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향신문] [한·중 지식인 ‘중국을 말하다’]“중국 혁명은 사회주의가 아닌 민족자본주의 건설이었다”
[한·중 지식인 ‘중국을 말하다’]“중국 혁명은 사회주의가 아닌 민족자본주의 건설이었다”
ㆍ원톄쥔 중국 인민대학 교수 – 유시민 전 보건복지부 장관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주요 2개국(G2)으로 부상한 중국의 일거수일투족은 세계의 주목 대상이다. 그러나 빈부 격차, 부정부패 등 성장의 그늘도 깊다. 오늘의 중국은 어떻게 형성되었으며, 어디로 가는 것일까. 경향신문은 서울대 아시아연구소(소장 강명구)와 함께 원톄쥔(溫鐵軍·62) 중국 인민대학 교수와 유시민 전 보건복지부 장관(54)을 초청해 ‘한·중 지식인 대담-중국을 말하다’를 기획했다. 중국의 가장 주목받는 지식인으로 꼽히는 원 교수는 저작선집 <백년의 급진: 중국의 현대를 성찰하다>(돌베개)의 국내 출간에 맞춰 지난 15일 방한했다. 그는 중국의 ‘삼농(三農, 농민·농업·농촌)’ 문제 최고 권위자이자 중국 공산당의 정책 입안가로 명성이 높다. 대담은 지난 18일 경기 파주 출판단지 돌베개 사무실에서 진행됐다. 두 사람은 4시간 가까이 진행된 이날 대담에서 중국 현대사에 관한 인식 문제, 마르크시즘, 중국 공산당의 미래, 남북한 등 동아시아 문제 등에 대해 심도깊은 대화를 나눴다. 분위기는 시종 뜨거우면서도 화기애애했다. 유 전 장관은 중국 현대사에 대한 종전의 해석과 전혀 다른 원 교수의 깊은 식견과 안목에 감탄하고, 원 교수는 몇 차례나 엄지손가락을 치켜 들며 유 전 장관의 사유에 놀라움을 표시했다. 대담의 통역은 이정훈 서울대 중문과 교수가 맡았다.
원톄쥔 교수(왼쪽)와 유시민 전 장관이 지난 18일 돌베개 출판사가 입주해 있는 경기 파주 출판단지에서 중국 혁명과 중국 공산당의 미래, 남북한 문제 등을 주제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 서성일 기자
▲ 공산당 따르는 추진 세력 부르주아가 압도적 많아
서구의 혁명 경험 기반한 마르크시즘으론 설명 불가
▲ 한국 생산능력 과잉시대… 자본의 ‘북향정책’ 펼치고
한반도 평화와 통일 문제 한·중 지식인들 토론 필요
유시민 전 보건복지부 장관(이하 유시민)=선생님의 저작선집 <백년의 급진> 덕분에 제가 오랜만에 강한 지적 긴장을 느꼈다. 책을 읽으면서 “조사연구하지 않는 자, 발언하지 말라”는 마오쩌둥의 어록 한 구절이 떠올랐다. 저와 같은 세대에 속하는 한국 지식인들에게 중국에 대한 인식은 주로 다음 세 가지 경로를 통해서 형성되었다. 중국의 공산혁명 과정을 기록한 미국 언론인 에드가 스노의 <중국의 붉은 별>이 그 첫 번째이고, 주류 매체와 전혀 다르게 중국을 말한 고 리영희 선생의 <8억인과의 대화>가 두 번째이며, 1980년대 이후 중국의 고도성장에 대해 미디어가 제공한 많은 정보들이 세 번째이다. 그런데 선생님의 책을 읽으면서 중국에 대한 저의 기존 인식을 재점검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 ‘친자본적’ 개혁·개방 추진
원톄쥔 교수(이하 원톄쥔)=1980년대 이후 중국 경제발전에 대한 한국과 해외 언론의 보도는 당시 중국의 발전에 대한 주류 이데올로기를 반영했을 것이다. 제 관점에서 이른바 주류이데올로기는 다음의 두 가지를 포괄한다. 첫째는 자본주의화를 거리낌 없이 표방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전자의 입장에 대항하여 과거 개혁개방 이전 시기의 체제를 고수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전자는 물론 후자 또한 그 본질에서 친자본적 입장에 속한다는 것이 제 생각이다. 전자가 친서구적 태도, 즉 해외자본의 이익을 대변한다면, 후자는 과거에 국가가 주도한 자본 축적 과정에서 독점적 지위를 확보한 국유기업 대자본의 이익을 대변하는 것에 불과하다. 결국 서로 다른 방향에서, 각기 다른 성격을 가진 자본의 축적과 확장에 유리한 조건을 확보하고자 하는 목소리를 대변하는 것에 불과하다. 중국 외부에서 80년대 이후 매체의 보도를 통해 중국의 내부 상황을 이해하려는 시도가 곤란에 처하는 것은, 개혁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주류의 목소리가 갖는 근본적인 한계로 인한 중국의 이런 난맥상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유시민=대학에 다니던 시절 마오쩌둥의 <신민주주의론>을 일본어판으로 접했던 경험이 있다. 원 선생은 책에서 “당시 중국혁명이 추구한 바는 공산당 영도 하의 민족자본주의 발전”라고 한 마오 주석의 말을 인용하면서, “사회주의를 표방했던 중국혁명의 정치적 목표는 결국 민족자본주의 건설”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중국이 공산당 영도 하에 건설한 것은 국가자본주의 또는 민족자본주의에 불과하다는 주장인 셈인데, 이는 마르크스주의적 역사관에서 완전히 벗어난 것이 아닌가. 만약 정말 이런 입장을 취하신다면, 혁명을 통해 중국이 이룬 것이 결국은 사회주의가 아니었다는 파격적 주장이다.
원톄쥔=문제의 핵심을 지적하셨다. 중화인민공화국의 국기인 오성홍기를 보면 가운데 큰 별은 공산당의 영도를 상징하고, 그 주위를 둘러싼 네 개의 작은 별은 각각 노동자, 농민, 도시소자산계급, 민족자본가계급을 상징한다. 공산당의 영도를 따르는 네 개의 세력 가운데 절반이 부르주아(민족자본가)와 프티부르주아(도시소자산계급) 계급이다. 농민 또한 프티부르주아계급으로 분류된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중국혁명은 계급구성상 부르주아와 프티부르주아 계급의 압도적 비중 하에 진행된 것이다. 이런 형태의 혁명은 서구의 혁명 경험에 기초한 마르크시즘에 입각한 설명으로는 좀처럼 이해되기 어려운 사건이다.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전후 실시된 토지개혁을 통해, 기존에 농촌 인구의 88.8%를 차지하던 하층농민마저도 자기 땅을 소유하게 되었다. 마오쩌둥은 1949년 건국 당시부터 중국 공산당 지도부를 향해, 중화인민공화국의 운명은 소자산계급(농민)의 망망한 바다 위에 떠있는 배와 같은 상황이라는 점을 줄곧 강조했다. 중국공산당과 정부가 외부를 향해 공개적으로 자신을 프티부르주아국가로 자처하지는 않았지만, 이것이야말로 중국이 실제로 처해있는 상황이었다. 에드가 스노처럼 중국에 대한 이해가 깊은 서구의 언론인이나 학자라고 해도 이런 내부적인 딜레마를 외부에 설명하고 전달하기는 쉽지 않았으리라고 본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이른바 제3세계 국가들은 전반적으로 민족자본주의 건설을 지향했다. 중국 또한 제3세계에 속하는 국가로서 이런 세계사적 흐름에 역행할 수 없었다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 스탈린의 중국혁명에 대한 규정처럼, 중국은 확실히 공산당 영도 하에 민족자본주의를 건설했고, 이는 사회주의적 토대를 완성하는 것이 원천적으로 불가능한 사회주의혁명이라는 근원적 딜레마에 놓여 있었다. 1949년 건국 당시에는 국민의 90% 이상이 프티부르주아에 속하는 상황이어서, 사회주의를 가능하게 하는 물적 토대가 매우 빈약했다. 반면 현재의 중국은 전체 생산성 자산의 70%가 국가소유(국영기업 등)이고, 금융자산의 70% 역시 국유은행에 의해 통제되고 있다. 건국 초기와 비교하면 물적 조건의 측면에서는 지금이야말로 사회주의의 토대가 만들어진 셈이다.
유시민=제가 <백년의 급진>을 보면서 놀란 점은 중국현대사의 시대구분에 대한 독특한 관점이다. 원 선생은 급진의 ‘백년’을 민국혁명이 일어난 1911년부터 2011년까지로 잡고, 이 시기 중국이 당면했던 핵심 과제가 농업중심 사회에서 공업화로 나아가기 위해 필요한 자본의 원시적 축적이라고 규정하셨다. 그리고 중국은 1998년 이래 산업자본, 금융자본, 상업자본의 3대 과잉에 처해 있는 상황이므로, 국가의 전반적 정책노선이 친자본에서 친민생으로 전환하지 않을 수 없다고 보셨고, 발전의 의미 또한 단순한 GDP 수치의 확대가 아니라 생태와 지속가능성을 중시하는 포용적 성장으로 바꾸어 가야할 시기가 도래했으며,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다는 점을 강조하셨다. 이는 우리가 그동안 상식적으로 받아들여 온 중국 현대사에 대한 이해와는 전혀 다른 시각이다. 아마도 이러한 서술의 프레임을 이해하면 놀라워할 한국 독자들이 많을 것이다. 그리고 어떤 의미에서는 중국을 경계의 눈으로 바라보곤 하는 한국 독자들의 시각도 한층 푸근해지지 않을까 생각한다. 많은 한국인들에게는 우리가 과거에 겪은 바 있듯이, 강대해진 중국 중심의 질서 속에서 한반도의 지위가 종속적 위상으로 격하되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불안감이 있기 때문이다.
원톄쥔=저는 1911년 신해혁명 이후 백년의 시간 동안 중국을 이끌어온 사람들이 피할 수 없었던 역사적 임무를, 산업자본과 상업자본과 금융자본이라는 이른바 3대 자본의 극단적 결핍 속에서 자본을 내재적으로 형성해 내기 위한 조건을 마련하는 것, 즉 원시적 축적 과정의 수행이라고 책에서 설명했다. 저는 그 가운데 특히 산업자본의 형성 및 그것이 과잉에 이르는 과정에 주목했는데, 산업자본의 과잉 문제, 즉 생산능력의 과잉에 대한 중국 공산당 지도부의 자각은 1998년 금융위기를 전후해 처음 나타났다. 생산능력의 과잉 자체는 처음 발견한 현상이 아니다. 서구에서는 특히 1929년부터 1933년 사이 대공황을 통해 이 문제가 표면화되었고, 엄청난 후폭풍을 몰고 왔다. 생산과잉이 낳은 위기가 결국 세계대전으로 비화되어, 전쟁을 통해 생산능력을 인위적으로 파괴하는 방법을 취했을 뿐 아니라, 그 과정에서 인간 또는 인간성 자체까지 파괴되는 결과를 빚었다.
그런데 중국은 1998년 금융 위기 전후로 생산과잉 문제가 나타났을 때, 과거 백 년 동안의 국가주도적 자본형성(사회주의 시기 국가자본주의적 방식의 원시적 축적 및 개혁개방 이후 급속한 시장자본주의화를 모두 포함하는) 과정에서 나타난 3대 차별과 모순을 조정하기 위해 소외되고 낙후된 지역에 대한 인프라 투자를 강화함으로써 생산능력 과잉을 해소하는 방향으로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다. 20세기까지 서구가 걸어온 침략과 전쟁이라는 노선은, 그 경제적 토대나 그로 인해 초래된 사회적 모순과 무관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크게 보면 서구 자신이 직면한 물적 토대의 재생산 위기를 해결하는 과정이었으며, 한 마디로 말하자면 자본의 내재적 모순을 침략과 전쟁을 통해 해결해온 과정이었다. 그러나 서구와 유사한 생산과잉의 위기에 처한 상황에서 중국은, 자본 유입을 통해 먼저 성장한 연해지역과 자본 유입이 지체되어 저성장 국면에 처한 내륙지역 사이의 지역격차를 해결하기 위해 내륙지역에 대한 사회간접자본 투자를 강화함으로써 과잉자본을 해소하는 전략을 채택했다. 지역 간 격차해소를 위한 인프라 투자가 첫 번째 단계의 전략이었던 셈이다. 최근 3~5년 동안 실시된 두 번째 단계의 전략은, 농촌에 이른바 ‘5통(五通: 도로, 전기, 통신, 수도, 인터넷의 개통)’에 필요한 기초인프라 투자를 함으로써 생산과잉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다. 지금부터는 이전 두 단계에 이어서, 더욱 어려운 문제인 빈부 격차 해소라는 문제의 해결에 필요한 묘안을 찾아내야 하는데, 이는 중국공산당 새 지도부의 핵심 과제이기도 하다. 이를 어떻게 해결하는지 관심을 갖고 지켜볼 필요가 있다.
특히 주시할 점은 중국이 자본과잉 해소를 위해 선택한 자본이동의 큰 방향인데, 간단히 말하면 지금까지는 서향(西向)전략, 즉 서쪽을 향해, 내륙을 향해 나아가는 전략이 선택되었다. 자본주의 역사에서 서양은 대개 패권 국가들이 해양 패권 경쟁을 통해 해외 식민지를 확대하는 방식으로, 즉 해양을 향해, 밖을 향해 나아가는 것으로 문제해결을 도모한 반면, 중국은 내부를 향해 들어가는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하려 한다는 결정적 차이가 존재한다. 이는 전략의 방향을 어디로 택하는가에 따라 완전히 다른 문제해결 방식이 존재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유시민=독자들의 편의를 위해 원 선생의 말씀을 좀 정리해 보자. 원 선생의 말씀인즉슨, 중국의 산업화 과정은 중화민국 시기의 신해혁명(1911)에서 이른바 신중국 건설(1949년 사회주의혁명)을 포함하는 백 년 동안 농업사회에서 사회주의 단계로 나아가는 데 필요한 자본의 원시적 축적을 수행했는데, 그 방법을 보면 서구가 토지에 대한 중세적 특권 폐지와 해외로부터의 수탈 및 노동자계급에 대한 착취라는 세 가지 계기를 통해 이를 수행한 반면, 중국은 애초부터 밖으로 나가서 수탈하는 길이 막혀 있었기 때문에 내부에서 원시적 축적 과정을 진행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또 그 과정에서 농민들, 이른바 지식청년을 포함해서 농촌으로 하방된 도시 청년과 같은 이들 수 억 명의 어마어마한 희생이 있었고, 그 노력으로 이루어진 성과를 자본화시킨 것이 사회주의시기에 만들어진 국유기업이며, 마오 시기의 사회주의 건설이란 결국 이를 기초로 해서 추구한 국가자본주의의 건설 과정이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80년대 이후 이른바 개혁개방은, 동부 연해지역을 중심으로 해외자본을 들여오면서 기존의 국유자본 이외에 사영(민간)자본과 외국자본이 함께 존재하게 되는 상황을 가리킨다는 것이다. 이런 상황은 확실히 한국의 자본주의 발전경험과는 다른 점이 있는데, 저는 개인적으로 원 선생의 설명이 매우 설득력이 있다고 생각했다. 좀 전에 말씀하신 생산과잉, 자본과잉의 위기가 왔을 때 어떻게 대응하느냐의 문제에서, 유럽 각국은 그 규모 때문에 내부에서의 확장이나 위기 전가가 어려우므로 해외로의 확장을 추구한 반면, 중국은 넓은 땅과 많은 인구를 이용해 내부에서 착취를 진행하는 한편, 새로운 투자처를 만들어 냄으로써 생산과잉의 위기를 해결해왔다고 저는 이해했다. 아무래도 동의할 수밖에 없는 설명이다.
원 선생께서는 자본의 원시적 축적, 산업예비군, 과잉생산 및 그로 인해 초래된 공황, 금융자본의 지배 등과 같은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의 이론 틀 위에서 환율, 재정, 외환, 경상수지, 물가동향, 통화량 변화, 협상가격차 등 서구 주류경제학의 분석개념을 폭넓게 활용하신다. 그런데 우리가 아는 마르크스주의는 혁명이론으로서의 측면과 자본주의 경제에 대한 분석도구 또는 비판이론이라는 두 가지 측면이 있는데, 원 선생의 책을 읽다보면 마르크스주의를 혁명의 정치이론으로서보다는 자본주의체제에 대한 분석도구로서 활용하는 측면이 두드러진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면 혁명이론으로서의 마르크시즘에 대해서는 어떻게 보시는지, 그리고 향후 중국의 상황 전개 또는 사회발전 방향에 대해서 혁명이론으로서의 마르크시즘 또는 공산주의와 연관지어 살펴볼 가능성이 여전히 남아있다고 보시는지가 궁금하다.
원톄쥔=또 한 번 핵심적인 문제를 지적하셨다. 40여 개국을 돌아다니며 진보진영의 많은 학자들을 만나봤지만, 유시민선생이 방금 지적하신 것처럼 개발도상국의 실제 경험 속에서 이론과 실천이 어떤 방식으로 결합되는지를 문제 삼는 경우는 이번이 처음이 아닌가 싶다. 제 생각을 말씀드리자면, 마르크스주의는 서구중심주의적 사유체계로서 다른 서구 발(發) 이론들과 마찬가지의 한계를 갖지만, 중심부인 서구만이 아니라 주변부인 제3세계 지역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보편적인 적용가능성을 지니는 이론이라는 점에서 의의를 갖는다고 본다. 마르크시즘은 모건(Lewis Henry Morgan)의 고대사회론과 다윈주의의 진화론이라는 두 개의 뿌리를 가지는 이론이다. 서구의 역사적 경험에 대한 이론화 작업의 직접적 계승자라는 의미이다. 마르크스 또한 자신의 이론이 적용될 수 있는 범위는 유럽과 근동까지이며 그 너머의 ‘머나먼 동방’에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작동하는 사회체제가 존재함을 인정했다. 이른바 ‘아시아적 생산양식’이란 그런 미지의 것을 지칭하는 모호한 기표였을 것이다.
유시민=저희도 1970년대에 아시아적 생산양식에 대해 열심히 공부하고 논쟁했던 기억이 있다.
원톄쥔=중국에서는 아시아적 생산양식에 관한 토론이 가장 활발했던 시대가 1930년대였다. 당시 이른바 정통 사회주의가 주류를 형성한 가운데, 이론계에서 아시아적 생산양식의 특수성을 강조하는 입장은 이른바 트로츠키주의자라는 딱지가 붙어서 점차 배제되어 갔다. 아시아적 생산양식론은 아시아의 역사적 경험과 조건이 서구의 그것과는 다른 독자성을 가진다는 민감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점이 계승되지 못한 것은 굉장히 아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저는 마르크시즘의 유물사관이 동양의 역사발전 단계에 대한 설명에서 근본적인 한계를 가지는 것으로 본다. 이른바 역사적 유물론에 기초한 역사발전의 다섯 단계 가운데, 근대 이전의 아시아에는 노예제사회와 서양 중세식의 봉건사회, 그리고 자본주의의 단계가 존재하지 않았다. 이는 유물사관으로 중국을 포함한 아시아의 역사를 해석하기 어려운 구조적인 원인이다. 사실 서구의 근대를 연 르네상스(문예부흥)가 지향했던 고대 그리스로마라는 이상향은 그 경제적 토대를 살펴보면 10%의 자유민이 90%의 노예를 지배하는 노예제 생산양식에 근거한 것이었다. 역설적이게도, 근대를 향한 정신적 지향이 노예제라는 물적 토대에 뿌리를 두고 있었고, 이는 현실 속에서 근대적 정신을 갖춘 서양인들이 지구의 나머지 지역을 노예화하는 과정을 통해, 전지구적 차원에서 상부구조와 물적 토대가 서로 조응해 가는 결과로 이어졌다. 우리가 근대성이라는 범주를 의심스런 눈으로 보게 되는 것, 그리고 그 속에 숨겨진 서구중심주의를 문제 삼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서구의 자본주의는 그 형성 과정을 살펴 볼 때, 나중에 동양에 도입되어 뿌리를 내린 자본주의와는 그 연원을 달리한다. 서양의 종족주의 또는 비 서구에 대한 배제를 본질로 하는 서구 우월주의는 노예제에 뿌리를 둔 특수한 서구적 심태에서 연면히 이어진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서구의 역사 속에서 노예제 생산양식은 긴 시간 동안 나름의 방식으로 정교하게 발전해왔으므로, 자본주의라는 새로운 단계를 맞아 그것이 또 다른 형태로 변화되어 전세계로 확장된 것도 충분히 이해가 가는 일이다. 그에 반해 동양은 수천 년 동안 노예제와는 다른 방식으로 발전해왔기 때문에, 산업자본 형성을 위한 원시적 축적 과정 또한 서구와는 다를 수밖에 없었다. 이런 역사발전 경험의 차이 때문에, 나는 마르크시즘적인 분석틀은 견지하면서도 그것이 태생적으로 어쩔 수 없이 갖게 되는 더 깊은 서구중심적 본질까지 통으로 받아들이는 태도는 경계하고자 한다. 이는 주류경제학의 여러 분석도구들을 가져다 쓰면서도 그것의 이론적 전제를 모두 승인하지는 않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하겠다. 그런 의미에서 제 입장은, 마르크스주의의 이론적 의의 및 분석도구로서의 유용성을 충분히 긍정하면서도, 마르크스주의의 서구중심주의적 한계까지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는 것은 참된 마르크스주의의 원칙에서 벗어나는 것이라고 보는 쪽에 가깝다.
유시민=방금 하신 설명에서 제가 여쭌 문제에 대한 결론을 유추해 보자면, 우리가 중국의 미래를 예측할 때 이미 낡은 마르크스주의 또는 교조적으로 이념화된 공산주의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할 필요는 없다고 보시는 입장으로 이해해도 되나.
원톄쥔=그렇다. 마르크시즘이 갖는 두 가지 핵심적 의의 즉, 자본주의 대한 비판 및 분석도구로서의 의의는 함부로 버릴 수 없으며, 언제나 사회적 약자의 편에 서고자 하는 마르크스주의의 가장 기본적 태도도 결코 버릴 수 없다. 그러나 그것이 태생적으로 갖는 서구중심주의적인 본질에 대해서는 단호할 필요가 있다.
유시민=덩샤오핑 시대에 중국 경제관료들이 한국의 사례를 깊게 연구했다는 소문을 많이 들었다. 이것이 사실인지 묻고 싶다.
원톄쥔=한국의 경제발전 경험은 뎡샤오핑 시대 뿐 아니라 지금까지도 중국의 정책결정 과정에서 매우 주의 깊게 연구되는 대상이다. 예컨대 1998년 아시아 금융위기 당시 한국은 비록 희생양이 되기는 했지만, 다른 아시아 국가에 비하면 충격이 가장 작았고, 회복 속도도 가장 빨랐다. 또 한국과 같은 크지 않은 경제규모를 가진 나라에서 다른 아시아 국가에서 찾아볼 수 없는 균형적인 산업구조를 어떻게 형성할 수 있었는가 하는 문제도 관심의 대상이다. 홍콩이나 대만, 말레이시아, 필리핀 역시 한때 고성장을 경험한 나라지만 이들은 고성장의 열매를 인프라 구축에 투자하고 이를 통해 균형적인 산업체계를 만드는 데는 실패했다. 그런데 한국은 어떻게 여러 차례의 위기에도 불구하고 빠르게 회복될 수 있었는지 중요한 연구대상임에 틀림없다.
■ 한·중 ‘독재 개발’로 자본 축적 비슷
유시민=원 선생의 프레임으로 보자면, 한국의 경우는 박정희 시대에 본격적으로 자본의 원시적 축적이 이루어졌다. 밖에서 외자를 들여온 것도 그렇고, 내부에서 창출한 것도 그렇고. 월트 로스토우라는 미국 학자가 말하는 이른바 국민경제의 이륙을 위한 선행조건의 충족이 중국은 공산당 영도하의 공업화 과정에서 이루어졌고, 한국은 한국적 민주주의를 내건 박정희 대통령의 1인 독재체제에서 이루어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런데 서로 다른 이념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경제발전의 단계에 주목해 보면 결국 서로 간에 별 차이가 없는 것 아닌가하는 생각이 든다. 원 선생은 이점을 어떻게 보시는지, 또 한국의 박정희시대에 이루어진 경제적 변화에 대해서는 어떻게 평가하는지 궁금하다.
원톄쥔=1970년대에 박정희의 경제개발이 한창 진행되던 당시, 중국에서도 박정희의 경제개발을 지켜보면서 이에 대해 큰 관심을 가지고 활발한 토론을 전개했다. 자본의 원시적 축적이 완성된 것은 마오쩌둥 시대였고, 덩샤오핑 시대에 들어선 이후에는 산업 확장이 일어났다. 외향적 확장이 제한적일 수밖에 없는 신흥국가의 자본주의화 과정에는 유사한 내부적 수탈 단계가 존재할 수밖에 없다. 후발 공업국이었던 독일은 빌헬름황제와 비스마르크의 철혈정책이라는 원시적 축적 단계를 거쳤고, 같은 입장이었던 일본도 군국주의라는 유사한 과정을 거쳤다. 어떤 이데올로기를 채택하더라도 상부구조는 물적 하부구조의 요구를 반영하지 않을 수 없는 셈이다. 원시적 축적과정이 완성된 후에야 비로소 정치적 상부구조의 탈집중화가 진행된다. 한국은 박정희부터 전두환 집권기까지를 피비린내 나는 폭력적 중앙집권을 통한 원시적 축적의 진행과정으로 볼 수 있으며, 김영삼 이후를 탈집중화 과정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일본 역시 60년대 학생운동 등의 폭발에서 탈집중화 과정을 볼 수 있고, 중국의 89년 사건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는 점에서, 동아시아 세 나라의 경험에는 매우 강한 유사성이 존재한다.
유시민=중국은 1957년부터 상산하향(上山下鄕) 운동을 지속적으로 펼쳤다. 원 선생도 1968년 문화대혁명 시기에 하방을 경험해 가족이 흩어져 사셨다는 체험을 소개하고 있다. 한국독자들에게는 중국의 하방운동이라면 정치적 숙청이나 지식인에 대한 강압적 정신개조라는 억압의 이미지가 강한데, 책에서는 그 경제적 배경을 조명하고 있다. 도시 지역의 과잉노동력을 농촌으로 보내 도시의 위기를 해소함으로써 자본 축적과정의 위기를 순조롭게 극복하는데 힘을 보탠 측면이 있다고 보셨는데, 이를 좀 더 자세히 설명해 줄 수 있을지.
원톄쥔=지식인들에게 육체노동이 꼭 억압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중화인민공화국은 상산하향운동 당시가 아니더라도, 건국 이후 줄곧 노동 참여를 일상적으로 제도화하고 있었다. 나 자신도 학창 시절 농번기가 돌아오면 며칠씩 농촌에 가서 일을 했고, 문혁 직후에는 공장에 가서 노동에 참여하기도 했다. 이런 노동 참여를 정치적 폭력의 표상으로 연결하는 것은 노동에 대한 중국인의 실감과는 동떨어진 면이 있다.
사실 상산하향운동 당시 농촌에 보내져서 노동에 종사하는 것을 정치적 억압으로 받아들이는 분위기는 별로 없었다. 중국 내에서 이를 억압의 표상으로 묘사하기 시작한 것은 1980년대 중반 이후의 일이다. 노동이 가치의 원천이라는 노동가치설과 잉여가치설을 부정하는 경제학 이론이 유행하기 시작하면서, 과거의 노동 체험을 모두 헛된 것으로 돌리는 지식인들의 노동에 대한 피해의식이 유행하기 시작했다. 올해 초 출판된, 건국 이후 중국의 8차례 경제위기를 다룬 저의 다른 책에서 언급한 바처럼, 중국에서는 3차례의 경제위기에 대한 대응책으로 도시민들을 농촌으로 보내는 방법을 활용했다. 도시가 식량부족 및 대규모 실업 사태에 직면하게 되자, 잉여 노동력을 일단 농촌으로 보내서 알아서 먹고 살고 오도록 조치했다. 물론 이런 사례는 노동의 가치를 중시해온 중국의 전통과는 다른 차원으로 봐야할 것이다. 중국은 여러 차례 경제위기에 직면해서 그 부담을 갖가지 방식으로 농촌으로 전가했고, 이는 농민들에게 막중한 부담이 되었지만, 그래도 이는 전쟁을 통해 문제를 해결해온 서양보다는 좀 더 나은 해결책이 아니었나 싶다.
개인적으로 남북이 각기 어떤 방식으로 한국전쟁을 기억하고 서사하는가 하는 문제에 관심이 크다. 이 전쟁에서 토지개혁이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에 대해서도 궁금하다. 북한의 무상몰수 무상분배라는 사회주의적 방식과는 달리 남한에서는 유상몰수 유상분배라는 좀 더 자본주의적 방식의 토지개혁이 있었다고 들었다. 토지개혁을 실시한 시점, 토지개혁과 내전의 격화, 토지개혁과 냉전구조의 고착화 같은 문제들이 어떻게 연동되어 있는지 궁금하다. 이 문제들이야 말로 한국의 진보적 지식인들이 새롭게 연구과제로 삼아 깊이 있는 설명을 도출해야 하지 않을까?
유시민=그런 노력이 1970~80년대 한국 지식인사회에서 활발하게 전개된 바 있다. 토지문제와 관련하여, 일찍이 한국전쟁 전 좌우의 국지적 내전상태나 한국전쟁과 연결해서 이해하려는 시도들이 적지 않았다. 그런데 문제는 토지문제의 중요성이 점차 희석되어 갔다는 점이다. 지금으로부터 50년 전, 즉 1960년대 초에 인구센서스 결과를 보면 농업종사자 비율이 67%를 차지한다. 그런데 2011년에는 7%에 불과하다. 단 두세대 만에 상황이 이렇게 바뀐 것이다. 농업생산력은 빠른 속도로 증대된 반면 농업종사자의 인구수가 너무나 급속히 줄어들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1980년대 중반 이후에는 한국사회에서 토지문제를 둘러싼 논의가 실종되어 버렸다. 역사는 과거와의 대화라는 말이 있듯이, 이미 절박한 현실 문제가 아니게 되니까 과거에 굉장히 중요한 이슈였음에도 이에 대한 연구가 실종되었고, 더 이상 지식인들 사이의 논쟁에서 주요한 이슈가 아니게 되었다.
원톄쥔=좀 더 의견을 나누고 싶은 주제는, 아시아의 경험들을 일반화함으로써 역사를 새로운 시각에서 볼 가능성을 타진하는 문제다. 50년대 이후 냉전구조를 고착시키게 된 많은 조건들이 있었을 것이고, 그렇게 고착된 냉전구조는 역으로 오늘날 우리 삶의 많은 것을 결정지어버렸을 것이다. 이런 냉전구조의 고착과정에 대한 해명은 중요한 현재적 의의를 갖는 주제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에 대한 아시아 내부의 시각을 통한 역사적 이해가 결여되어 있다는 점은 아쉬운 대목이 아닐 수 없다.
38선이라는 것도 역사적으로 보면 미국 해군장교들이 자신들의 군사적 편의를 위해 미군 군함에서 임의로 그은 선에 불과하다. 한반도의 분단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스탈린이 소련과 미국 사이의 지정학적 분리를 목적으로, 대국 간의 이해관계를 조정하는 지정학적 전략 차원에서 동아시아 전반에 대한 통제정책의 하나로서 채택한 정책이다. 삼팔선은 그런 의미에서 근본적으로 국경의 의미를 지닐 수 없다고 본다. 이런 중대한 문제가 왜 토론의 대상이 되지 않는 분위기인지 의아하다. 편의적으로 그어진 삼팔선이 전쟁의 원인이 되고, 또 다른 의미에서 동아시아 냉전의 강화와 고착화를 낳았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에 대한 본질적 의미를 되묻는 작업이 오늘날 동아시아의 비판적 지식인들 사이에서 부족한 것 같다.
유시민=원 선생의 책에는 경로의존성이라는 개념이 여러 군데에서 활용되고 있다. 혁명을 통해 탄생한 신중국이 지금까지 걸어온 경로, 친자본적 정책이 펼쳐질 수밖에 없었던 이유 등을 경론의존성이라는 개념을 가지고 설명하셨다. 이것을 저는 한반도의 분단에도 적용할 수 있다고 본다. 말하자면 한반도의 정세는 누가 만든 것이 아니라 경로의존적으로 그냥 이런 상황까지 흘러 왔다고 본다.
38선으로 인한 분단과 뒤이은 3년 동안의 내전에 양쪽 모두 외국 군대의 개입이 있었다. 다시 휴전선이 만들어지고 60년간 군사적 정전상태가 지속되어 오면서 모든 사람들이 분단에 익숙해졌다. 이걸 깨보려고 했던 게 김대중, 노무현 두 대통령이었다. 북의 입장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남의 경우에는 아직 우리 국민들이 이것을 받아들일 준비가 안 되어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이 휴전선의 존재를 부정하고 우리 민족 전체의 미래를 열어가기 위해 우리 자신의 생각과 행동양식을 바꾸어야 하는데, 아직 준비가 안 되어 있다. 최근 대화록 사태가 터지고 유치한 논쟁이 벌어지는 것은 이런 상황의 반영이라고 본다. 물론 분단 상황의 극복이 늦어지는 것은 모두의 책임이다. 북은 여전히 자기들이 그동안 내세워온 혁명 이데올로기에 사로잡혀 있다. 몸은 기본적인 삶을 해결하기 어려운 조건에 있음에도, 머리는 계속 혁명 이데올로기에 사로잡혀 있고, 미국을 상대로 한 공포감과 대결의식을 고취함으로써 인민들을 결속시키는 방법으로 체제를 유지하고 있다.
남한의 입장에서는, 이제 체제 경쟁은 끝났고 북한은 우리가 두려워할 대상이 아니라 객관적으로 우리가 감싸주며 함께 손잡고 나아가야 할 대상임에도, 여전히 북한에 대한 정서는 과거에 머물러 있다. 북에서 토지를 몰수당하고 월남한 사람들, 북한 체제의 전체주의적 독재가 싫어 내려온 사람들… 함께 전쟁을 치렀지만 가해자는 말이 없고 피해자만 말을 하니까, 전쟁에 대한 기억은 온통 피해의식으로 점철되어 있다. 마치 아직도 온 국민이 일종의 한국전쟁 직후의 피난민촌에 살고 있는 듯한 정서를 갖고 있다. 전 이걸 난민촌 정서라고 부르고 싶다. 대한민국의 현재는 이미 전혀 난민촌이 아님에도, 사람들 생각은 여전히 난민촌에 머물러 있다. 말로는 북을 대화의 상대로, 화해와 협상의 파트너로, 협력의 동반자로 인정할지 몰라도 마음은 아직 그렇지 않은 것이다. 그래서 북은 말할 나위도 없고, 남도 내부에서 이 문제에 대해 터놓고 이야기하기가 굉장히 곤란하다. 엄청난 비난과 정치적 위험을 감수할 자신이 없으면 분단에 관해서는 지식인 사회에서도 입을 다물어버리는 것이 꽤나 오랜 일이 되었다. 한국사회의 지적 또는 정치적 취약성이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대목이다.
원톄쥔=고 김정일 국방위원장조차 2000년 김대중대통령 방북 당시, 한반도 통일 이후에도 미군 주둔을 용인한다는 입장을 밝힌 바 있다. 일본의 경우에도 사회당, 민주당, 자민당 가릴 것 없이 미군의 주둔과 일미동맹 유지에는 일치된 입장이다. 남북한이 냉전 구조의 영향에 깊숙이 놓여있고, 현재의 동북아 정세에서 냉전을 통해 형성된 각 주체의 지정학적 위치가 매우 강한 관성을 갖기 때문에, 토론을 통해 이를 비판적으로 극복한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과제가 아닐 수 없다. 냉전의 극복이야 말로 동북아 안정을 위한 핵심적 요소인데. 앞으로 이를 어떻게 문제 삼고 각자의 소임을 다할 것인지가 참으로 중요한 문제이다.
유시민=앞으로 그 문제에 대한 한·중 지식인 간의 대화 확대도 필요한 것 같다. 제가 노무현 정부 시절, 안보 당국자에게서 전해들은 바로는, 중국의 입장은 한반도 통일에 대해 굳이 막을 의도가 없어 보인다는 것이었다. 통일과정에 적극 나서서도 않겠지만, 남북 당사자 사이에서 통일의 분위기가 무르익어갈 경우 이를 가로막고 나설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한 가지 문제는 한반도 주둔 주한미군 문제인데 기존 주한미군의 배치선을 중국 쪽으로 더 올리지만 않는다면 현재 주둔한 지역에서의 계속 주둔에 대해서는 묵시적 양해가 가능하다는 것이 중국정부의 입장이라는 것이다. 중국은 동북 3성의 개발이라든가 내륙 투자 등으로 동북아 군비증강에 나설 여유가 없는 처지다, 그러니까 북이 더 이상 문제를 일으키지 않고 남북한이 잘 대화해서 한반도 정세를 평화롭게 유지하고 또 이를 더욱 발전시켜 통일에 이른다면, 굳이 중국 쪽에서 미군철수 문제를 들고 나올 필요는 없다는 것이 비공식적인 중국입장이고 한중관계의 진전 또한 이러한 인식을 바탕에 깔고 있다는 것이 우리 측 관계자의 전망이었다. 그래서 이정도면 서로 대화를 진전시켜 볼만한 관계가 아닌가하는 생각을 했던 적이 있다. 중국이 그런 정도까지는 양해할 수 있나? 당시 북쪽에서도 미군철수 문제를 거세게 요구하지 않는 흐름이 보였기 때문에 더 이상 주한미군 문제는 한반도 평화와 통일에 결정적 장애물이 되지 않을 수 있는 것 아닌가 하는 희망을 가졌다.
그런데 최근 다시 한·미·일 삼각동맹이 강화되는 추세가 보이고 MD(미사일방어계획) 참여문제가 거론되는 등, 지난 이명박정부 때부터 중국 측에서 이에 대해 바짝 신경을 쓸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정세가 진전된 것은 남북관계에도, 한중관계에도 굉장히 좋지 않은 일이다. 지난 5년 사이에 이전에 비해 한중관계도 상당히 안 좋아졌다. 들리는 말로는 우리 사업가들이 중국에서 회사 운영하면서 노동법을 위반해도 옛날에는 더러 눈감아주는 경우도 있었는데, 근자에는 잘 안 봐준다고 한다. 그만큼 한국정부의 외교적 행보에 대해 중국 현지에서도 분위기가 안 좋다는 얘기를 많이 듣고 있어서 걱정스럽다. 당국 간에는 이 문제에 대한 솔직한 대화가 쉽지 않겠지만, 지식인 사이에서 논의야 자유롭게 할 수 있는 것이니 적절한 시기에 한반도에 관심이 많은 중국 지식인과 한국 지식인들이 만나 교류를 진행해 보면 재밌겠다는 생각을 한다.
■ 남북, 경제적 이득 취하는 게 중요
원톄쥔=개인적으로 남북 양쪽을 모두 다녀본 입장에서 한반도의 평화적 통일은 참으로 중요한 문제이며 앞으로 잘 해결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크다. 남북 관계의 진전을 위해서는 정치적 차원에서 대결을 접어두고 경제적 상호이득을 우선하는 것이 굉장히 중요하다고 본다. 저는 한국 또한 중국과 마찬가지로 생산능력 과잉상태에 빠져있다고 보는데, 이를 타개하기 위해서는 중국자본이‘서향’을 통해 문제를 완화한 것처럼 한국 자본의‘북향’이 필요하다고 본다. 노동력과 지하자원 분야에서 북한이 가진 우위를 남한의 자본 및 기술과 결합하는 북향정책이야말로 다가올 글로벌 위기에 대한 최선의 대비책일 수 있다. 이를 실현할 경우, 내 생각에는 최소 5년, 길면 10년 정도 동안 한국의 고성장이 가능할 수 있을 것으로 전망된다. 한국의 주요 산업 가운데 상당 부분을 중국이 따라잡고 있는 상황에서, 한국의 고성장은 더 이상 쉽지 않아 보인다. 그렇게 본다면 남한이야말로 훨씬 더 절박한 상황에 처해 있는 것은 아닌가? 경제적 상호보완 관계의 형성을 통해 남북 간의 경제적 통합이 선순환을 시작하면, 정치적 차원의 쟁점은 장기적으로 부차적인 것이 될 수밖에 없다. 국외자의 입장에서 보는 지나친 낙관일지도 모르지만, 내 판단으로 이는 남북 모두에게 최선의 시나리오다.
유시민=그런 판단의 큰 틀은 지난 시기 고 노무현 대통령의 상황인식과도 거의 일치한다. 당시 우리 정부의 판단도 정확히 그러했기에 2007년 남북정상회담을 통해 경제협력의 확대 강화에 합의했던 것이다. 지적하신 것처럼 한국도 제조업, 특히 건설 쪽의 과잉상태가 심각하기 때문에, 북과 합작을 전개하면 최소한 10년 이상의 투자처를 확보할 걸로 전망했다. 한국이 중국식 정치체제를 가지고 있었다면, 당에서 결정하면 그냥 갔겠지만… 원 선생의 표현에 따르면, 이른바 서구식 엘리트민주주의체제인 한국의 상황에서는 선거과정에서 이런 비전을 다 말씀드려도 유권자들이 다른 선택을 했다. 앞으로 어차피 5년 동안은 이를 실현해갈 방도가 없을 것으로 보인다. 차후에라도 국민들이 다른 선택을 하게 되면, 그때 과거 합의된 것을 포함해서 남북관계의 진도를 나갈 수 있을 것이다.
한국 국민들이 중국에 대해 관심 갖는 이슈 가운데 하나가, 중국이 천안문사건 이후 근 20년간 정치적 안정을 유지해왔는데 그 정치사회적 안정이 언제까지 지속될 것인가 하는 문제이다. 중국이 혼란스러워지면 그 여파가 한국에도 미치리라는 우려 때문이다. 중국은 경제적 차원에서는 이미 ‘이륙’을 한 상태이기에, 앞으로도 여러 난관이 있을 수 있겠으나 일단 공중에 떠서 날아갈 것이라고 본다. 원 선생은 책에서 농업분야의 사유화와 시장화 도입을 강력히 반대하셨는데, 저도 이런 관점에 적극 동의한다. 왜냐하면 한국은 중국 인구의 30분의 1인데도 불구하고, 또 정부의 일정한 보호조치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1971년에 광주대단지 사건처럼 수만 명이 들고 일어나는 도시빈민 폭동이 발생한 바 있다. 저는 중국같이 큰 나라에서 만약 농촌이 완전 붕괴상태에 이르러 산업지대와 도시 부근에 엄청난 규모의 빈민굴이 형성되면, 중국의 정치적 안정을 절대 보장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원 선생께서 농업 분야의 사유화와 시장화를 극력 반대하는 이유를 두 가지로 보는데, 사유화와 시장화로 인해 토지를 잃은 농민들에게 초래될 개인 차원에서의 고통이라는 미시적 관점과, 이런 문제가 집단적 불만으로 표출될 때 중국의 정치사회적 안정이 위협에 처하게 되리라는 거시적 관점 모두를 고려하고 있다고 판단된다. 이는 굉장히 중요한 문제가 아닐 수 없으며, 시의적절한 시기에 이런 문제를 제기한 것으로 판단된다.
그런데 책에서 원 선생은 중국이 향후 친민생, 포용적 성장, 생태문명에 대한 존중, 그리고 조화사회의 방향을 향해 나아가야한다고 했는데, 이런 전환이 과연 현재의 정치시스템 안에서 잘 이루어질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있다. 이 전환을 성공적으로 이끌어내지 못할 경우 큰 문제가 생길 것이 분명한데, 대개 서구의 경험을 보더라도 시민의 거센 저항운동이나 강력한 야당의 등장, 또는 지식인들의 아주 자유롭고 왕성한 비판 등의 압력으로 인해 정부가 어쩔 수 없이 움직인 측면들이 있다. 그런데 일당 지배 구조로 작동하는 중국식 시스템 속에서 중국사회가 이런 전환을 이루어 내려면, 중국공산당이 역사적으로 계몽군주의 역할을 수행할 수밖에 없는 것 아닌가. 그러나 서구의 어떤 민주주의도 스스로의 힘으로 이루어내지 못한 이런 전환을 과연 중국공산당이 성공적으로 해낼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이 있다. 중국 지도부가 이에 실패하면 삼농문제의 해결은 어려울 것이고, 사회적 및 정치적으로 거대한 혼란이 일어나지 않을까 하는 우려가 든다. 그리고 이웃나라인 우리도 힘들어지지 않을까 싶다. 그럼 점에서 한국인들은 중국의 사회적 정치적 안정성에 관심이 많다.
원톄쥔=현재 중국의 사회계층 구조와 경제구조는 피라미드 모양의 안정된 형태를 갖고 있다. 중국이 밖에서 보는 것과 달리 쉽게 사회적 동란이 일어나지 않고 또 일어나도 국부적으로 그친 것은 발달한 통치 테크닉 때문이 아니라 이런 구조적인 안정성이 있어서이다.
1989년 천안문 사건에 대한 시각을 예로 들어 보자. 우선 중국의 대다수, 아마도 95% 이상이 당시의 처리방식, 즉 폭력적 진압이 잘못된 것이라는 입장을 가지고 있다. 둘째, 그리고 또한 95% 이상의 중국인이 언젠가 89년 사건에 대한 역사적 재평가가 이루어지리라는 기대를 갖고 있다. 셋째, 그런데 또 이렇게 생각하는 95%의 사람들이 사상적 차원에서 89년 문제에 대한 처리방식에 문제가 있다는 공감에도 불구하고 그 이후 중국이 유지해온 사회적 안정을 높이 평가하고 있다. 물론 이런 사회적 안정이 가능했던 내재적 원인은, 고도성장 기조의 유지를 통해 통치의 정당성을 확보하는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이번에 새로 조직된 공산당 지도부가 과거의 정책 기조를 근본적으로 뒤엎는 실책을 범하지만 않는다면, 기본적으로 정치, 사회, 경제적 차원에서 현재의 안정은 상당 기간 지속가능할 것으로 보인다.
유시민=제가 중국인이었다면 원 선생의 책에서 다루어진 내용을 아주 대중적으로 쉽게 풀어쓴 책을 한번 써보고 싶었다. 원 선생의 책은 마르크스주의 경제학과 주류경제학의 이론을 두루 포괄하고 있는데다, 중국현대사에 대한 깊이 있는 지식도 요구하고 있다. 원 선생의 기술방식이 갖는 독특한 면은 경제사, 정치사, 경제발전사, 좌우파를 망라한 경제이론 등을 높은 수준에서 압축하고 있어 그 깊이가 상당하다는 것이다. 보통 독자들이 과연 이것을 수용할 수 있을까 걱정스럽기는 하지만, 굉장한 지적 긴장을 안겨주는 책인 것만은 분명하다. 이 책으로 미루어 보건데, 원 선생은 다양한 분야의 학문을 깊게 축적해 오신 듯하다. 세계 곳곳을 다니며 강연도 하시고 다양한 연구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계신데. 거시적 차원에서 중국의 체제 안위를 걱정하는 친체제적인 면도 보이는가 하면, 삼농문제의 제기를 통해, 고통 받는 농민 한 사람 한 사람의 운명을 걱정하는 데서 알 수 있듯이, 미시적 차원에서는 반체제적 면모도 뚜렷하다. 이런 복합성 때문에 체재와의 불화도 겪으실 듯하고, 입장이 다른 지식인들로부터 오해와 비아냥을 들으셨을 것 같다. 지금 연세도 적지 않은데, 도대체 어떤 힘이 왕성한 집필과 강연과 여행 등 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만드는지 궁금하다. 지식인으로서 열정을 유지하는 원동력은 대체 무엇인가?
원톄쥔=민감했던 청년기에 11년이 넘는 시간을 하방된 지식청년, 농민, 군인, 노동자로 살았다, 그런 시간을 통해 얻은 경험이, 삶의 조건이 바뀌었다고 해서 기득권의 입장에 서서 주류 이데올로기를 간단히 받아들이고 내면화 하는 것을 가로막는 힘인 것 같다. 연구하고 조사하고 실천하면서 기존의 주류 담론에 맞서는 대안적 담론체계를 만드는 작업이 저로서는 지적 긴장감을 부여하는 즐거운 활동인데, 마침 제가 가진 자질이 이런 길에 들어서는 데 도움이 되었다. 젊은 시절 전공이 외국어는 아니었으나, 외국어를 잘하는 편이었고 영어도 곧잘 해서, 정부 정책연구 기관에서 근무하던 1980년대부터 각종 현지조사와 국제포럼 등에 참석할 기회가 많았다. 이런 현장 체험은 지식인들이 서재에서 책을 통해 얻는 지식과는 다른, 세계에 대한 실감을 부여해주는데, 저의 비교적 많았던 현장 체험은 세상을 이데올로기의 필터를 통해서가 아니라 현실 그대로 객관적으로 이해하는 데 남보다 좀 더 나은 여건이 되었다.
한 가지 더 개인적 상황을 밝히자면, 중국의 대다수 지식생산자가 중국 내부의 체제 안에서 어떤 기득권 구조 내에 소속될 수밖에 없는 상황인데, 외국으로부터 잦은 초청을 받는 입장에 있는 저는 생활 때문에 기득권의 눈치를 보아야 하는 처지에서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편이다. 언제든 할 말을 다 할 수 있는 물질적 조건이 중국 외부와의 관계 속에서 어느 정도 확보되어 있는 셈이라고 하겠다. 객관화하자면 이런 물적 토대가 지금과 같은 발언의 위치를 규정해주었다고 할까. 마지막 질문은 지식인으로서 스스로를 어떻게 정의하느냐 하는 취지로 이해했다. 모호한 대답일 수도 있지만, 넓은 의미에서 저는 지식인으로서 동양 문명의 전통을 계승하는 쪽에 자신의 아이덴티티를 두고 있는 사람이라고 대답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