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신문] 임현진 칼럼 – 포퓰리즘 수렁에 빠진 한국 민주주의
[창립소장 임현진 교수(시민사회 프로그램 디렉터)]
한국 민주주의의 앞날에 대해 걱정하는 소리가 적지 않다. 법의 지배와 시민적 권리가 흔들리면서 민주주의가 위기를 맞고 있다는 것이다. 이를 ‘뜨거운 물에 던져진 개구리’에 비유할 수 있다. 개구리가 펄펄 끓는 물에 들어가면 얼른 튀어나오지만, 미지근한 물에 들어가면 서서히 뜨거워지는 온도에 적응하다가 결국 죽는다고 한다. 우리 민주주의가 잘못 가고 있는데 이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면 끝장을 맞이할 수 있다는 얘기다.
이러한 민주주의 위기가 포퓰리즘의 등장과 결부되어 있어 더욱 고민이다. 국회에서 여야협치가 이루어지지 않으면서 대의민주주의에 대한 국민의 불만과 불신이 크다. 일부 정치인들이 진영논리에 따라 유튜브와 SNS 등 뉴미디어를 활용한 선전·선동으로 시민을 동원하는 포퓰리즘적 정치행태가 나타나고 있다.
한국 민주주의는 권위주의적 포퓰리즘이라는 최악의 시나리오를 극복해야 할 과제를 안게 됐다.
우리나라에서 포퓰리즘은 좋은 의미보다 나쁜 의미로 쓰인다. 대중의 인기를 얻기 위해 복지를 마구 제공하는 무책임한 정책으로 간주된다. 경제성장 과정에서 배제된 소외계층을 포용하는 약자배려적인 측면은 무시된다. 우리나라에서 포퓰리즘이 논란이 된 것은 노무현정부 들어서부터다. 평소 직설화법을 즐기는 노무현 대통령이 자극적인 ‘대중의 언어’로 지지자를 결집했기 때문이다.
해방 이후 역대 대통령의 연설을 텍스트 마이닝(text mining)으로 분석해보면 보수 진보 할 것 없이 거의 모든 대통령들이 국가 국민 통일 성장 분배 복지 등 포퓰리즘적 수사를 사용했다. 이는 노 대통령 특유의 친(親)대중적 말투를 포퓰리스트라고 단정하는 것이 무리가 있음을 알려준다.
2007년 대통령선거 이후 여야후보들 사이에서 ‘20대 80 사회’ ‘부자증세’ ‘무상급식’ ‘대학등록금 인하’ 등 포퓰리즘적 수사와 구호가 난무한 것을 고려한다면 이 이후부터 한국 민주주의가 본격적으로 포퓰리즘의 도전에 마주한 것으로 보인다.
권위주의적 포퓰리즘, 최악의 시나리오
포퓰리즘은 이미 오래 전 유럽과 같은 선진 민주주의 국가들이나 라틴 아메리카의 후발 민주주의 국가들에서 나타났다. 포퓰리즘의 등장은 정당정치의 부전에 따른 대의민주주의의 실패에 기인한다. 급속한 세계화 와중에서 경제적 불평등과 사회적 양극화가 심화되면서 대의민주주의를 이끌어온 중도 좌파나 우파 정당의 지지기반이 무너진 것이다.
우파 포퓰리즘은 ‘국가주권’(national sovereignty)의 시각에서 외국인 혐오, 이민자 유입 반대, 사회적 소수자의 권리 억제를, 그리고 좌파 포퓰리즘은 ‘인민주권’(popular sovereignty)의 관점에서 노동권익 보호, 복지증진, 재정확대를 내세운다.
좌파 포퓰리즘은 우파 포퓰리즘과 달리 기존의 지배헤게모니 해체를 통해 민주주의의 급진화로 나아갈 기회를 제공한다는 견해도 있다.
포퓰리즘은 출발이 좋고 나쁘고를 떠나 결과가 바람직하지 않다. 포퓰리즘은 좌나 우 성향을 불문하고 정치적 수사는 강하지만 일관된 체계적 이데올로기를 결여하고 있다. 포퓰리즘은 국민을 ‘부패한 엘리트’와 ‘깨끗한 대중’으로 이원화하고 전체 국민의 ‘일반의지’(Volonte? Ge?ne?rale)라는 명분으로 그러한 정치·경제 지배엘리트를 징치(懲治)하고자 한다.
포퓰리즘은 국민의 위와 아래 사이 즉, 엘리트와 대중 사이의 격차를 파고든다. 세계화 와중에서 소득과 자산의 불평등으로 인한 생활 의식 문화 규범의 양극화 확대가 그것이다. 지난날의 진보와 보수라는 1차원적 사고로는 설명이 어려운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예를 들어 오늘날 한국사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갑질문제나 꼰대현상, 미투운동 등은 독립적 문화를 지향하는 세대와 젠더의 표출로서 이념으로만은 설명이 어렵다.
포퓰리즘은 국민이라는 이름을 내세우지만 특정 계층·집단·세대·부문만을 지지기반으로 한다. 그러므로 포용이란 이름 아래 배제가 일어난다.
결과적으로 다원주의에서의 게임의 규칙에 따른 타협과 공존의 정치를 부정한다. 시민의 자발적 참여를 이끌어내기보다 뉴미디어를 통한 여론조성에 의해 집회와 시위를 조직해 동조 세력을 동원한다. 선전과 선동을 위해 가짜뉴스 허위정보 댓글조작이 늘어난다.
건강한 공론장과 정당정치의 복원이 중요
우리의 시민운동은 오래 전부터 진보와 보수로 갈라져왔다. 하지만 문재인정부 출범 후 특히 ‘조국사태’ 이후 진영논리에 따라 ‘서초동’과 ‘광화문’에서 두개의 극단적인 집회와 시위가 이루어졌다.
이들 집회와 시위는 뉴미디어를 통한 조직과 동원, 이념을 넘어 확증편향적 판단과 정치적 이해의 차이에 따라 양극화로 치닫고 있다는 점에서 포퓰리즘적 성향을 보였다. 이성적 논쟁이 아니라 비판과 타협을 허용하지 않는 감정적 대립으로 서로를 적대시함으로써 한국사회가 양분되는 불행한 사태가 일어나고 있다.
법의 지배에 입각한 시민권의 확장, 시민사회의 건강한 공론장의 부활, 대의민주주의의 활성화를 통해 한국 민주주의의 위기를 돌파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