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카타르 FIFA 월드컵의 정치학
메가이벤트는 제국주의와 냉전 등의 국제정치와 신자유주의 도시 정치 등 다양한 정치와 결부되어 왔다. 2022 카타르 FIFA 월드컵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 메가이벤트는 포스트 오일 경제와 신산업 육성이라는 카타르의 장기적 비전을 위해 조성된 새로운 도시 인프라를 선전하고 도시 브랜딩을 목적으로 한 것이었다. 하지만 이 광고의 뒤편에는 새로운 도시를 만들기 위해 터 잡은 남아시아 출신의 블루칼라 노동자들을 도시 경관에서 지워낸 흔적이 드러난다. 또한 이는 아시아의 메가이벤트를 둘러싼 새로운 국면이 형성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징후적 이벤트이기도 하다.
메가이벤트의 정치학
메가이벤트라는 개념이 있다. 개최 기간은 수주에서 수개월에 불과하지만 최소 수년의 준비 시간이 소요되고 그 영향은 최대 수십 년에 이르며, 개최 장소는 한 도시나 한 지역 등으로 제한적이지만 이를 관람하는 사람은 최소 천만에서 최대 수십억에 이르는 이벤트들을 일컫는다. 세계박람회, IOC 올림픽, FIFA 월드컵, 아시안게임 등이 이 ‘메가이벤트’에 해당한다.
이런 메가이벤트는 정치의 수단이었다. 제국주의 시대 최대의 메가이벤트였던 박람회는 ‘제국’의 문명을 보여주는 수단이었다. 1851년 런던 수정궁(Crystal Palace)에서 열린 최초의 박람회부터 이미 박람회는 개최 국가의 산업과 문화가 얼마나 발전했는지를 주변 국가와 비교하여 보여주는 국제 정치의 장이었고, 기술과 산업이 창출하는 유토피아의 현실성을 광고하고 사회주의 유토피아 비전을 무력화시키는 국내 정치의 장이었다.
20세기 중반 영상매체의 발전과 더불어 올림픽은 박람회를 대신하는 최대의 메가이벤트가 되었다. 그리고 이는 곧 냉전 정치에 얽혀 들어갔다. 1956 멜버른에서 시작하여 1960 로마, 1964 도쿄, 1968 멕시코시티, 1972 뮌헨, 1976 몬트리올로 이어지는 올림픽 개최 도시는 모두 ‘자유 진영’에 복귀한 2차 대전 추축국 또는 미국과 가까운 국가에 소재하였다. 1980년 모스크바와 1984년 LA 대회는 서방세계와 동구권이 차례로 불참함으로써 올림픽이 냉전의 도구임을 확연히 드러내었다.
아시안게임 역시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미주에서 개최되는 팬아메리카게임(Pan American Games)과 더불어 가장 오랜 시간 지속된 대륙 스포츠 이벤트인 아시안게임은 1951년 인도에서 첫 대회를 가졌다. 여기에는 비동맹 아시아의 리더를 꿈꾸던 정치가 네루(Javāharlāl Nehrū)의 의지가 크게 작용했다. 그러나, 1962년 자카르타 아시안게임에서의 대만과 이스라엘 선수단 입국금지 사건은 ‘비동맹아시아’와 ‘자유아시아’ 사이의 갈등을 수면 위로 부상시켰고, 이후 아시안게임은 한동안 방콕, 테헤란 등 ‘자유 진영’에서 개최되었다.
메가이벤트에 변화가 찾아온 것은 1990년대부터였다. 1986 서울 아시안게임과 1988 서울 올림픽, 그리고 1990 베이징 아시안게임으로 이어지는 탈냉전의 메가이벤트를 지나, 1990년대 초반부터 메가이벤트는 세계화 및 신자유주의와 결합하였다. 메가이벤트는 도시와 국토를 대대적으로 바꾸는 도시 정치의 수단이자 도시 및 국가 브랜딩을 통한 국제정치의 수단으로 활용되기 시작했다. 1992년 올림픽을 계기로 유럽 유수의 관광도시가 된 바르셀로나, 2008년 올림픽을 계기로 중국의 국제적 지위 부상을 알린 베이징, 2012년 올림픽과 더불어 도시의 건재를 드러내고자 했던 런던, 2020년 올림픽과 더불어 아시아 제일의 도시 지위를 확인하고자 했던 도쿄 등의 사례가 이를 보여준다.
그렇다면 2022년 겨울 카타르에서 개최된 FIFA 월드컵을 둘러싸고는 어떠한 정치가 전개되었을까? 국가와 도시 브랜딩 수단으로서의 메가이벤트라는 흐름을 이어받은 것일까? 아니면 지난 30년간 이어져 온 흐름으로부터 이탈한 것일까? 일차적으로 이 글은 2022 카타르 FIFA 월드컵이라는 메가이벤트의 배경에 존재하는 정치적 동기를 확인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나아가, 이 글은 시야를 카타르에 국한하지 않고 아시아로 확장하고자 한다. 2010년대부터 각종 메가이벤트를 주도적으로 개최하게 된 아시아 전체를 시야에 두고 아시아 메가이벤트를 둘러싼 새로운 흐름을 확인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2020년대 초입에서 카타르가 개최한 FIFA 월드컵의 성격을 보다 입체적으로 해명하고자 한다.
오일 경제와 포스트 오일 경제
아라비아반도의 토후들은 18세기 이후 오스만 제국이 힘을 잃어가는 가운데 존재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두바이에 정착한 알 막툼(Al Maktoum) 가문, 아부다비에 정착한 알 나얀(Al Nahyan) 가문, 바레인의 알 칼리파(Al Khalifa)가문, 카타르의 알 타니(Al Thani) 가문 등은 모두 18세기 말부터 19세기 중반 사이에 해당 지역에서 권력을 공고히 하였다. 이들 가문이 다스리는 지역은 오늘날의 쿠웨이트, 바레인, 카타르, 아랍에미리트, 오만에 해당하는데, 이들은 1820년부터 1891년 사이 영국과 조약을 맺고 보호령이 되었다가 2차 대전 이후 차례로 독립 국가를 만들기 시작했다.
카타르는 아랍에미리트 지역의 7개 토후국 및 바레인과 더불어 1971년에 독립했다. 2차 대전 이후 영국의 힘이 약화되는 가운데 1960년대 말 노동당 정부는 이 지역에서의 철수를 선언하였고, 9개 토후국은 국가 구성을 위한 회의를 진행한다. 그 결과 바레인과 카타르는 독립 왕국을 만들고, 아부다비와 두바이를 포함한 7개 토후국은 연방국 아랍에미리트연합을 만든다.
오늘날 이 지역의 경제가 지하자원에 의존한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도하, 아부다비, 두바이 사람들은 진주조개 채취로 생계를 이어오다 20세기 초 일본의 진주조개 양식 이후 경제적 어려움을 겪었다. 그런데, 20세기 중반 석유가 발견되고 1970년대부터 석유수출국기구가 영향력을 발휘하자 석유는 이들 국가에 부를 안겨다 주었다. 카타르의 경우 석유보다는 천연가스 매장량이 상당하고(세계 3위), 이를 액화하여 수출하는 산업이 본격화된 1990년대부터 동아시아에의 수출을 바탕으로 막대한 부를 쌓아 올리기 시작하였다.
이들 지역에는 포스트 오일 경제라는 과제가 존재한다. 이들 지역은 일찍이 1980년대 유가 하락 속에서 석유에 의존하는 경제의 취약성을 경험하였고, 이어서 선진국을 중심으로 화석 연료 사용을 줄이려는 움직임을 목도하였다. 이에 따라 석유를 포함한 자원 수출에 의존하는 경제 구조로부터의 탈피와 산업다각화라는 과제를 설정하게 된 것이다.
이를 선도한 것은 아랍에미리트의 두바이였다. 이웃한 아부다비와 달리 석유 매장량이 적었던 두바이는 처음부터 새로운 산업으로 눈을 돌렸고, 두바이의 지리적 이점에 주목하였다. 두바이 정부는 1970년대 말 중동 최대 규모의 항구 2개를 완성한 뒤 1980년대 중반 항구 일대를 자유무역지대로 만들었다. 1985년 에미레이트 항공을 만들고 1992년 두바이 국제공항을 대폭 확장한 뒤에도 공항 일대를 자유무역지대로 만들었다. 이를 통해 2000년대 초반에 이미 홍콩과 싱가포르를 잇는 국제적 물류 거점이 되었다. 같은 시기 인터넷시티, 자동차 자유지대, 미디어 시티, 금속 센터, 지식도시, 산업도시 등 각종 클러스터를 조성하였다.
인접한 아부다비도 마찬가지다. 이미 2000년대 초반에 중공업과 ICT 클러스터를 만든 아부다비는 2006년 아부다비 경제비전 2030(Abu Dhabi Economic Vision 2080)을 발표한다. 경제의 석유 의존도를 줄이고 지식 기반 산업 위주로 산업을 다각화하기 위하여 비즈니스 환경, 금융, 노동시장, 인프라, 인력 등 다양한 차원의 준비 작업을 수행하겠다는 것이었다. 아부다비는 이후 에너지만 아니라 금속, 항공우주, 바이오·의료, 관광, 서비스, 물류, 교육, 미디어, 전기통신 등 다양한 분야를 육성하고 있다.
카타르 정부는 2008년 카타르 국가비전 2030 (Qatar National Vision 2030)을 통하여 경제부문의 다각화를 주요 목표 중 하나로 설정하였다. 석유에 비해 낮은 탄소배출량으로 글로벌 수요가 상대적으로 오랜 기간 유지되리라 여겨지는 천연가스지만, 천연가스에 의존하는 경제의 지속가능성에 의문을 제기하기 때문이었다. 이로 인하여 카타르는 지식기반 산업, 금융, 관광 등을 위주로 산업 다각화를 꾀하기 시작하였다. 그 출발점 중 하나가 교육이었다. 카타르 정부는 도하 인근에 에듀케이션 시티를 만들고 1990년대 후반부터 미국의 대학 분교들을 유치하기 시작했다. 버지니아 커먼웰스 대학을 시작으로, 코넬 의과대학, 텍사스 A&M 대학, 카네기멜론대학, 조지타운대학, 노스웨스턴 대학이 차례로 이곳에 자리를 잡았다. 또한 카타르는 2009년 과학기술 비즈니스 인큐베이팅을 위한 카타르 과학기술 단지(Qatar Science & Technology Park)을 조성하여 지식 산업 육성을 위한 기반을 마련하였다.
도시 브랜딩과 스포츠 마케팅
이들 지역의 산업다각화를 위해 필요한 것은 외국인직접투자(FDI: Foreign Direct Investment)다. 다각화에 필요한 산업의 기반이 거의 없던 이들 지역이기에, 새로운 산업은 결국 외국계 기업의 투자에 기초하여 발전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는 산업과 운송을 위한 인프라만 아니라 비즈니스 엘리트와 기술인력을 위한 주거 인프라를 필요로 한다. 최근 30년간 두바이, 아부다비, 카타르는 그래서 전 세계의 그 어느 지역보다도 역동적으로 도시를 바꾸어 왔고, 바뀐 도시를 알리기 위해 다양한 마케팅 전략을 활용하였다. 이때 가장 많이 활용된 것이 스포츠였다.
그 시작은 역시 두바이였다. 세계 최고층 건물 부르즈칼리파, 7성급 호텔이라 불리는 부르즈 알 아랍, 세계에서 가장 큰 쇼핑몰인 두바이몰, 인공 섬 팜 아일랜드, 두바이 프레임 등 수많은 랜드마크들이 2000년 이후 들어섰고, 미션임파서블을 포함한 다양한 영화들이 이런 두바이를 전 세계에 알렸다. 2000년대 들어 전 세계 최고 항공사 반열에 오른 에미레이트 항공은 아시아와 유럽, 아프리카를 잇는 위치를 활용하여 관광객들을 끌어들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 에미레이트 항공을 광고하기 위해 활용된 것이 스포츠였다. 레알 마드리드, 아스널, 함부르크 등 전세계에서 가장 인기 있는 축구팀들이 에미레이트 항공을 유니폼에 새겼고, 2006년 개장한 아스널의 홈구장은 에미레이트 스타디움이라 불리고 있다. 두바이 데저트 클래식(골프), 두바이 듀티프리 챔피언쉽(테니스) 등 전 세계적 주목을 받는 스포츠 투어 경기도 매년 두바이에서 열린다. 그러는 사이 1973년 약 12만 명이었던 두바이 인구는 2023년 약 300만 명을 넘어섰다. 두바이의 높은 집값을 피해 연담화(도시가 확장되어 인근 도시 시가지와 연결되는 현상)된 도시 샤르자에 거주하는 이들이 늘어나면서 두바이 광역권의 인구는 약 560만을 헤아리고 있다.
아랍에미리트의 수도 아부다비가 그 뒤를 이었다. 아부다비는 1980년대에 이미 현대적인 도시의 면모를 갖추었지만, 21세기 들어 도시 외곽의 미개발지들을 활용하여 최첨단의 도시를 만들기 시작했다. 페라리월드, 워너브라더스월드 등이 미개발지에 들어서면서 아부다비의 주요한 관광자원이 되었고, 탄소 제로의 도시를 목표로 한 마스다르 시티 등 최첨단 계획도시 역시 도시를 알리고 있다. 이에 더하여 눈에 띄는 것은 문화다. 21세기 들어 미술시장의 큰 손이 된 아부다비는 루브르박물관의 분관을 만든 데 이어 구겐하임 미술관의 분관을 만들고 있다. 아부다비 국제영화제, 아부다비 국제도서전, 아부다비 아트페어 역시 문화산업 전략의 일환이다. 그보다 앞선 2003년 만들어진 에티하드항공이 활용됨도 물론이다. 그리고 에티하드항공을 알리는 데에는 스포츠가 활용되었다. 2008년 아부다비 왕가는 영국의 프로축구팀 맨체스터 시티 FC를 인수하였고, 리그 중하위권을 맴돌던 팀은 3년 만에 첫 우승을 이룬 후 현재까지 총 6회 우승을 기록하며 전 세계 최고 축구팀 중 하나가 되었다. 아부다비 왕가는 더 나아가 시티 풋볼그룹이라는 이름으로 전 세계 총 12개 구단을 소유하거나 지분을 갖고 있다. 이중 지분 100%를 지닌 맨체스터 시티 FC, 뉴욕시티 FC, 맬버른 시티 FC 유니폼을 통해 에티하드항공을 광고하고 있고, 멘체스터 시티 FC의 경기장도 에티하드 스타디움으로 불린다. 아부다비 HSBC 골프플래식, F1 아부다비 그랑프리 등 국제적 스포츠 투어를 통해 아부다비를 알리는 것 또한 두바이와 유사한 전략이다.
2022 카타르 FIFA 월드컵의 정치학
카타르는 경기도 정도 면적의 작은 국가다. 그런 카타르의 인구는 1993년 기준 약 43만 명에서 2019년 기준 약 280만 명이 되었다. 급속한 인구 성장에 가장 중요한 변수가 된 것은 이 2000년대 중반부터 도하 광역권 개조를 위해 남아시아에서 건너온 블루칼라 노동자들이었다.
카타르는 본격적인 도시 개조에 앞서 도시를 알릴 수단을 먼저 마련하였다. 카타르 오픈(테니스). 카타르 마스터즈(골프), 카타르 그랑프리(F1) 같은 월드 투어 스포츠 이벤트나 카타르 국립 박물관, 이슬람 예술 박물관 등 문화 예술을 활용한 국가 브랜딩은 두바이나 아부다비와 크게 다를 바가 없다. 여기에 카타르는 스포츠 메가이벤트로 한 걸음 더 나아갔다. 카타르는 두바이나 아부다비와 달리 2006년 아시안게임을 통해 스포츠 메가이벤트를 개최한 경험을 지니고 있었다.
2006년 아시안게임 개최 이후 카타르는 더 큰 스포츠 메가이벤트로 눈을 돌렸다. 2016년 하계 올림픽 유치에 도전했다가 예비 심사에서 탈락했지만, 이내 2022년 FIFA 월드컵 유치를 발표했다. 카타르는 아시아, 오세아니아, 미주 지역 국가만 입후보할 수 있었던 2022년 대회 유치전에 이름을 올린다. 사실 카타르에서 월드컵이 개최되기에는 여러 문제가 있었다. 50℃를 넘나드는 여름 날씨는 통상적으로 6월 중순에 개최되는 FIFA 월드컵을 치르기에는 부적절했다. 한번도 FIFA 월드컵 본선에 출전한 적이 없을 정도로 축구 산업이 발전하지 못하였고, 그런 곳에 지어질 최소 8개 이상의 대형 경기장은 낭비적인 요소가 다분했다. 그랬기에 경쟁 상대인 호주, 한국, 일본, 미국에 비해 가장 불리한 입장이었다. 특히 1994년 월드컵을 개최한 미국은 경기에 필요한 모든 인프라가 갖춰져 가장 유리한 상태였다. 그런데도 카타르는 FIFA 월드컵 유치에 성공한다. 하지만 이내 카타르의 뇌물 비리가 폭로되었고, 세계는 카타르의 월드컵 유치 의도와 월드컵의 개최 능력을 의심하기 시작했다.
카타르는 자신들이 스포츠에 진심이라는 것과 개최할만한 능력이 있다는 것을 증명해야 했다. 이를 위해 카타르 왕가는 2011년 전 세계에서 가장 인기 있던 축구팀 FC 바르셀로나의 유니폼 스폰서가 됨과 더불어 프랑스 사르코지 정부의 주선으로 축구팀 파리 생제르맹(PSG)을 인수한다. 그러고는 11년간 9회의 우승과 2회의 준우승을 한 강팀으로 만들었다. 무엇보다도 세계 최고의 스타 선수가 모이는 구단을 지향하여 2022년 FIFA 월드컵을 앞두고는 리오넬 메시와 킬리안 음바페를 한 팀에서 경기하도록 만들었다. 그리고 이 둘은 월드컵 결승전의 주인공이 되었고, 또 득점왕과 MVP가 되었다.
그 한편에서 카타르는 FIFA 월드컵을 활용하여 새로운 도시의 모습과 새로운 산업단지의 모습을 전 세계에 광고하기 위한 준비에 들어갔다. 7조 원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진 월드컵 경기장 및 부대시설 비용은 빙산의 일각에 불과했다. 도하-루사일 고속도로, 도하 메트로, 도하 신항만, 하마드 국제공항, 도하 무셰레입 구도심 재생 사업 둥 도하 도심에서 루사일 신도시까지 35km에 이르는 해안의 경관이 월드컵을 앞두고 모두 바뀌었다. 투여된 금액은 무려 평창올림픽의 20배에 가까운 300조 원이었다. 특히, 지식산업을 위한 신도시인 에듀케이션 시티에 경기장을 짓고, 60조 원을 들안 에너지 비즈니스 허브 루사일 신도시에 결승전 경기장을 지어 광고 효과를 극대화하였다.
이 엄청난 프로젝트를 위해 투입된 것은 남아시아 출신의 이민노동자들이었다. 방글라데시, 네팔, 파키스탄 등 주로 남아시아에서 온 이들로 구성된 이민노동자들은 50도를 넘나드는 환경에서의 제대로 된 안전 조치도 없이 장시간 일하면서도 50만 원이 채 되지 않는 저임금에 시달렸다. 이주노동자들의 주거 환경은 열악했고, 임금은 체불되기 일쑤였으며, 고용주의 허가 없이는 일터를 옮길 수도, 출국할 수도 없었고, 산업재해에 대한 보상 역시 미비했다.
이러한 인권침해가 2013년 알려지면서 국제사회의 공분을 샀고, 이듬해부터 카타르는 개선 조치를 수행하였다. 최저임금제도, 임금 정시 지급 의무화, 노동자 안전조치 등이 그것이었다. 카타르 정부는 노동자 도시(Workers City)와 아시안 도시(Asian City)를 조성하고서는 15만의 이주노동자들에게 개선된 주거환경과 레저환경을 공급한다고 선전하였다. 그리고는 무셰레입 도심지구에 노예제 전시관을 만들어 노예제의 유산과 이주민 인권침해는 관계가 없음을 선전하기도 하였다. 이주노동자들의 인권 침해 문제는 일견 상당 부분 개선된 것처럼 보였다.
그럼에도 카타르 월드컵의 도시정치는 이주민을 향한 차별을 지속했다. 특히 남아시아에서 온 블루칼라 남성 노동자들이 타깃이었다. 합리적 가격과 쾌적함을 자랑하는 도하 지하철은 객차를 세 개의 등급으로 나누었고, 이는 블루칼라 남성 이주민들을 분리하는 장치가 되었다. 노동자 도시 구역과 아시안 도시 구역은 매우 높은 대중교통 수요를 지니고 있음에도 월드컵 이후에야 지하철이 닿도록 계획되었다. 지하철을 대신하여 이곳 사람들의 발이 된 것은 도심의 알가님 버스터미널과 이 지역을 이어주는 버스들이었지만, 월드컵을 앞두고 버스터미널은 폐쇄되었다. 버스 정류장에는 번호도 노선도 안내되어있지 않으며, 오직 애플리케이션을 능숙하게 다루는 소수의 사람만이 버스를 탈 수 있다. 도심 내 이주민 거주 구역인 알만수라는 기존 노선과 연결되어 있음에도 지선으로의 별도 환승을 통해서만 접근이 가능하다. 화려한 쇼핑몰들의 가족 및 여성 입장 정책 또한 블루칼라 남성 이주노동자들의 입장을 차단하는 장치로 보이며, 아시안 도시 크리켓경기장의 팬 존(Fan Zone) 역시 이들을 이동을 막으려는 조치로 해석된다. 이 모든 조치들은 국제사회에 카타르를 알릴 도하라는 광고 무대에서 아시아 출신 이주민의 존재를 비가시화하기 위해 차별적 모빌리티를 활용한 도시 정치의 일환이었다.
아시아 메가이벤트의 새로운 시대
그럼에도 2022 카타르 FIFA월드컵은 21세기 최고의 월드컵이라는 평가를 들었다. 월드컵을 통해 두바이와 마찬가지로 개방적이고 서구적이며, 여행하고 거주할만한 도시이자 국가라는 이미지를 구축하는 데 효과를 거둔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이를 바탕으로 카타르는 2023년 아시안컵 축구대회를 유치하였다. 그리고 2030년에는 아시안게임이 예정되어 있다. 지속적으로 스포츠 메가이벤트를 통해 아시아와 국제사회 내에서 인지도를 높이고자 하는 것이다.
두바이부터 시작된 포스트 오일경제로의 전환과 이를 위한 도시 개조, 도시 브랜딩을 위한 메가이벤트의 활용은 이제 사우디아라비아로 전해졌다. 사우디아라비아는 영국의 뉴캐슬 유나이티드 축구팀을 인수하여 엘리트 팀을 만들고 있고, 2034년 아시안게임을 유치하였으며, 2030년 세계엑스포의 유력 후보 중 하나이다. 지속가능한 미래적 모델 도시를 목표로 한 네옴시티 프로젝트 역시 잘 알려져 있는데, 이 네옴시티에서 2029년 동계아시안게임을 개최한다.
그간 아시아에서 메가이벤트를 개최할 수 있는 곳은 동아시아로 여겨졌다. 동아시아 국가들은 냉전 시기 발전주의에 기초하여 국제적 지위의 성장을 추구하고, 올림픽을 통해 국제사회에 자신을 알렸던 바가 있다. 또한 2018 평창올림픽, 2020 도쿄올림픽, 2022 베이징 동계올림픽, 2025 아이치·나고야엑스포 등은 국제 사회 내에서 지위를 확인하고자 하는 욕망이 여전함을 보여주고 있기도 하다.
하지만 이제는 새로운 국면이 형성되고 있다. 중동의 국가들과 도시들이 ‘G2’ 또는 ‘G0’로 불리는 새로운 국제 질서 속에서 빠른 지위의 상승을 추구하며 박람회와 월드컵 등을 통해 국가와 도시 브랜딩에 나서고 있으며, 이를 바탕으로 신산업의 발전을 도모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하여 아시안게임과 세계박람회 등 메가이벤트를 둘러싼 아시아 사이의 경쟁은 이전보다 훨씬 더 치열해졌다.
이 같은 새로운 국면은 아시아 메가이벤트 연구의 중요성을 새삼 일깨워준다. 아시아 메가이벤트들은 아시아를 둘러싼 국제정치를 보여주는 쇼윈도가 되고 있기 때문이다. 아시아를 중시하는 호주와 뉴질랜드의 전략은 2023년 아시안게임 참가로 귀결되었다. 유럽 스포츠 무대에서 퇴출당한 러시아와 벨라루스의 아시안 게임 참가 타진과 이에 대한 중동 국가들의 수용 분위기는 G2 혹은 G0 시대 국제 정치의 현실을 보여주고 있다. 아시아 메가이벤트의 도시정치 또한 연구할 가치가 충분하다. 카타르 월드컵이 보여주듯 메가이벤트를 활용한 국가·도시 브랜딩 전략과 다양한 도시 개조 프로젝트들은 오랜 시간 그곳에서 거주한 이들만 아니라 아시아의 이곳저곳에서 모여든 이주민들의 삶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메가이벤트가 도시에 거주하는 아시아인들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가를 연구함으로써 우리는 아시아 도시의 미래만 아니라 아시아인의 연대를 위한 기초를 마련할 수 있을 것이다.
* 이 글의 내용은 아시아연구소나 서울대의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Tag: 메가이벤트,2022FIFA월드컵,카타르,두바이,아부다비,아시안게임
이 글과 관련된 최신 자료
- 강문수·유광호·이지은 (2022) 『카타르의 지속가능한 성장 기반 구축 전략과 협력 시사점』. 대외경제정책연구원.
- 김강석 (2018). 「아랍에미리트의 미래비전과 경제다각화 전략: 신재생에너지, 관광 문화지구, 우주항공 산업을 중심으로」. 『걸프 3개국 비전 2090의 현안 및 쟁점』. GCC국가연구소.
- 엄익란 (2020). 「걸프국가 소프트파워 구축전략과 한계 연구」. 『한국중동학회논총』 41(1), 67-94.
- 이화준·박인보 (2019). 「국가정체성과 라이벌리: 아부다비와 카타르를 중심으로」. 『중동연구』 37(3), 107-136.
- Sayeed S. Mohammed (2014). “Right to Development of Non-Qatari Citizens,” Background paper for Human Development Report, Ministry of Development Planning Qatar.
저자소개
박해남(parkhn2@snu.ac.kr)
현) 서울대학교 아시아연구소 HK연구교수
주요 논문
“동북아시아 메가이벤트와 지역 (불)균형 발전: ’70 일본만국박람회와 ’93 대전세계박람회를 중심으로” 『지역사회연구』 30(1), 2022.
“서울올림픽과 도시개조의 유산: 인정경관과 낙인경관의 탄생” 『문화와사회』 27(2), 2019.
“Nationalism and the Representation of National Sport Heroes in 1990s South Korea”(ed.) Journal of Asian Sociology 50(3). 20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