지역학의 또 다른 딜레마는 삶에서 문화의 중요성을 다루는 방식과 연계되어 있다. 사회적 인간의 삶에서 상징, 이념, 규범과 같은 관념을 의미하는 문화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다. 하지만 인간의 삶을 문화를 중심으로 이해하려는 시도의 한계도 분명하다. 인간의 문화는 정치경제적 여건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지역연구에서 지역민의 삶을 문화와 정체성을 중심으로 이해하려면 이들의 정치경제적 여건을 고려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필자가 연구해온 베트남 노동자의 이념, 규범, 세계관 등의 문화는 이들이 향유하는 주거, 임금, 노동조건은 물론이고 국가정책이나 글로벌 자본과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다. 문화를 이해하려는 지적 실천은 동시에 이러한 문화를 형성시키는 물질적 토대를 해명하는 작업이기도 한 것이다.

이런 점을 자각하지 않는 지역학은 관념적 비판의 유희에 빠질 위험이 있다. 가령 지역학에서 개발(development) 문제를 다룰 때, 국가-자본과 소수자로서 지역민을 대비하며 개발의 착취적 성격을 비판하기는 쉽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실제 이들에게 생계경제(subsistent economy) 수준의 가난을 극복하고 경제적 삶을 향상시키는 일이 얼마나 절실한 것인지를 잊기 쉽다. 이들에게 개발은 어리석은 욕망이 아닌 삶의 복지를 개선하는 절실한 과업일 수 있다. 과거의 삶을 문화적으로 낭만화하며 개발을 비판하는 과정에서 지역민의 삶의 정치경제적 여건을 향상시키고자 하는 열망을 외면하는 우를 범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점을 고려할 때, 지역민의 삶을 관념만이 아니라 물질적 토대와 여건과 연계시켜 이해하려고 시도할 때 그리고 지역민이 말하는 바와 실제 현실에서 벌어지는 현상의 차이를 구분할 때 비로소 제대로 된 인간주의의 얼굴을 가진 지역학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지역학이 문화를 다루는 과정에서 경험하는 보다 근본적인 딜레마는 문화상대주의(cultural relativism)의 문제에서 비롯된다. 지역학자는 연구대상 지역민의 문화를 자신의 문화를 기준으로 판단하는 ‘자민족중심주의(ethnocentrism)’에 빠지지 않도록 훈육된다. 하지만 연구지역의 주민이 내면화한 문화적 기준이 권력집단만을 위한 것이거나 인간의 보편적 윤리에 반하는 것이라면 어떻게 해야 할까? 연구대상 지역민이 성, 인종, 종족, 계급을 차별하고 폭력을 정당화하는 문화를 실행하고 있다면 지역연구자는 문화상대주의에서 벗어나 계몽을 해도 되는 것일까? 하지만 지역연구에서 문화상대주의 문제는 생각만큼 간단하지 않다. 계몽이 자신의 삶을 이상으로 간주하는 자민족중심주의 편견의 강요일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딜레마는 지역학 연구자로 하여금 인간주의의 얼굴을 가진 지역학의 추구가 지난한 작업임을 깨닫게 한다.

인문학과 사회과학에서는 인간주의에 대한 반동으로 근대적, 이성적 인간중심주의를 극복하려는 흐름이 항상 존재했다. 특히 최근에는 인간의 탐욕으로 피폐해지고 있는 지구 환경에 대한 관심이 커지면서 학계와 시민사회에서는 인간중심주의에서 벗어나려는 소위 ‘존재론적 전환(ontological turn)’이 시도되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전환이 철학적으로나 실천적으로 인간주의의 토대를 근본적으로 허물고 있는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인간과 자연의 조화의 추구도 궁극적으로 인간주의적 발상의 일환이기 때문이다. 지역학 역시 궁극적으로는 인간이 지향하는 삶에 근접하려는 모색과 지적 실천이라는 근대학문의 출발점에서 벗어나긴 힘들 것 같다. 문제는 인간주의 지역학이 자신의 존재론적, 인식론적, 방법론적 모순과 딜레마를 어떻게 성찰하며 얼마나 전진할 수 있을지 여부일 것이다.

* 이 글의 내용은 아시아연구소나 서울대의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3권 48호 (2023년 10월 10일)

Tag: 아시아,동남아시아,인간주의,지역학,오리엔탈리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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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범식 (2021). “부상하는 메가아시아: 역사와 개념.” 『아시아리뷰』 11(2). 3-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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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소개

채수홍(chae4811@snu.ac.kr)

현) 서울대학교 인류학과 교수, 아시아연구소 소장, HK+메가아시아연구사업단 단장

 

주요 저서와 논문

『베트남: 한인의 베트남 정착과 초국적 삶의 정치』 (눌민, 2021).
『인류학자들, 동남아를 말하다』 (눌민, 2020).
“The Political Processes of the Distinctive Multinational Factory Regime and Recent Strikes in Vietnam.” Global Economic Review 47(1), 2018.
“베트남 2017: 경제, 정치, 대외관계의 현황과 전망.” 『동남아시아연구』 28(1), 2018.​
“하노이 한인사회의 형성, 분화, 그리고 미래.” 『한국문화인류학』 50(3), 20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