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일보] ⑧ “이제는 아시아 시대” – 서울대 아시아연구소 기획 ⑧ 경제통합 현장, 아세안 가다
중국 → 아세안 … ‘세계의 공장’ 임무교대
[중앙일보] 입력 2013.10.29 01:42 / 수정 2013.10.29 09:16
중앙일보-서울대 아시아연구소 기획
⑧ 경제통합 현장, 아세안 가다
재봉틀은 쉼 없이 돌아갔다. 근로자들의 손놀림이 분주했다. 베트남 수도 하노이에서 남동쪽으로 90㎞ 정도 떨어진 흥옌성. 의류 임가공 업체 푸훙엔 종업원이 300여 명 근무하고 있다. 공장은 한국 기업을 비롯한 해외 글로벌 기업들의 발주 물량을 제때 처리하기 위해 바빠 보였다.
응우옌 공장장은 “외국 기업들의 눈이 워낙 높아 불량품을 최소화하기 위해 각별히 신경 쓴다”고 말했다. 푸훙 같은 중소기업들은 동남아국가연합(아세안:싱가포르?인도네시아?말레이시아?태국?베트남?브루나이?필리핀?라오스?미얀마?캄보디아)의 경제적 부상이란 새로운 흐름을 만들어낸 숨은 주역이다.
외국투자, 중국 줄어들 때 25%↑
중앙일보와 서울대 아시아연구소 공동취재단은 요즘 가장 역동적인 세계 경제의 현장으로 꼽히고 있는 아세안 국가 중에서 베트남?인도네시아 현지를 지난달 취재했다. 인구 2억5000만 명인 인도네시아와 9200만 명인 베트남은 브릭스(BRICS:브라질?러시아?인도?중국?남아공)에 이은 새로운 신흥시장으로 떠오르고 있다.
아세안이 글로벌 생산 거점으로 뜨고 있다는 사실은 외국인직접투자(FDI)에서도 확인된다. 유엔 무역개발협의회(UNCTAD) 통계에 따르면 아세안 10개 회원국의 지난해 FDI 유입액은 전년보다 25.7% 증가했다. 2008년 이후 증가세를 이어가고 있다. 반면 중국의 FDI 규모는 전년보다 3.7% 줄었다. 중국의 FDI 유입액이 감소한 건 3년 만이다.
현지에서 만난 젊은이들은 경제성장에 따라 취업의 기회가 넓어지고 있음을 실감하고 있었다. 자카르타에서 만난 인도네시아국립대 경영학도 딜라(21)는 “다국적기업들이 인도네시아에 속속 뿌리내리면서 양질의 일자리가 많아지고 있다”며 “대졸 취업 준비생 사이에서는 봉급이 많고 복리후생이 좋은 직장에 취직하기 위한 외국어 능력?학점 등 스펙 경쟁이 한창”이라고 전했다. 사회주의 문화가 뿌리 깊은 베트남에도 변화의 바람이 거세다. 한국계 기업에서 중간 관리자급으로 일하고 있는 딘홍(37)은 “문화 배경이 다른 외국계 기업들이 많이 들어오면서 베트남 사회도 실력으로 인정받으려는 경쟁문화가 점차 확산되고 있다”고 말했다.
흔히 19세기는 유럽, 20세기는 미국, 21세기는 아시아 세기라고 한다. 실제로 아시아의 제조업 중심은 일본을 시작으로 한국을 거쳐 중국으로 이동했다. 여기서 멈추지 않고 최근엔 아세안으로 이동 중이다. 특히 지난 10년간 중국의 평균임금이 가파르게 오르면서 아세안은 중국이 고수해온 ‘세계의 공장’ 자리를 위협할 기세다. 미얀마에 진출한 건홍리서치 모영주 대표는 “중국에 진출한 제조업체들이 베트남?인도네시아?미얀마로 공장을 이전하고 있다”고 했다.
아세안은 2015년을 목표로 ‘아세안 경제공동체(AEC)’ 창설이란 야심 찬 비전을 세운 상태다. 아세안 10개국의 단일 생산기지와 물류시스템을 구축해 세계 경제의 주요 공급지로서 공정하고 균형 잡힌 아세안 시장을 만든다는 것이 목표다.
역내 관세 줄여 경제공동체 추진
지난달 13일 인도네시아 자카르타 서쪽 근교에 위치한 한국 투자기업 K사의 생산 라인에서 여성 노동자들이 운동화를 만들고 있다. [자카르타=홍상지 기자]
AEC 창설 움직임은 한국?중국?일본?인도?호주?뉴질랜드 등 모두 16개국으로 구성된 지역경제협력체인 ‘역내 포괄적 경제동반자협정(RCEP)’과 미국이 주도하는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 등 지역 내 경제 통합 흐름에도 상당한 영향을 끼치고 있다. 특히 아세안은 RCEP와의 협상 과정에서 아세안이 중심적 위치를 유지하겠다고 목소리를 키우고 있다.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에 있는 아세안사무국 수바시 경제통합국장은 “아세안은 2009년부터 역내 수입품 관세를 점진적으로 축소하고 산업 규격을 표준화하는 등 경제 통합의 발판을 만들어왔고 이미 목표의 77%를 달성했다”고 밝혔다.
물론 아직 과제는 많다. 가장 큰 과제는 아세안 국가 사이에 존재하는 격차를 어떻게 해소하느냐다. 아세안 10개국 중에서 약체국으로 분류되는 캄보디아?라오스?미얀마 등과 다른 앞선 회원국들의 경제발전 수준은 현격한 차이를 보인다. 세계경제포럼(WEF)이 발표한 ‘2013~2014 글로벌 경쟁력 지수’를 보면 싱가포르는 148개국 중 2위지만 미얀마는 139위로 최하위권이다. 수바시 국장은 “회원국 간 격차가 존재하는 건 사실이지만 각자 강점이 달라 그만큼 경제 통합의 시너지 효과가 더 클 수 있다”고 주장했다. 아시아개발은행(ADB)은 아세안 경제 통합 이후 2030년이 되면 회원국의 평균 1인당 실질국내총생산(GDP)이 1만 달러에 달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국가 간 격차 해소가 최대 과제
글로벌 기업을 바라보는 일부 현지인의 부정적 시각도 해결해야 할 과제다. KOTRA 이경석 자카르타 무역관 차장은 “현지인들 사이에선 ‘세계 각지 기업이 워낙 많이 들어와 정작 토종 기업들이 기를 못 펴는 것 아니냐’는 우려의 시선이 있다”고 전했다. 그러나 이선진 전 인도네시아 대사는 “라오스 등 과거 아세안 통합에 매우 소극적이던 나라까지 아세안 경제공동체 창설에 적극 호응해 고무적”이라고 말했다.
아시아 시대를 맞아 아세안의 경제적?전략적 가치는 앞으로 더욱 높은 평가를 받을 전망이다. 박근혜 대통령도 지난달 베트남 방문에 이어 아세안 관련 회의에 참석하고, 인도네시아를 국빈 방문하면서 아세안 외교에 공을 들였다.
아세안과의 대화 상대국 지위를 인정받은 10개국 중에서 한국은 네 번째로 지난해 10월 자카르타에 아세안대표부를 신설했다. 백성택 주 아세안대표부 대사는 “아세안 경제 통합의 성공은 아시아 전체의 경제 통합과 일맥상통한다”며 “한국도 그 흐름 속에서 아세안과 긴밀한 협력체제를 구축해 국익을 키워나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공동취재팀(인도네시아?베트남)=표학길 서울대 경제학부 명예교수, 엄은희 서울대 아시아연구소 연구원, 홍상지 기자
“2015년 경제통합 땐, 세계서 가장 매력 있는 시장”
[중앙일보] 입력 2013.10.29 01:42 / 수정 2013.10.29 09:17
인도네시아 재계 20위 오른 코린도그룹 승은호 회장
아세안 경제 통합 과정에서도 임금 인상 문제는 화두로 떠오를 전망이다. 1969년 인도네시아에 진출해 44년간 기업 활동을 해온 코린도그룹 승은호(71?사진) 회장은 현지에서 불고 있는 변화를 누구보다 실감하고 있다. 코린도그룹은 인도네시아 재계 20위 안에 드는 한인 기업이다. 합판?제지?팜오일?물류 등 다양한 분야에 진출해 있다.
- 최근 인도네시아 현지 분위기는.
“내년에 총선과 대선이 치러진다. 노동계 단체들은 최저임금을 지금보다 50% 인상하자고 주장하고 있다.”
– 기업들의 우려가 클 듯한데.
“신발?섬유 등 노동집약형 기업들이 특히 더하다. 하지만 임금 인상은 아세안의 경제성장 속도로 봤을 때 필연적일 수밖에 없다. 기업들이 받아들여야 한다.”
- 아세안 이 여전히 매력인 이유는.
“인도네시아만 봐도 2억5000만 명의 인구 대국이다. 풍부한 인적 자원을 기반으로 한 내수시장의 잠재력이 크다. 천연자원도 풍부해 성장 전망이 밝다. 2015년 아세안 경제 통합까지 성사되면 전체 아세안 시장의 매력은 더 커질 것이다.”
– 40여 년간 아세안 변화를 봤는데.
“아세안 역내 교역이 눈에 띄게 활발해졌다. 태국에서 A제품을 생산해 인도네시아에 들여와 팔고, 인도네시아에서 생산한 B제품을 말레이시아에서 팔기도 한다. 경제 통합을 앞두고 역내 관세를 대폭 축소하고 있어 혜택을 톡톡히 보고 있다. 아세안에선 생산라인을 굳이 한 나라에 다 갖출 필요가 없어졌다.”
- 아세안 진출 기업들에 조언 한다면.
“40여 년간 성공도, 실패도 모두 해 봤다. 결론은 ‘이 나라에 없어선 안 될 사업을 하라’는 것이다. 지금은 인도네시아의 거대한 인구 규모와 비옥한 토지를 바탕으로 한 농업 분야 투자를 검토하고 있다. 아세안 역내 어느 나라에 진출하든 현지화가 제일 중요하다. 해외 진출기업이 현지에서 성공하려면 그 사회와 다방면으로 스킨십을 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
◆공동취재팀(인도네시아?베트남)=표학길 서울대 경제학부 명예교수, 엄은희 서울대 아시아연구소 연구원, 홍상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