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특집: 아시아 문명 교류의 역사와 미래(2)
해양 실크로드의 현재적 의미
대륙은 한국인들에게 동경의 대상이고 강대하였던 과거 역사를 떠올리게 하는 것에 반해, 바다는 해적, 조난, 표류, 귀양, 해금 등의 이미지로 다가온다. 그러나 한국은 오래전부터 바다를 무대로 하는 다양한 활동을 펼쳐왔다. 따라서, 고대 해양 실크로드에 대한 이해는 앞으로 대한민국의 해양정책, 동남아시아 및 남아시아세계와 우호적 관계를 맺는 데에 영감을 줄 수 있다. 장보고가 구축한 해역세계에서 보았듯이 21세기 새로운 해역세계 구현은 인적 네트워크와 상대방에 대한 이해를 기초로 삼아야 할 것이다.
조선이 은자의 나라인가?
윌리엄 그리피스(1843-1928)가 조선을 “조용한 은자의 나라”라고 표현한 것을 두고 호머 헐버트(1863-1949)가 맹비난하였다는 기사를 읽은 적이 있다. 어릴 적부터 여러 번 들었던 “조용한 은자의 나라”, “고요한 아침의 나라”니 하는 소리가 한편으로는 좀 불편한 감이 있었는데 나만 그런 것이 아니었나 보다.
어린 시절에 즐겨 읽었던 “로빈슨 크루소의 모험”이나 “신드바드의 모험”에는 바다를 무대로 펼쳐지는 모험이 끝없이 전개되고 있었다. 신드바드 이야기는 아라비안나이트(천일야화)의 일부로서 9-10세기에 인도양 해역을 무대로 활동하던 아랍계와 이란계 상인들의 활약상을 담고 있다. 그들의 활동 범위는 동으로 중국 광동, 동남아시아, 인도, 서로는 동아프리카로 이어졌다. 어린 나이에 이런 글을 읽으면서 아랍이나 영국 사람들은 이렇게 바다를 무대로 활동하였는데, 우리 조상들은 쇄국정책을 펴서 동방의 조용한 나라에서 은자처럼 살다가 결국 일제의 식민지가 되었다고 나름 정리한 적도 있었다.
과연 그럴까? 한국의 역사는 반도의 역사라는 일제 반도성론에 대항하여 대륙의 역사라고 하는 반박이 우리 사회에 넓게 퍼져 있다. 대륙은 한국인들에게 동경의 대상이고 강대하였던 과거 역사를 떠올리게 한다. 반면 바다는 해적, 조난, 표류, 귀양, 해금 등의 이미지로 다가올 뿐이다. 과거 우리 역사에서 바다를 무대로 신나게 놀아본 이야기는 별로 들어본 적이 없다.
중국의 국가전략인 “일대일로(一帶一路)”에서 一路가 중국 동부 해안에서 바다를 통해 아프리카로 이어지는 항로를 의미한다는 사실, 대한민국의 외교전략인 “신북방 신남방 정책”에서 신남방 정책의 핵심이 아세안(ASEAN)과 인도를 대상으로 삼는다는 점을 고려하면1) 한국사 연구자들이 바다를 너무 홀대하였던 것은 아닌가 반성해 본다.
고대 해양 실크로드의 성립과 동서 교류
그리스 선원이 만든 “에리트라이 바다 항해기(The Periplus of the Erythraean Sea)”는 기원을 전후한 시점에 지중해 세계와 인도가 이미 연결되어 있었음을 보여준다. 중국 측의 『한서(漢書)』도 중국 남동부 해안에서 시작한 항해 여정이 인도와 스리랑카에 도달하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이미 이 시기에 유라시아의 동과 서는 바다를 통하여 연결되어 있었던 것이다.
중국-한반도-일본열도를 잇는 해상 교통로가 늦어도 기원전 3세기 무렵에는 이미 활발하게 작동되고 있었음을 각지에서 발견되는 고고학적 유물로 충분히 설명할 수 있다. 기원전 2세기 무렵에 중국 남부와 동부에서 거의 비슷한 과정을 겪으며 건국된 남월국과 위만조선, 그리고 양국을 멸망시키고 한(漢) 무제(武帝)가 세운 군현의 해상 활동을 통하여 동남아시아-중국-한반도-일본열도가 연결되어 있었다. 그렇다면 유럽-아라비아-인도-동남아시아-중국으로 연결되는 고대 해양 실크로드에 한반도와 일본열도도 늦어도 기원 전후한 시점에는 연결되었음을 의미한다.
고대에는 선박 제조술과 항해술의 한계로 인해 원양으로 나가기에는 위험 부담이 컸다. 해안가를 따라 배를 몰면서 길을 잃지 않아야 했으며, 풍랑이 일면 육지에 정박하여야 했다. 이런 까닭에 지중해 세계에서 중국 동해안에 이르는 해로를 따라 수많은 항구가 형성되었다. 아침 일찍 배를 띄우고, 해지기 전에 항구에 정박하는 방식으로 수많은 선박이 바다를 오고 갔다. 원거리 교역에서 발생하는 막대한 이익의 분배, 물품의 수합과 보관, 식수와 식량, 선원의 공급 등이 연쇄작용을 일으키면서 권력이 발생하여 항시국가(港市國家), 해상왕국이라 불리는 수많은 국가가 출현하였다. 말레이반도의 랑카수카, 메콩강 하구의 푸난, 베트남 중부의 참파 등이 당시의 대표적인 항시국가였다.
한반도에서는 백제와 금관가야, 일본열도에서는 큐슈 북부의 나노쿠니(奴國), 이도쿠니(伊都國) 등 수많은 항시와 항시국가가 등장하여 원거리 해양 교류에 참여하였다. 이 과정에서 유리구슬, 바다거북 등껍질, 물소뿔과 상아, 공작새, 원숭이, 각종 향신료 등 진귀한 물품이 원거리에 유통되었다.
그동안 한국사 연구에서는 대륙을 무대로 삼은 원거리 교류에는 어느 정도 주목하였으나 바다와 해역세계에 대해서는 무심하였다. 활발한 고고학적 발굴과정에서 출토된 유물 중에는 중국과 일본에서 생산된 외래품만이 아니라 인도나 동남아시아, 나아가 서아시아에서 생산한 외래품도 발견된다. 문헌에는 그 정체를 드러내지 않았으나 바다를 통한 원거리 교역은 이미 고대사회에서부터 시작되었다. 백제와 가야가 발전하는 원동력은 바다를 통한 해상교역이었을 것이다.
장보고가 건설한 동북아시아 해역세계
통일신라시대 해상교역을 상징하는 인물은 장보고이다. 동북아시아에서는 9세기 중반을 경계로 교역 형태에서 큰 변화가 일어난다. 조공과 회사의 형식을 띠고 정치적인 내용을 지닌 공무역에서 거대 상인들이 바다를 무대로 영리를 위해 뛰어드는 해상(海商)의 시대로 전환되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극적인 성공, 출세와 비극적인 최후를 맞은 인물이 바로 장보고이다.
장보고에 대한 역사학계의 평가는 한마디로 해양영웅(Maritime Hero)이다. 인도의 고대 설화 속 주인공들이 대개 바다로 진출한 상인인데 비하여 우리의 영웅들은 바다와 관련된 모습을 띤 경우가 드물다는 점을 고려하면 장보고는 동아시아 해역사 연구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그러나 해상왕 장보고에 대해서는 경영학, 해운, 수산업계에서 보여주는 뜨거운 관심과 달리 의외로 역사학계와 고고학계의 관심은 저조한 편이다.
장보고의 행적은 분명치 않은데 전남 완도 근처에서 태어나서 810년 무렵 같은 고향 출신인 정년(鄭年)과 함께 당에 건너가 서주절도사 휘하의 무령군에 입대하고 30살쯤에 무령군소장이라는 벼슬을 얻어 활동하다가 820년대 초에 실시된 감군정책의 여파로 군직을 버리고 828년에 귀국하였다.
신라의 흥덕왕에게 건의하여 완도에 청해진을 건설하고 해상 무역활동을 시작하였다. 당에 머무는 동안 그는 중국 해안가에 광범위하게 분포하면서 선박제조, 소금 생산 등 다양한 활동을 하면서 유통망을 장악하던 신라 출신 인물들과 돈독한 관계를 맺은 것 같다. 그가 본국으로 돌아간 후 짧은 기간 동안 거대한 세력을 이루고 당과 신라, 일본을 연결하는 무역망을 건설할 수 있었던 힘은 재당신라인들의 지원, 그리고 그동안 축적해놓은 인적 네트워크 덕분이다. 그 기반은 선원, 군사집단, 상인들이었다.
그런데 실은 장보고가 활동하기 이전부터 이미 황해를 무대로 중국과 한반도, 일본열도를 잇는 해상교통망은 형성되어 있었다. 삼국시대에 백제에 의해 그 단초가 이루어지고 통일신라 이후 당과 일본에 거점을 두고 활동한 재당신라인, 재일본신라인의 활동이 본격화된 것이다. 해상왕, 해신(海神)이라고 칭송받는 장보고의 활동도 실은 재당신라인들의 네트워크 없이는 불가능하였다. 재당신라인사회의 활발한 해상교역을 배경으로 장보고라는 인물이 출현할 수 있었다. 장보고의 역할은 분산적으로 기능하던 중국 연안지역의 신라인사회를 묶어내었다는 데에 있다. 이들은 소금과 목탄의 운송과 판매, 선박 제조와 수리, 무역 상업 등의 업무에 종사하였고 지역사회의 경제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일본 큐슈의 츠시마, 이키, 오도열도 등지에도 장보고의 본격적인 활동 이전부터 이미 신라인들이 래항하여 오고 있었다. 하카다진(博多津)과 다자이후(大宰府)에는 신라출신 인물들이 진출하여 당과의 교역에 종사하였다. 이들도 신라, 당과 연결되는 이른바 환동아시아해 무역권을 무대로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였으며 장보고의 시대가 열리자 그를 중심으로 한 대외교역의 한 축을 담당하게 되었다.
당시 교역의 대상이 되던 물품에 대해서는 벨리퉁 침몰선이 정보를 제공해준다. 인도네시아 수마트라의 벨리퉁이란 작은 섬 해역에서 침몰한 이 배는 장보고의 활약이 본격화되기 직전인 820년대에 중국 동부 항구에서 막대한 양의 물품을 선적한 후 아랍으로 귀향하다고 침몰하였다. 8만 점이 넘는 도자기, 아랍 귀족의 기호에 맞춘 금제품, 당나라 거울 등 엄청난 물품이 선적되어 있었다. 당시 해역세계에서 유통되던 물품은 동남아시아, 서아시아, 남아시아산 물품을 망라한다. 아시아 각지에서 생산되는 후추, 정향, 육두구, 침향, 수지, 단향2), 육계(肉桂)3) 등의 삼림 작물은 아랍, 유럽과의 중요 교역품이었으며, 해삼, 상어지느러미, 진주조개, 바다제비집 등은 중국이 주요 소비국이었다.
통일신라기에 제작된 조각이나 기물에서 이른바 서역인의 자취가 확인되는 경우가 많다. 대표적인 사례가 경주의 전원성왕릉(괘릉)을 지키고 서 있는 돌로 만든 서역인상이며, 처용이란 존재 역시 여기에 포함된다. 따라서 이슬람 네트워크의 확대와 동방진출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7세기에 사우디에서 발흥한 이슬람교는 빠른 속도로 주변에 세력을 넓혀나갔는데 그 방향은 육로만이 아니라 해로가 포함되어 있었다. 당시 인도양, 아라비아해, 홍해를 거쳐 지중해로 이어지는 루트의 중심지이자, 최고 중요 항시는 아덴이었다.
교역의 확대와 새로운 통상로의 개척으로 인한 선박의 증가, 인도양 도서지역에서 대기하게 되는 선박의 식수 보급, 화물 적재, 산물의 집산과 거래 등 중계기능을 담당하는 시설의 필요성 등으로 인해 9-10세기 인도양 해역에서는 항시가 급증하였다. 이곳에서는 각지에서 온 다양한 사람과 물자, 정보가 모여 내륙의 영역국가와는 다른 개방적인 항시국가를 형성하였으며 이슬람교도가 독점한 이슬람의 바다가 아닌 많은 사람들이 공유한 개방적인 바다, 즉 해역세계의 모습을 띠게 되었다.
장보고가 구축한 해역세계는 환동아시아 무역권, 동남아시아의 남해 무역권, 이슬람 무역권을 연결하는 형태였을 것이다.
미래의 해역세계
육역세계와 달리 해역세계는 국적을 넘어서는 개방성, 이중성을 특징으로 한다. 9세기에 당과 신라, 일본을 무대로 해상무역을 전개하던 인물 중에는 그 국적이 당인지, 신라인지 불분명한 경우조차 있다. 국적보다 현실적인 이해관계에 따라 움직이는 것이 항시와 해역세계를 무대로 한 해상들의 모습이다. 화상(華商)을 넘어서는 한상(韓商)의 미래는 이런 모습이지 않을까?
신남방 정책은 정권의 교체에도 불구하고 어떠한 형태로든지 지속될 것이다. 대한민국의 외교 전략이나 경제활동에서 아세안과 인도의 중요도가 앞으로도 크게 증가할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 역사학계에서는 이에 대한 준비작업을 진행하지 못하고 있다. 베트남 전쟁에서 5,000명이 넘는 고귀한 생명이 희생되었지만 우리 사회에서 베트남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정보는 매우 부족하며 왜곡된 측면이 많다. 코로나 사태 이전에 베트남 중부의 다낭을 방문하는 한국인 관광객이 이미 80만을 넘어섰다. 다낭은 우리 삼국시대의 고대국가들과 병존하였고, 중국에 동시에 사신을 보냈으며, 상호 직간접적인 교역을 진행하였던 참파(林邑)의 무대이지만 참파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국내의 관심은 전무하다.
캄보디아 씨엠립의 앙코르 와트는 한국인 관광객에게 매우 인기가 높은 곳이다. 최근 대한민국 정부는 ODA 사업의 일환으로 앙코르 와트 인근의 앙코르 톰에 소재하는 사원과 건축물의 조사와 정비, 복원 사업을 성공적으로 실시하여 호평받은 바 있다. 하지만 캄보디아의 고대사, 고고학, 미술사를 본격적으로 연구하는 한국인 연구자는 아직 만나본 적이 없다. 한편 세계에서 네 번째로 인구가 많은 인도네시아(2억 7천만명 이상)에는 세계적인 힌두교, 불교 사원이 존재하며 앞으로 한국인 관광객과 기업인의 발걸음이 잦아질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인도네시아의 역사와 문화를 전공하는 연구자도 너무 부족하다.
이제부터 아세안과 인도가 대한민국의 주요 경제 파트너가 될 것임은 많은 사람들이 예측하고 있다. 그런데 우리의 준비는 충분한가? 물건을 팔아먹기 위한 근시안적이고 얄팍한 접근은 금방 한계를 보일 것이다. 투자와 교역의 대상으로만 볼 것이 아니라 진정한 친구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베트남과 인도네시아에서 열기가 뜨거운 K-Pop, K-Food로 대표되는 한류로 만족할 것이 아니라, 역사와 문화에 대한 접근을 통해 그들을 이해하려는 진지함이 필요하다.
고대 해양실크로드에 대한 이해는 앞으로 대한민국의 해양정책, 동남아시아 및 남아시아세계와 우호적 관계를 맺는 데에 영감을 줄 수 있다. 장보고가 구축한 해역세계에서 보았듯이 21세기 새로운 해역세계 구현은 인적 네트워크와 상대방에 대한 이해를 기초로 삼아야 할 것이다.
1) 금관가야의 허왕후, 신라의 탈해와 이사부, 제주도 시조 고, 량, 부씨의 배필이 된 여인 정도가 해양성을 강하게 보여준다.
2) 단향은 자바가 원산으로서 목재의 가운데와 뿌리 부분을 수증기로 증류하여 단향유를 추출한다.
3) 육계는 중국이 원산으로서 줄기와 뿌리의 껍질이 맵고 향기가 있어 약용이나 향료로 사용된다.
* 이 글의 내용은 아시아연구소나 서울대의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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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상교통로, 해양실크로드, 해상교역, 해역세계, 장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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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소개
권오영(koy1108@snu.ac.kr)
현) 서울대학교 국사학과 교수, 서울대학교 박물관장, 문화재청 문화재위원
전) 한신대학교 한국사학과 교수, 중부고고학회 회장, 백제학회 회장
저서와 논문: “낭아수국과 해남제국의 세계.” 『백제학보』 20호,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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