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특집: 아시아 문명 교류의 역사와 미래(1)
21세기 아시아 문명과 바다
육지에 비해 바다는 소통과 교류의 가능성이 훨씬 크다. 선사시대 이래 인류는 활발하게 해로를 이용해 세계 각지로 확산하고, 각종 상품과 원재료를 교환하였으며, 종교와 사상, 문화를 교환했다. 그 결과 대륙에서 오랜 기간 숙성되었던 문명 요소들이 바다를 통해 교환되고 서로 뒤섞이는 가운데 새로운 성격의 문명이 발전해 나왔다. 아시아의 역사를 고찰할 때 바다의 중요성을 새삼 강조하지 않을 수 없다. 마찬가지로 미래 아시아 문명 역시 바다를 통해 더욱 풍요롭게 발전할 것이다. 아시아의 바다는 현재 세계 강대국 간 패권 쟁탈이 벌어지는 공간이기도 하지만, 이를 극복하고 장차 평화와 번영을 구가하는 새로운 문명의 건설에 결정적인 기여를 하리라 기대한다.
아시아 문명을 거론할 때 많은 사람들이 내륙 지역 중심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강하다. 일견 당연하다고 할 수도 있다. 인간의 거주 지역이 광활한 평원지대이기 십상이고, 우리가 기억하는 주요 역사 사건들은 대개 대륙 한복판이나 산악 지대 같은 곳에서 일어난 일이기 때문이다. 고대 메소포타미아로부터 현대 중국에 이르기까지 여러 문명권의 성취가 대륙 내부에서 일어났다는 사실 또한 부인하기 힘들다. 그런 점에서 아시아 문명의 역사와 미래를 생각할 때 연구자들이나 일반인들 모두 대륙 중심의 틀을 견지하는 것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우리의 시각과 사고에는 관성이 작용하여 늘 같은 방향으로 바라보고 또 생각하는 경향을 띠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육상 중심으로만 사고를 한정한다면 우리는 진실의 절반밖에 보지 못하고 나머지 절반을 놓치는 결과가 되고 만다. 인간의 삶이 이어지는 또 하나의 핵심 공간이 바다이기 때문이다. 바다는 인류 역사의 중요한 무대이고 발전을 추동한 강력한 모터 역할을 하곤 했다. 우리 문명의 미래를 그릴 때에도 의당 ‘아시아의 바다, 바다의 아시아’를 고려해야 한다.
바다를 통해 형성된 문명
바다가 문명 발전의 중요한 소통로였다는 사실은 역사적으로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다. 몇 가지 사례를 살펴보자. 고대 인더스 문명권과 메소포타미아 문명권이 일찍이 서로 교류하며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발전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그런데 두 문명 간 소통이 이루어지는 데에는 육로뿐 아니라 해로 또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인도 북부 지역의 보석, 금, 주석, 상아, 목재 같은 상품들이 페르시아만을 거쳐 메소포타미아 중심 지역으로 들어왔다는 고고학적 연구 결과가 이 점을 명확하게 실증한다. 흥미롭게도 인더스 문명의 도량형 체계에서 사용하는 구와 실린더 모양의 추들이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 발견되었는데, 이것은 더욱이나 두 지역 간 교류가 긴밀히 그리고 체계적으로 진행되었다는 증거다. 한편 인더스 문명의 주요 상징들이 메소포타미아의 인장들에서 자주 보인다는 것은 두 문명 간 정신적·문화적 교류를 말해 준다. 그런데 인도 북부와 중동 지역 간 해상 교류는 언제, 어떻게 시작했을까? 놀랍게도 인도양 해역에서는 선사시대부터 항해가 이루어졌음이 밝혀졌다. 아마도 이 해역에서 일찍이 계절풍 체계를 발견하여 이를 이용해 먼 지역으로 항해하는 방법을 발견했던 것으로 보인다. 우리는 여기에서 문명이 원양항해를 낳은 게 아니고 원양항해가 문명 발전을 촉진했다는 중요한 사실을 확인하게 된다.
또 하나의 사례로는 이슬람 상인들의 중국 교역을 들 수 있다. 618년 당 제국이 개창하고, 622년 이슬람교가 성립된 것은 모두 세계사적인 주요 사건이다. 그런데 우리의 관점에서 더 흥미로운 점은 이 두 개의 거대 문명 혹은 초-문명(hyper-civilization, 이슬람권은 그 내부에 여러 개의 문명을 포함하고 있다)이 바다를 통해 활발하게 교역과 교류를 수행했다는 점이다. 이슬람권은 육상뿐 아니라 해상으로도 확산해 갔다. 아랍과 페르시아 상인들이 인도양 각지로 나아가서 활발하게 상업 활동을 하면서 점차 많은 지역들에 거류지를 형성해 갔다. 급기야 당 제국이 해상 교역에 문호를 열자 이슬람 상인들이 중국 남부에 정착했다. 광저우 거류지는 10만 명에서 20만 명 사이의 무슬림이 모여 있는 실로 놀라운 규모였다. 그리하여 도자기, 금은 제품들, 동전 등 중국 상품이 이슬람 상인의 중개를 통해 동남아시아 각지와 중동 지역으로 수출되었다. 기하학적 문양이나 쿠란 문구 등을 도자기에 새겨 넣었고, 페르시아의 코발트를 이용해 청색을 구현한 것을 보면 두 지역 간 경제 및 문화 교류가 높은 수준으로 행해진 것이 분명하다.
이상에서 거론한 한두 가지 사례만 보아도 인류사의 발전 여정에서 바다가 얼마나 중요한 영향을 행사해 왔는지 짐작할 수 있다. 육로로는 무거운 물품을 원거리 이동하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하고, 높은 비용과 느린 속도로 인해 상호 소통이 지체될 수밖에 없는 데 비해, 바닷길은 비록 위험이 따르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한번 개통되면 다량의 상품과 문화 자산들이 대규모로 그리고 빠른 속도로 전달된다. 해로는 육로와는 차원이 다른 소통과 교류를 가능케 한다. 이는 현재에도 마찬가지이고 장래에도 여전히 지속될, 어쩌면 인류사의 상수(常數)에 해당한다고 할 것이다. 우리가 아시아 문명의 미래를 상상할 때에도 바다라는 요소를 반드시 고려해야 하는 이유다.
아시아 경제의 해양성
오늘날 동아시아는 세계 경제의 핵심 지역 중 하나다. 20세기 후반 일본 경제가 기적에 가까운 성장을 이루면서 아시아 경제를 선도했고, 이후 중국이 급속도의 성장을 거듭하여 이제 총량 기준으로는 세계 2위의 경제권으로 도약했다. 한국과 대만 또한 세계 정상급의 강력한 경제 대국으로 성장했다. 동아시아 경제권은 그 자체로 이미 거대한 규모로 세를 키운 데다가 미주권 경제 그리고 역시 빠른 성장세를 이어가는 인도·동남아시아 그리고 중동 지역 경제와 경쟁과 협력을 이어가고 있다. 동아시아는 앞으로도 다이내믹한 발전을 이어갈 세계 경제의 핵으로 자리 잡을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서 주목할 점은 동아시아 경제의 해양성이다. 이 지역을 축으로 하는 글로벌 네트워크가 해양을 통해 연결되어 발전 중이다. 한·중·일·대만 모두 선진 경제 지역은 바다와 근접한 연안 지역이며, 이곳들은 해로를 이용한 국제 분업 상태에 있다. 이 지역들은 해운을 통해 상호 연결되어 있다. 세계 20대 항구 관련 자료를 보면 상하이, 싱가포르, 선전, 닝보, 홍콩, 부산, 광저우 등 최정상급 항구들은 모두 아시아에 위치해 있고, 그중에서도 특히 중국과 한국이 중심 역할을 하고 있다. 세계 1위를 차지한 상하이의 경우 2008년에 2,700만 TEU(Twenty-foot equivalent unit, 20피트 컨테이너를 운송하는 해운 단위)였다가 2017년에는 4,000만 TEU를 소화하여 144퍼센트 성장했다. 같은 기간 싱가포르는 2,992만 TEU에서 3,367만 TEU로, 또 부산은 1,345만 TEU에서 2,049만 TEU로 각각 133퍼센트와 152퍼센트 성장했다. 아시아 해역이 세계 경제의 중심 역할을 하고 있을 뿐 아니라 갈수록 더욱 크게 성장해 가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현재 코로나19 사태 여파로 상하이 항구가 봉쇄되자 세계 경제가 깊은 충격에 빠진 점을 보면, 역설적으로 이 지역 경제가 얼마나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지 알 수 있다.
갈수록 인구 집중도가 높아지고 경제 활력이 강화되는 연안 지역들은 어쩌면 자국 내 다른 내륙 지역보다도 이웃 국가 연안 지역들과의 연관성이 더 강해졌다. 중국 남동부의 상하이나 닝보시 주변 지역들을 예로 들어본다면, 자국의 쓰촨성이나 윈난성보다는 한국의 부산이나 일본의 오사카와 더 의미 있는 연결망을 이루고 있다. 게다가 해저 광케이블의 확대를 통한 정보화의 초고속 성장은 이러한 역내 연관을 더욱 강화할 것이 분명하다. 상호 연관성은 단지 경제 부문에만 한정되는 게 아니다. 문화 교류 또한 그 어느 때보다도 활기를 띠고 있다. 한중일 3국의 젊은 세대를 보면 상호 배타적 감정을 노출시키기도 하지만, 사실은 지구화된 자본주의 속에서 거의 유사한 구조적 위치에 처해 있는 상황에서 같은 가치를 공유하고 공감의 범위를 넓히는 중이다. 이런 긍정적 측면이 지속된다면 기존의 편협한 민족주의적·애국주의적 갈등을 넘어서는 넓은 의미의 ‘새로운 해양문명’이 등장할 수도 있지 않을까 기대해 본다.
그렇지만 이렇게 낙관적인 측면만 있는 건 분명 아니다. 현재 국제 상황을 보면 위험할 정도로 갈등과 불확실성이 증대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중국이 빠른 속도로 성장하여 경제적 힘을 축적하는 동시에 군사력을 강화해 가면서 21세기 언젠가 미국을 누르고 세계 패권을 차지하게 되지 않을까 하는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이로 인해 자칫 파멸적인 전쟁이 발발할지도 모른다는 소위 ‘투키디데스 함정론’이 거론되고 있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신흥 강대국의 도전에 직면한 기존 패권국이 공포를 느낀 나머지 결국 두 강대국이 전쟁으로 치달을 수 있다는 것이 그 내용이다. 고대 그리스 세계에서 스파르타와 아테네가 펠로폰네소스 전쟁을 치렀듯 미중 갈등이 전쟁으로 귀결되지 않을까 세계가 노심초사하고 있다. 미중 갈등 뿐 아니다. 중국은 대만과 정치·군사적으로 충돌 위험을 노정하고 있고, 필리핀, 말레이시아, 베트남, 인도네시아 등과도 해상 지배권 문제로 다투고 있다. 중국이 주장하는 소위 ‘남해9단선(nine dash line)’을 연결하면 남중국해 해역의 90퍼센트를 차지하게 되는데, 이것이 지역 내 격렬한 투쟁 가능성을 높이는 중이다. 장차 아시아의 바다에서 어떤 사태가 벌어질 것인가?
특히 주목해야 할 점은 앞으로 세계의 거대 군사 충돌이 바다에서 벌어질 가능성이 높다는 점이다. 2차 세계대전 이후 강대국들은 핵무기를 비롯한 강력한 무력을 해상에서 전개하여 상대를 억제하려는 방향으로 발전해 왔다. 바다에서, 어쩌면 바다 속에서 가장 치열한 전투가 벌어질 공산이 크다. 중국은 그들이 설정한 해상 방어선 내로 미국 해군이 진입해 들어오는 것을 막으려 하고, 반대로 미국은 동맹국들과 협력하여 동아시아 및 인도양 해역을 통제하려 한다. 미국의 항공모함과 핵잠수함의 위협에 맞서 중국 또한 강력한 대양해군 건설에 매진하고 있다. 현재 중국은 항공모함이나 구축함, 잠수함 등 해군력을 극대치로 확장하려 하고 있어서, 두 초강대국의 군사 충돌은 자칫 인류의 존망을 위협할 수준이다. 지정학자들은 핵전쟁으로서 3차 세계대전이 일어날 가능성이 높은 곳으로 남중국해와 동중국해를 들고 있다. 말하자면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바다는 한반도에서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해 있다.
번영의 가능성, 파멸의 가능성
지금까지 간략히 살펴본 대로 아시아의 바다는 번영과 평화의 가능성과 파멸과 파괴의 가능성을 모두 품고 있다. 늘어나는 세계 인구의 식량을 조달할 가능성이 높은 곳도 바다이고, 지상에서 구하기 힘든 희귀 자원과 새로운 에너지를 얻을 수 있는 곳으로도 바다를 주목한다. 극단적 상상을 해 보면, 지구 환경의 악화로 인해 지상에서 거주하는 게 힘들어질 경우 마지막 거주지로 해상 혹은 해저 인공 도시를 건설할 수도 있다. 바다는 그야말로 무한한 가능성의 공간이다. 그렇지만 인류의 가공할 폭력성이 마지막으로 폭발하여 모든 것을 무로 돌려버릴 전쟁 무대 역시 바다일 수 있다. 그와 같은 파괴적 흐름을 억제하고 인류의 희망의 장소로 바꾸어야 하는 것이 우리의 과제임은 자명하다. 분명 아시아의 바다가 그 과제를 수행하는 무대가 될 것이다.
바다의 특징은 거칠 것 없는 유연한 소통과 교류, 그로 인한 융합이다. 대륙 내부에서 오랜 기간 숙성되었던 문명 요소들이 바다를 통해 교환되고 서로 뒤섞이는 가운데 새로운 성격의 문명이 발전해 나온 것이 지금까지 역사의 중요한 특징이었다. 우리는 이제 그러한 가능성이 아시아의 바다에서 만개하기를 고대한다. 국경으로 구획된 협량한 내륙 지역에서 벗어나 광활한 수평선 아래 넓게 툭 트인 해양 공간이 새로운 문명의 요람이 되기를 희망한다. 지금까지 역사적으로 준비해 온 다양한 문명 요소들이 분명 중요한 미래 자산이 될 것이다. 그렇지만 그것은 흔히 국가 단위의 영역 내에 국한되어 있었다. 장차 새로운 해양 교류의 틀이 만들어져 이전의 문명 요소들이 융합한다면 공동 번영의 새로운 인류 문명이 창발(emerge)할 수 있지 않을까. 아직까지는 그런 소망과는 반대로 오히려 대륙의 갈등이 바다로 뻗치는 부정적 현상이 두드러지지만, 이제 평화로운 해상 문명의 형성 가능성을 진지하게 탐구해 봄직하다. 우리가 희망하는 메가-아시아는 기존 아시아 문명들을 기반으로 하되 그것들을 뛰어넘는 새로운 아시아의 기획이다. 바다가 제공하는 유연한 동력이 그런 상상을 실현시킬 힘이 되리라 기대해 본다.
* 이 글의 내용은 아시아연구소나 서울대의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Tag:
아시아, 해양문명, 해상교류, 바다인류, 아시아경제
이 글과 관련된 최신 자료
- 주경철 (2022). 『바다 인류: 인류의 위대한 여정, 글로벌 해양사』, 휴머니스트
- Bagg, A. (2017). “Watercraft at the beginning of history: the case of third-millennium Southern Mesopotamia.” The sea in history. The ancient world. The Boydell Press, Woodbridge, 127-137.
- Buchet, Christian (2017). La grande histoire vue de la mer, Paris: Cherche-Midi
- Schottenhammer, A. (2015). “Yang Liangyao’s Mission of 785 to the Caliph of Baghdād: Evidence of an Early Sino-Arabic Power Alliance?.” Bulletin de l’École française d’Extrême-Orient 101, 177-242. https://www.jstor.org/
- Valli, Arnaut (2015). “L’US-Navy: Quelle puissance navale au XXIe siècle?,” Paris: Centre d’Etude Stratégique de la Marine. https://www.irsem.fr/
저자소개
주경철(joukc@snu.ac.kr)
현) 서울대 서양사학과 교수
전) 서울대학교 역사연구소 소장, 서울대학교 자유전공학부 부학부장
주요 저서: 『주경철의 유럽인 이야기』 (휴머니스트, 2017)
『문화로 읽는 세계사』 (사계절, 2015)
『문명과 바다, 바다에서 만들어진 근대』 (산처럼, 2009)
『대항해시대, 해상 팽창과 근대 세계의 형성』 (서울대학교출판부, 20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