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획: 아시아 대도시 가치조사(5)
능력주의의 이상과 현실, 그리고 삶의 만족도
능력주의에 대한 믿음은 삶의 만족도와 어떠한 관련이 있을까? 재능과 노력에 따라 사회적 가치가 배분되어야 한다는 능력주의 원칙에는 공감하지만 정작 자신이 사는 사회의 현실은 그와는 거리가 멀다고 믿는다면 그 사람은 현재의 삶을 어떻게 평가할까? 이 글은 서울대학교 아시아연구소와 한국리서치가 함께 실시한 <아시아 대도시 가치조사> 결과를 바탕으로 이 질문에 답하고자 한다.
능력주의와 삶의 만족도
지난 십 년간 한국 사회에서 새롭게 떠오른 키워드는 단연 공정과 능력주의이다. 능력주의와 공정성은 젊은 세대가 기존 사회의 보상 구조에 반대하며 호명하여 부각되었다. 아시아 대도시 가치조사에서 추구해야 할 가치로 공정성이 언급되는 비율은 모든 사회에서 낮았으나 서울시민들의 10명 중 한 명이 공정성을 가장 많이 꼽았다. 반면 도쿄 시민은 5%가 나머지 도시 시민들은 3% 미만이 공정성을 사회가 추구해야 할 가치로 가장 먼저 언급하였다.
능력주의에 기반한 공정성을 추구하는 경향은 개인이 느끼는 삶에 만족도와 어떤 관련이 있을까? 15개국 주요 도시의 시민들에게 능력주의에 관한 생각을 묻는 8개 질문과 삶의 만족도를 측정하는 10개 질문을 던졌다. 능력주의 문항들은 ① 능력주의의 원칙에 동의하는지를 묻는 4개 질문과 ② 자신의 사회가 그러한 원칙에 따라 작동된다고 믿는지를 묻는 4개 질문으로 구성되어 있어, 앞의 4개 문항은 능력주의의 이상에 대한 믿음을, 뒤의 4개 문항은 능력주의의 현실에 대한 믿음을 각각 측정한다. 이들 간의 차이, 즉 능력주의에 대한 이상과 현실 간의 간극이 클수록 삶의 만족도가 낮을 것이라는 가설을 가지고 분석을 시작했다. 아래에서는 조사 대상 15개 도시 중 동북아시아 4개국(한국, 일본, 대만, 중국), 동남아시아 4개국(싱가포르,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베트남), 남아시아 1개국(인도) 등 총 9개국의 수도에 초점을 두고 조사 결과를 비교한다.
도시별 분석
먼저 <그림 2>는 도시별로 능력주의의 이상(Y축)과 현실(X축)의 평균, 그리고 삶의 만족도 평균(폰트 크기)의 분포를 보여준다. 능력주의가 바람직하다고 믿는 경향은 하노이에서 가장 높았고 의외로 서울과 동경은 낮은 편이었다. 사회가 능력주의대로 작동된다고 믿는 경향은 뉴델리와 하노이가 높았고, 역시 서울과 동경이 낮았다. 특히 이 점에서 서울은 다른 도시에 비해 훨씬 낮은 점수를 보였다. 도시별 삶의 만족도는 뉴델리, 북경, 자카르타, 하노이, 쿠알라룸푸르, 싱가포르, 타이베이, 동경, 서울 순으로 높았다. 흥미로운 점은 북경을 제외하면 삶의 만족도가 남아시아에서 가장 높고, 동남아시아가 중간, 그리고 동북아시아에서 가장 낮은 분명한 지역 패턴이 보인다는 점이다.
능력주의 이상과 현실의 간극이 삶의 만족도와 어떤 관련이 있는지를 보기 위해 <그림 3>에서는 이상과 현실의 간극을 양자 간의 차이(difference)와 비율(ratio)로 구해서 이 각각에 대해 도시별 삶의 만족도 평균이 어떻게 달라지는지 살펴보았다. 예상대로 이상과 현실 간 간극이 클수록 삶의 만족도가 낮아지는 뚜렷한 경향이 보였다. 간극이 가장 낮은 뉴델리에서 삶의 만족도가 가장 높았고, 간극이 가장 큰 서울에서 만족도가 가장 낮았다. 여기서도 지역 패턴이 분명히 드러난다. 북경을 제외하면, 남아시아, 동남아시아, 동북아시아 순서로 간극은 점점 커지고 삶의 만족도는 점점 낮아지는 것이다.
개인수준 사회계층별 분석
다음으로 개인 수준 다중회귀 분석을 도시별로 실시했다. 여기서는 개인이 어떤 사회계층에 속하는지에 따라 능력주의에 대한 믿음이 삶의 만족도에 미치는 영향이 달라질 것이라고 보고 분석을 진행했다. <그림 4>는 이상과 현실의 간극(difference)이 삶의 만족도에 미치는 영향의 크기를 도시별로 나타낸 것이다. 각 도시명에 붙은 숫자 0은 가장 낮은 사회계층, 10은 가장 높은 사회계층을 의미한다. 수평선 0의 위쪽에 위치하면 이상 대비 현실의 간극이 클수록 삶의 만족도가 높아짐을, 반대로 0 아래쪽에 위치하면 간극이 클수록 만족도가 낮아짐을 뜻한다. 몇 가지 점이 눈에 띈다. 우선, 사회계층을 막론하고 대부분 수평선 아래에 분포되어 있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 대체로 간극이 클수록 삶의 만족도가 낮다는 뜻이다. 둘째로, 대부분의 도시에서 사회계층이 높을수록 간극의 부정적 효과가 더 두드러지는 경향을 나타낸다. 이상은 높으나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사회 상층에게 삶의 만족도를 더 낮추는 효과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셋째, 그러한 경향은 특히 예루살렘과 타이베이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넷째, 예루살렘, 타이베이, 자카르타, 서울 등에서는 사회계층이 가장 낮은 경우 간극이 클수록 오히려 삶의 만족도가 높은 경향을 보였다.
이상은 높으나 현실은 그렇지 못할 때, 특히 높은 사회계층에 속하는 사람일수록 삶의 만족도가 낮다는 점을 확인하였다. 이상과 현실의 사회계층에 따른 효과를 각각 알아보기 위해 이 둘을 분리해 개인 수준 다중회귀 분석을 다시 실시했다. <그림 5>의 왼쪽은 이상, 오른쪽은 현실이 삶의 만족도에 미치는 영향을 보여준다. 마찬가지로 숫자 0은 가장 낮은 사회계층, 10은 가장 높은 사회계층의 경우를 의미한다. 이상의 효과는 대체로 수평선 0 주위에 형성되어 있다. 이상 자체는 삶의 만족도에 큰 영향을 주지 못하는 것이다. 하지만 가장 낮은 사회계층에 속하면서 높은 이상을 지니는 경우, 특히 타이베이, 리야드, 서울 같은 곳에서 그럴 경우, 삶의 만족도가 높은 경향이 부분적으로 관찰된다. 반면, 현실의 효과는 대체로 긍정적이다. 대부분 수평선 0 위쪽에 자리 잡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도시별로 거의 언제나 사회계층이 높은 경우 확실히 현실의 영향은 긍정적이었다. 아마도 높은 사회계층에 속하는 사람들이 삶의 만족도가 높고, 그런 경우 자기 사회에서 능력주의가 잘 실현되고 있다고 믿는 경향이 있기 때문으로 보인다.
이상의 개인 수준 분석에서 가장 흥미로운 결과를 보여준 도시는 타이베이였다. 이곳에서는 능력주의의 이상과 현실이 삶의 만족도에 미치는 영향이 사회계층에 따라 반대의 효과를 나타냈다. <그림 6>을 보면, 사회계층이 가장 낮을 때 높은 이상은 삶의 만족도를 높이는 효과를 보이는데, 이 효과가 사회계층이 높아질수록 점점 줄어들었다. 반면, 능력주의가 현실에서 구현된다고 믿는 것은 사회계층이 낮을 때는 삶의 만족도에 부정적이었지만 사회계층이 높아질수록 점점 긍정적인 방향으로 바뀌었다. 이러한 패턴은 서울에서도 비슷하게 관찰되었다.
결론
능력주의에 대한 믿음, 특히 이상은 높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는 믿음은 삶의 만족도와 부정적인 관계를 나타낸다. 그리고 이러한 관계는 사회계층이 높은 사람들에게 보다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이상이 너무 높거나 현실에 대한 믿음이 너무 낮을 때, 특히 높은 사회계층에 속한 사람들은 낮은 수준의 삶의 만족도를 보이는 것이다. 이를 가장 잘 보여주는 사례가 타이베이와 서울이었다. 이 두 도시에서는 다른 어느 곳보다, 특히 이상이 높을수록 사회계층이 높은 사람들의 삶의 만족도가 낮아지는 경향을 나타냈다. 흥미롭게도 이 두 도시가, 동경과 더불어서, 이상과 현실의 간극도 가장 크고, 사람들의 삶의 만족도도 가장 낮은 도시라는 점이다. 능력주의를 강조하는 사회에 살지만 동시에 사회의 현실은 그와 동떨어져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삶이 불행할 가능성이 큰 것이다.
* 이 글의 내용은 아시아연구소나 서울대의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Tag: 능력주의,삶의만족도,아시아,대도시가치조사,지역별차이
이 글과 관련된 최신 자료
- 장영희·서울시정개발연구원·Nomura Sōgō Kenkyūjo (2003). 『세계도시 서울은 가능한가 : 동아시아 6대 도시 서울, 동경, 홍콩, 북경, 상해, 싱가폴 비교분석』. 서울시정개발연구원, 노무라종합연구소.
- 이희정 (2022). “청년들은 소득불평등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가? : 사회계층 인식과 능력주의 인식을 중심으로.” 『한국사회학』 56(2), 45-82.
- Chou, M., Moffitt, B., & Bryant, O. (2020). Political meritocracy and populism : Cure or curse? Routledge.
- Khanna, Szonyi, Khanna, Tarun, & Szonyi, Michael (2022). Making meritocracy : Lessons from China and India, from antiquity to the present. Oxford University Press.
저자소개
김용균(yongkyunkim@snu.ac.kr)
현) 서울대학교 정치외교학부 교수, 베트남 하노이국립대 인문사회대 방문 교수
전) 이화여자대학교 정치외교학부 교수
주요 저서와 논문
“전자산업 글로벌 밸류체인과 동아시아 경제.” 『관계와 흐름으로 읽는 아시아』 (진인진, 2023)ᅠ
“베트남의 중간국 외교.” 『아시아의 지정학적 중간국 외교』 (진인진, 2022)
“2008년 이후 베트남 발전모델의 변화: 혼종성의 내향적 정교화.” 『아시아리뷰』 12(2). 2022.
“외국기업의 정치적 위험관리 전략으로서 현지 CSR의 효과 분석: 베트남 도시개발 진출 한국기업의 비시장 전략 비교.” 『동남아시아연구』 31(4). 20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