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로에 선 한국 외교

강태화 (중앙일보)

미국과 중국의 패권경쟁은 기존에 통용되던 외교 문법을 바꿔놨다. 패권경쟁이 본격화된 지난 5년 남짓의 짧은 기간 안보의 정의는 군사에서 공급망과 무역, 기술을 포괄하는 새로운 개념으로 변모했다. 그 결과 내년 4월과 11월 한국과 미국에서 각각 치러지는 총선과 대선에서도 외교의 성과는 표심을 결정할 주요 변수로 떠오를 가능성이 커졌다. 복합적 요인이 결합된 외교 분야가 선거에 영향을 미칠 경우 선거 결과가 초래할 불확실성은 그 어느 때보다 확대될 가능성이 있다. 특히 트럼프의 재등장 가능성까지 제기되며 동맹 외교에 ‘올인’한 한국 외교는 기로에 섰다.

<그림 1> 두 정상의 만남. 윤석열 대통령과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
출처: 중앙일보

정치 여론 형성의 주요 변수 된 외교 능력

2022년 5월 윤석열 대통령은 취임사 첫 문장에서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 ‘국제사회에서의 책임과 역할’이라는 두 가지 화두를 제시했다. 각각 국정철학과 방법론에 해당하는 말로, 둘을 결합하면 ‘자유의 가치를 실현할 외교’를 최우선 국정과제로 추진하겠다는 의미가 된다. 이는 바이든 미국 행정부가 내세운 ‘가치 외교’의 개념과 정확히 일치한다.

윤 대통령은 ‘올인 외교’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한미 동맹 강화에 방점을 뒀다. 정부가 국정 역량을 외교에 집중하고 있다는 사실은 객관적 지표로도 확인된다.

최근 4차례 한국갤럽의 여론조사에서 윤 대통령의 국정수행을 긍정 또는 부정적으로 평가한 집단 모두 판단의 가장 큰 이유로 ‘외교’를 든 것으로 나타났다. 7월 2주차 조사에서 ‘윤 대통령이 외교를 잘해서 지지한다’는 응답은 32%, ‘외교를 못해서 지지하지 않는다’는 응답은 14%로 각각 가장 높은 비율을 차지했다. 긍정ㆍ부정 층 모두 외교 능력을 기준으로 정부를 평가한다는 의미다.

외교 능력이 정부를 평가하는 절대적 변수로 부상한 시기는 올해 4~5월 한미ㆍ한일 정상회담 시기와 겹친다. 당시 ‘외교를 잘해서 지지한다’는 비율은 40%에 육박했다. 그러다 최근 후쿠시마 오염수 방류에 대한 IAEA의 최종 조사 결과 발표 등이 이어지며 해당 응답 비율은 한 달 만에 32%에서 22%(8월 1주차)까지 떨어졌다.

외교성과에 따라 지지 여부가 결정되는 여론의 추이는 내년 4월 총선을 앞둔 정부가 국정의 방향을 어떻게 가져갈지 결정하는 과정에서 주요 참고 사항이 될 뿐 아니라, 향후 전개될 외교 양상을 예측할 지표가 될 가능성이 있다.

한미 동맹 강화에 방점을 둔 윤석열 정부의 외교노선은 기존 지지층을 결집하는 데 핵심적 역할을 했다. 지지층 견인을 위해 동맹 강화 기조가 보다 강조될 거란 의미다. 동시에 선거 승리를 위해선 윤 대통령을 지지하지 않는 계층의 표심을 돌리기 위한 가시적 외교성과가 반드시 필요하다. 미국을 향해 무언가를 요구해야 할 시점이 다가오고 있다는 뜻이다.

미국도 마찬가지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 역시 내년 11월 대선을 앞두고 있다. 재선을 위한 확실한 지지를 확보하지 못한 상황에서, 전임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과의 재대결 가능성이 제기된다. 특히 노골적인 자국 우선주의를 앞세운 외교 정책을 폈던 트럼프 행정부와 완전히 다른 방식의 동맹 외교를 택했던 바이든 대통령의 입장에서는 선거 전까지 외교정책의 실질적 성과를 내야만 하는 보다 절박한 과제를 안고 있다.

이 때문에 향후 외교전은 동맹의 중요성에 공감하며 ‘큰 그림’을 그려온 지금까지와 달리, 국익이라는 외교의 본질적 원칙에 따라 자국의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한 가시적 성과물을 도출하기 위해 경쟁하는 방식으로 전개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전통적·군사적 안보 정의의 변화

정치 분야에서까지 외교의 중요성이 증대된 이유는 외교의 근간인 안보의 정의가 무역과 기술, 경제 전반을 의미하는 신(新)안보의 개념으로 변화했기 때문이다.

빅데이터 업체 ‘아르스프락시아’가 한국ㆍ미국ㆍ일본ㆍ중국 등 4개국 824개 언론사의 기사 550만 건을 분석한 결과 2017년만 해도 무역ㆍ기술ㆍ공급망 이슈가 안보의 측면에서 기술된 비율을 뜻하는 ‘상관관계’가 각각 19%ㆍ37%ㆍ20%에 그쳤다. 통상 20% 이하의 상관관계는 연관성이 떨어지는 것으로 본다. 그러다 지난해엔 상관관계가 37%ㆍ41%ㆍ52%가 됐다<그림 2 참고>. 군사적 의미에 국한됐던 안보의 개념 안에 공급망을 확보하고 반도체 공급선을 확보하는 등의 경쟁의 개념 등이 포함돼 다뤄지고 있음을 의미한다.

<그림 2> ‘안보’와 ‘무역’, ‘기술’, ‘망’의 상관관계
출처: 서울대 아시아연구소, 중앙일보

이러한 구도 속에서 바이든 행정부는 자신이 원하는 외교 결과물에 대해 일관된 원칙과 목표를 밝혀왔다. 공식적 원칙은 자유민주주의 이념을 공유하는 국가와의 동맹 강화를 내세운 ‘가치 연대’의 강화다. 그런데 사실 가치 연대의 실제 목표는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 첨단 기술과 관련 공급망을 미국 중심으로 재편하는 데 있다.

실제 바이든 행정부는 처음부터 중국에 대해 전면전에 가까운 압박을 펴왔다. 그러다 지난 5월 G7 정상회의 공동성명에 “중국과의 디커플링(decouplingㆍ탈동조화)이 아닌, 디리스킹(de-riskingㆍ위험 제거)이 필요하다는 점을 인식한다”는 내용을 담아 중국과의 관계 개선을 모색하는듯한 모습을 보이기도 했지만, 본질은 달라지지 않았다.

특히 선거 상황이 개선될 기미가 보이지 않자, 바이든 행정부는 8월 9일 미국 자산이 중국의 첨단 기술 3개 분야에 투자하는 것을 규제하는 행정명령을 내리며 재차 압박 수위를 높였다. 이에 대해 중국이 즉각 미국이 WTO 규칙을 위반한 사항을 정리한 보고서로 맞대응하자, 바이든 대통령은 정치자금 모금 행사 도중 중국 정부를 악당(bad folks)으로 지칭하며 “중국 경제는 똑딱거리는 시한폭탄(time bomb)”이라는 말을 쏟아냈다.

북한 다뤄야 하는데미국은 무관심

미국 대선이 바이든 대통령에게 불리하게 전개될수록 한국 등 동맹국들은 전방위적으로 ‘미국편’에 설 것을 더욱 강하게 요구받게 될 가능성이 크다.

실제 바이든 대통령은 한국을 향해 분명한 메시지를 발신해왔다. 단적인 예가 그의 첫 방한 동선이다. 바이든 대통령은 2022년 5월 한국에 도착 후 첫 일정으로 평택 삼성전자 반도체 공장을 방문하겠다고 요청했다. 윤 대통령과의 첫 만남도 그곳에서 이뤄졌다. 바이든 대통령은 윤 대통령과 삼성전자 공장을 둘러본 후에야 양국 관계를 ‘포괄적 전략동맹’으로 격상하고, 협력 분야를 군사 안보는 물론 경제, 보건, 기후 등 전 영역으로 넓혀 공동 대응하는 데 합의했다. 반도체 등의 분야에서의 중국의 독주를 견제할 수 있는 동맹국 유력 기업의 지원을 확실하게 확보하겠다는 의도로 풀이된다.

미국이 중국에 맞선 공급망 경쟁에 한국도 참여할 것을 요구하는 배경은 미국 내 여론과도 관련이 있다. 빅데이터 분석 결과 한ㆍ미ㆍ일ㆍ중 4개국 언론 보도는 공통적으로 상대국에 대한 기사를 작성할 때 공급망 경쟁의 우군 또는 적군의 시각에서 기술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대선을 앞두고 여론의 지지가 필요한 바이든 대통령에게는 다소 소극적이던 한국이 완전히 미국의 편에서 경쟁에 ‘참전’하는 상황이 매우 절실하다는 뜻이다<그림 3 참고>.

<그림 3> 한·미·일·중 공동관심사 출처: 서울대 아시아연구소, 중앙일보

특히 빅데이터 분석 결과 한미는 ‘망’ 이외에 독자적으로 공유하는 상호 연계 키워드가 없는 것으로 나타났다. 연관성은 양측이 같은 주제로 기사를 작성할 때 나타난다. 한국이 북핵 문제 해결 등 전통적 안보 이슈를 미국에 끊임없이 요청하는 기사를 쏟아내더라도, 미국 언론은 북핵 문제 해결의 관점에서 기사를 다루지 않는다는 의미다. 자국 언론들이 한국과 북핵 관련 논의를 하는 소식을 기사화하지 않는다면 정치인인 바이든 대통령의 입장에선 관련 논의를 해야 할 필요성 자체가 낮아질 수밖에 없다.

반면 일본의 경우 공급망 이슈 외에 기후변화, 북한의 무력 도발, 군사 정보 교류 등 3가지 핵심 이슈를 미국과 별도로 공유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북한의 미사일 발사와 군사 정보가 양국의 상호 연계 키워드로 나타난 것은 북핵 문제의 당사자인 한국보다 일본의 대미 북핵 공조가 더 끈끈하다는 의미로도 해석할 수 있다<그림 4 참고>.

<그림 4> 한·미·일 공동관심사
출처: 서울대 아시아연구소, 중앙일보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 정부는 미국을 향해 끊임없이 대북 문제 해결을 요청할 수밖에 없다. 이는 향후 이어질 가능성이 큰 ‘국익 극대화’를 위한 외교전에서 상당한 부담으로 작용할 수도 있다.

북핵 억지력 얻어냈지만구체화되는 청구서

이러한 고민은 2023년 4월 윤 대통령의 국빈 방미 때도 노출됐다. 미국에서 양국 정상이 처음 만난 곳은 워싱턴에 있는 ‘한국전 참전용사 기념비’(Korean War Veterans Memorial)였다. 정상회담이 대북 억제력 강화 등 전통적 안보 이슈에 맞춰져 있음을 뜻한다. 평택 삼성전자 공장으로 직행했던 바이든 대통령의 1년 전 동선과는 완전히 다르다.

대통령실은 회담 직후 성과 4가지를 발표했는데, 1ㆍ2번 항목에 군사안보 강화와 북한 문제 협력 방안을 담았다. 3ㆍ4번엔 ‘한ㆍ미 NSC 경제안보대화’ 채널을 신설, 민주주의에 입각한 국제질서, 자유롭고 개방된 인ㆍ태지역 협력, 인도ㆍ태평양 경제프레임워크(IPEF) 협력 등 미국이 요구하는 구체적 내용이 포함됐다. 백악관 발표 자료에는 아예 가치 규범 기반의 국제질서, 첨단기술 협력 등이 전면에 배치됐고, 북한 문제는 맨 뒤로 밀려있었다.

대신 미국은 정상회담 공동성명이 아닌 별도 문건 형식으로 당시 방미의 최대 성과로 꼽히는 ‘워싱턴 선언’을 발표했고, 그에 따라 한미핵협의그룹(NCG)을 신설하는 데 합의했다. 분명한 성과임에도 이는 한국의 끈질긴 요청에 따라 이뤄진 합의란 사실을 부인하기 어렵다.

당연한 말이지만 외교에 ‘공짜’는 있을 수 없다. 무언가를 얻었다면 다른 것을 양보해야 한다는 뜻이다. 실제 워싱턴 선언엔 한국의 핵확산금지조약(NPT) 상의 의무를 재확인한다는 내용이 포함됐다. 자체 핵개발을 포기한다는 확약에 가깝다. 그리고 미국의 추가 ‘청구서’가 조금씩 구체화되는 기류도 포착된다. 특히 앞으로 받게 될 청구서는 한국 정부 입장에서 상당한 난제이자 정치ㆍ외교ㆍ군사적 부담 요인이 될 가능성이 적지 않다. 특히 미국의 대선 상황에 따라 한국이 안게 될 과제는 시급성을 요하는 현안이 될 수도 있다.

윤 대통령이 2년 연속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정상회의에 참석한 것도 일종의 청구서를 결재하는 과정일 수 있다. 미국은 그동안 한국 경제에서 중국이 차지하는 비중과 북핵 문제 해결을 위한 중국의 역할 등을 감안해 우크라이나 전쟁 지원을 비롯해 중국이 반발하는 사안에 대한 한국의 일부 소극적 입장을 용인해 온 것으로 평가된다. 그런데 나토는 중국과 러시아를 적대 국가로 규정한 미국 중심의 군사동맹이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배경 역시 우크라이나의 나토 가입 시도가 주요 원인으로 꼽힌다. 윤 대통령은 외교적 부담 속에서도 “나토와 상호 군사 정보공유를 확대해 나갈 것”이라고 밝혔고, 우크라이나를 깜짝 방문해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대통령에게 “생즉사(生則死) 사즉생(死則生) 정신으로 연대하겠다”고 했다. 특히 윤 대통령의 우크라이나 방문은 G7 국가 정상들에 이은 연쇄방문과 유사한 성격으로 이뤄졌다. 한국에 대해 G7에 준하는 역할이 부여됐을 가능성이 있다는 의미다.

대만 유사 상황, 트럼프 당선 등 불확실성 확대

여기에 만에 하나 대만에서 유사 상황이 발생해 주한미군의 직접 지원이나 한국의 적극적 역할론이 부각되면서 중국과 직접 대치해야 하는 상황에 몰릴 경우 70년 동맹국인 한국의 외교적 입지가 코너까지 몰리게 될 수도 있다. 이와 관련 일본 측 외교소식통에 따르면 일본은 이미 한국의 난감한 상황을 간파하고 안보의 최고 우선순위를 기존의 한반도 문제에서 미국이 가장 관심을 두고 있는 양안 문제로 이동시켰다고 한다. 한미일 공조의 주도권을 일본이 확실하게 쥐고 가겠다는 의도다.

무엇보다 내년 미국 대선에서 만약 트럼프가 당선될 경우 사실상 바이든에 올인해 동맹을 강화해온 정부의 외교적 성과가 한순간에 무너져버릴 수도 있다. 특히 트럼프 전 대통령이 복귀할 경우 그는 바이든 대통령과 차별화를 과시하기 위해서라도 ‘강력한 미국’을 다시 전면에 내세울 가능성이 크다. 만약 한반도 전략이 미국 경제 등에 대한 부담이라고 판단할 경우 언제라도 주한미군의 역할까지 변화시킬 수 있을 거란 우려도 나온다.

정부는 미국의 선거와 관련해선 입장 표명을 극도로 자제하고 있다. 다만 미국 정계 사정을 잘 아는 김동석 미주한인유권자연대(KAGC) 대표는 최근 언론 인터뷰에서 “미국의 유력 인사에게 ‘윤 대통령이 방미 때 뭘 요구했는지’ 물었더니, ‘낫띵(nothing)’이라며 오히려 매우 의아해 하더라”며 “어쩌면 현재 상황은 향후 한국의 발언권을 확대하고 요구할 영역을 축적해가는 전략적 과정일 수도 있다”고 해석하기도 했다.

그러나 한국리서치의 여론조사에서 “외교분야의 주안점”을 묻는 질문에 대한 답변은 ‘탈진영 중립외교’(15%)와 ‘전통적 우방외교를 강화’(14.7%)로 팽팽하게 갈렸다. 증대된 외교적 불확실성에 대한 불안감은 이미 여론에도 반영돼 있다는 뜻이다.

* 이 글의 내용은 아시아연구소나 서울대의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3권 42호 (2023년 8월 21일)

Tag: 미중경쟁,한미동맹,윤석열,바이든,트럼프

저자소개

강태화(thkang@joongang.co.kr)

현)중앙일보 외교안보부 차장.
전)중앙일보 국회ㆍ청와대 취재팀장. 조지타운대학교 방문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