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기] 2014 SNUAC 박사학위 논문상 시상식 및 발표회(2014.9.25)

[후기] 2014 SNUAC 박사학위 논문상 시상식 및 발표회(2014.9.25)

○ 서울대학교 아시아연구소(SNUAC)는 오는 25일(목) 14시에 아시아연구소(101동) 국제회의실(303호)에서 2014년도 SNUAC 박사학위논문상(SNUAC Dissertation Award) 수상자에 대한 시상식과 논문발표회를 개최했다.

서울대 아시아연구소는 2014 SNUAC 박사학위 논문상 시상식 및 발표회를  9월 25일 진행했다.

서울대 아시아연구소는 2014 SNUAC 박사학위 논문상 시상식 및 발표회를 9월 25일 진행했다.

○ 2014년도 SNUAC 박사학위 논문상은 2014년도에 새롭게 출범한 제도로, 아시아와 관련된 우수한 학술적 성과를 거둔 박사 논문에 대해 우수 논문 1편당 500만원의 상금을 시상하며, 이후 수상 논문을 출판 할 경우 1편당 500만원을 추가로 지원하는 제도다. 특히 시상식 뿐 아니라 우수 논문에 대한 발표의 장을 마련하여 우수 아시아연구자들의 네트워크 구축과 기초연구 활성화에도 기여할 것으로 기대를 모으고 있다.

○ 이날 개회사에서 강명구 소장은 “이번 시상식은 아시아를 주제로 한 박사논문 쓴 우수한 젊은 학자 발굴하는 데 기여할 거라 기대한다”고 말하며 “두 분 박사에게 축하의 인사를 드리며, 앞으로도 이 제도가 잘 정착되서 학문 후속 세대가 잘 자라날 수 있도록 재정적 기반을 만드는 게 기여하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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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명구 소장이 이영진 박사에게 상패를 시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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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명구 소장이 김인수 박사에게 상패를 시상하고 있다

○ 우수논문상 수상자는 아시아기초연구사업위원회에서 정한 심사를 거쳐 지원과제를 2단계 심사과정을 거쳐 최종 선정된 것이다. 지난 5월부터 신청을 받아 6월부터 3개월간의 심사를 거쳐 2명의 수상자를 선정했다. 두 패널로 구성된 심사위원들이 1단계 전문가 심사, 2단계 내부적으로 종합평가회 거쳐서 2명의 박사 논문을 선정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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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 박사학위 논문상 시상식 및 발표회는 공석기 박사의 사회로 시작되었다.

○ 최종 선정된 수상자와 수상 논문은 아래와 같다. (논문 요약 하단 참조)
– <전후 일본의 특공 위령과 죽음의 정치>
: 이영진(전남대학교 호남학연구원 HK연구교수, 서울대 인류학과 박사, 2012년도, 지도교수: 김광억(서울대 인류학과))

– <일제하 조선의 농정 입법과 통계에 대한 지식국가론적 해석―제국 지식체계의 이식과 변용을 중심으로>
: 김인수(연세대학교 국학연구원 박사후연구원, 서울대 사회학과 박사, 2013년도, 지도교수: 정진성(서울대 사회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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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연구소 학술연구부장 홍백의 교수(사회복지학과)가 수상 논문들에 대한 심사평을 발표하고 있다.

○ 심사를 주관한 아시아연구소 학술연구부장 홍백의 교수는 이날 각각의 논문에 대한 심사평을 다음과 같이 이야기 했다.

– 먼저 이영진 박사의 논문은 최근 동북아 지역에서 심각하게 논의되는 역사인식의 문제를 시의적절하게 다루고 있음으며 사료의 사적 가치, 이런 자료들을 본인의 논리에 맞게 풀어나가는 논리력 분석력이 돋보여서 앞으로도 아시아연구의 기초연구로서 가치가 있다는 것이 전반적인 심사평이었다고 밝혔다.

– 김인수 박사의 논문은 식민지 조선에서의 농정 입법과 소작을 둘러싼 인식 폭력의 문제, 지식 생산 양식이라는 분석 개념을 중심으로 논의한 것으로 전체적인 문제의식이나 기존연구를 본인의 시각에 기초해서 비판적으로 검토한 부분들, 논리적 전개에 있어서 치열한 분석력과 논리력이 돋보였다는 점이 전체적인 심사자 선생님들의 평가였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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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진 박사의 지도교수인 김광억 교수(서울대 인류학과 명예교수)가 논문 지도 과정에 대한 회고와 수상자에 대한 덕담을 이야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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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인수 박사의 지도교수인 정진성 교수(서울대 사회학과)가 논문 지도 과정에 대한 회고와 수상자에 대한 덕담을 이야기하고 있다.

○ 이날 행사에는 논문상 수상자의 지도교수들도 함께 참여하여 그 의미를 더했다. 이 자리에서 김광억(서울대 인류학과 명예교수) 교수는 “무엇보다 연구 결과를 책으로 낼 수 있는 지원이 의미가 있다”고 말하며 연구자에게 큰 격려가 되길 바란다고 소감을 밝혔다. 정진성(서울대 사회학과) 교수도 수상자와의 에피소드를 소개하며 시상식에 활기를 더해주었다.

○ 이날 발표에서는 특히 두 박사 논문의 주요 논점과 더불어, 박사 논문을 쓰는 과정에서의 사유의 흐름과 고민들이 묻어나는 진솔한 내용이 공유되어 의미를 더했다. 이날 행사에 참석한 대학원생 이성민(서울대 언론정보학과) 씨는 “박사학위를 준비하는 입장에서 선배 연구자들의 진지한 고민을 들을 수 있는 좋은 자리였다”라고 말하며 “앞으로의 연구에 대해 자극과 통찰을 얻을 수 있는 이런 기회가 더 많아지길 바란다”고 소감을 말했다.

○ 한편, 서울대학교 아시아연구소는 학문후속세대 양성과 기초연구 지원을 위한 다양한 사업을 운영하고 있다. 지난 5월에는 2014년도 ‘아시아기초연구지원사업’을 통해 4개의 연구과제를 선정하여 지원한 바 있고, 2014년도 ‘저술지원사업’을 통해 6개의 저술 과제를 선정, 지원한 바 있다. 또한 연2회 연구 인턴을 운영하여 학문후속세대가 아시아연구의 현장을 직접 체험할 수 있는 교육 및 연수 기회를 제공하고 있으며, 연1회 <지역과 주제를 결합한 아시아연구 전국 대학원생 포럼>을 개최하여 연구자들간 네트워크 및 교류를 강화하기 위한 장을 마련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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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진 박사가 논문의 핵심 내용에 대해 발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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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인수 박사가 논문의 핵심 내용에 대해 발표하고 있다

[논문 요약]
– <전후 일본의 특공 위령과 죽음의 정치> : 이영진(전남대학교 호남학연구원 HK연구교수, 서울대 인류학과 박사, 2012년도, 지도교수: 김광억(서울대 인류학과))

이영진의 논문은 전사자 위령, 즉 국가를 위해 싸우다 죽은 전사자들의 죽음을 지금의 우리는 어떻게 기억하고 기념해야 할 것인가를 둘러싸고 전후 일본 사회에서 전개되고 있는 여러 문제들을 기억, 그리고 ‘애도(哀悼)의 정치’라는 문제의식 아래 새로이 재구성한 연구다. 연구자는 현대 일본 사회가 직면하고 있는 가장 커다란 문제점은 지난 전쟁의 전쟁사자들에 대한 정당한 애도의 결여, 그로 인한 우울증적 증상이 만연해 있는 것이라고 지적하며, 이를 해결하기 위한 가장 근본적인 방법은 무엇이 상실되었는가를 직시하고 그 상실을 상실로서 받아들이는 고전적인 정신분석의 치유법을 받아들이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http://library.snu.ac.kr/search/DetailView.ax?sid=6&cid=3925813

– <일제하 조선의 농정 입법과 통계에 대한 지식국가론적 해석―제국 지식체계의 이식과 변용을 중심으로> : 김인수(연세대학교 국학연구원 박사후연구원, 서울대 사회학과 박사, 2013년도, 지도교수: 정진성(서울대 사회학과))

김인수의 논문은 식민지 농정에 내재된 ‘인식폭력’의 문제를 분석함으로써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제시하려는 시도이다. 본 연구는 일제하 조선에서 식민국가가 농정 입법, 조사, 그리고 통계를 통해 강제한 ‘인식체계’와 이에 대한 식민지 지식인들의 비판의 흔적을 발굴하고 분석한 결과물이다. 이에 따르면 1930년대의 식민지 조선의 농정은 식민국가가 입법, 조사, 통계를 통해 구축한 인식체계의 권력효과에 의해 급속히 안정화되었다. 식민지 지식인의 담론생산도 이 인식체계의 영향 속에서 이루어졌다. 연구자는 오늘날 한국학계의 「식민지근대화론 논쟁」이 1930년대의 「조선사회성격논쟁」과 자료, 방법, 논리의 측면에서 매우 닮아있음을 지적하며, 비판적 식민지 연구를 위해 식민국가가 생산한 자료에 전제된 지식의 권력효과를 충분히 응시해야 함을 주장하고 있다.
http://library.snu.ac.kr/search/DetailView.ax?sid=6&cid=4152912

[현장 발표 내용]

이영진(전남대학교 호남학연구원 HK연구교수) :

젊은 연구자들은 학위 논문들에 대해 후속 작업 하지 못한 채 다른 연구로 넘어가는 경우 많다. 이 상을 계기로 다시 출발해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상이 저로서는 채찍을 받은 느낌이 있다. 책을 내기 위해 더 분발하고 노력해야겠다.

이 글을 쓰게 된 계기는 일본이라는 하는 나라에서 ‘전후’란 단어를 들었을 때 느끼는 위화감에서 출발했다. 특히 8월이라는 시즌이 되었을 때, 일본 사회에서 벌어지는 일들이 평소에 생활하고 살아가는 일본사회와 다른 독특한 느낌이 저에게 주었다. 8월 6일의 히로시마를 시작으로 야스꾸니 신사 참배로 이어지는 일련의 과정, 텔레비전에서 나오는 다양한 특집 다큐 등, 일본에서 8월 한달간은 ‘전쟁’이란 것에서 끊임없이 무엇인가 이야기 하는 시기다. 왜 일본은 아직까지 전쟁을 이야기하는 가, 이 위화감이 연구의 출발점이었다.

어떤 이야기로 포커스를 맞출까 고민하다가, 역시 전후라고 하는 사회에서 중요한 부분들은 ‘죽음’의 문제를 살아남은 사람들이 수습할 것이냐란 질문을 던지게 되었다. 특히 일본은 전쟁으로 3백만에 가까운 사람이 죽은 나라다. 이러한 죽음 이후 그 사회는 어떤식으로 살아갈 수 있는 걸까. 이런 부분이 중요한 문제라고 생각했다.

일본에서는 ‘위령’이란 단어로 , ‘영을 위로하는 것’으로 이 문제를 이해해 왔다. 일본사회에서 하나의 죽음을 기억하고 애도하는 전통적인 방식이다. 그럼 야스꾸니 신사와 같은 방식도 있겠지만, 특히 지역사회라던가 일반 가족의 수준에서 죽은자의 대한 기억이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지는 가를 보고 싶었다.

또, 죽음이라고 하는 문제에서도 일본사회에서 15년 전쟁이라고 부르는 아-태 전쟁에서의 죽음 중, 가장 터부시 되는 죽음, 가장 순수하고 무모한 죽음인 ‘특공’이란 이들의 죽음을 지역사회는 어떤식으로 기억하는 가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이게 필드로 ‘가고시마’를 선택한 이유다.

가고시마 지역의 지도 중 인상적인 것은 바로 ‘특공 기지’의 지도다. 이 지역에 항공 특공으로만 19개의 기지가 있었다. 전라남도 크기의 현에 19개의 비행장이 있었던 거다. 이러한 기지가 사회적으로 어떤 문제들을 만들어 냈을 까라는 부분을 짚고 넘어가야 할 거다.

또 다른 지도는 다름 아닌 ‘공습’의 지도다. 45년 3월부터 일본에서 대도시 공습이 일상적이었다. 그런데 가고시마는 시골까지, 80%가 공습을 당한다. 바로 비행장을 파괴하기 위한 공습이었다. 그런데 왜 공습에 대한 기억은 잊혀지고 1990년대 이후 특공의 기억만 더 환기되었는가의 문제를 다루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런 문제의식에서, 전체 논문은 4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첫번째는 위령이란 개념에 대한 것이다. 사실 하나의 용어들, 개념들을 만드는 것 자체가 담론 정치의 장이다. 즉 죽은 이를 전사자로 부를 것인가, 혹은 전몰자로 부를 것인가, 그리고 이에 따라 이들을 ‘위령’할 것인가 아닌가의 문제는 중요한 정치적인 행위다. 따라서 담론의 정치학에 대한 고민이 필요했다.

두번째 장에서는 특히 전시기, 전후가 아닌, 전쟁시기의 전사자의 위령, 기념이라는 문제들에 대한 고찰했다. 위령이라는 애도의 방식은 전후에 뚝떨어진 것이 아니라 전시기부터 이어져 내려오던 중요한 국가적 행사였다. 위령은 1945년 8월이란 시점에서 잠깐 멈추고, 금지가 되었다가 50년대 중후반부터 재가동된다. 전전의 위령과, 전후의 위령이란 것이 양상이 어떻게 바뀌는가, 어떤 부분이 지속되는가의 문제들. 이런 부분들을 고찰한다는 측면에서 3장에서 전시기 위령에 대해 조사, 기술 했다.

4장에서 했던 작업은 특히 가고시마의 여러 특공기지가 있었던 마을에서 특공대에 대한 위령이 전개되었는가에 대한 논의를 참여관찰의 방법으로 자료를 모아가며 시작했다. 특공사라고 하는 부분은 일본 사회에서도 끊임없이 이야기 되는 인기 있는 이야기면서, 동시에 터부시 된다. 그들의 죽음을 이야기 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는 것이다. 한쪽에서는 성스로운 죽음, 또 한쪽에선 이 죽음 개죽음, 무모한 희생이란 측면을 말한다. 여기엔 양가적인 측면 있다. 이 죽음이라고 하는 부분에는 일본 내의 진보적 인사들도 함부로 말할 수 없는 아우라가 있다. 이를 어떤식으로 소환되고 기억되는가의 부분들을 중점적으로 참여관찰 자료를 모아가며 기술했다.

‘위령’은 이미 기억의 영역에서 기념의 영역으로 변화하고 있었다. 6-70년 지나면서 전쟁 체험이 풍화된는 것이다. 이 중 기념의 영역을 주도하는 것은 기념관이다. 가고시마에서도 그 조그마한 마을에 특공에 대한, 육군의 특공기지가 있던 마을이나 해군의 특공기지는 기념관 있다. 이런 기념관이 한해에 6-70만의 사람들이 온다. 가고시마 같으면 도쿄에서 비행기로 2시간반 걸리는데, 이곳에 매년 60만 이상이 와서 특공 기념관을 본다. 이 기념관을 만드는 사람은 어떻게 기념의 논리를 만들어내는가에 주목하고 싶었다.

지역공동체가 주도한 것도 있지만, 일반인, 특히 개인적 기억 있는 사람이 만드는 사설 기념관도 있다. 공식적인 곳은 고귀한 희생을 강조하고, 사설 기념관에서는 좀더 개인적인 기억을 이용하면서, 한쪽에서는 개인의 죽음의 비극성에 초점을 맞춘다. 양자가 모두 죽음의 비극성을 강조하면서 결국 특공 대원의 죽음을 미화하는 효과를 만들어 낸다. 이런 부분이 ‘희생’으로 강조하는 전후 일본에서 독특한 희생 담론을 만들어낸다고 보았다.

동시에 이런 기념관을 만들게 되는 동력에는 지역 사회에서의 마을 만들기와 가장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농촌 마을에, 특공이란 것이 ‘노스텔지어’를 환기하는 상품으로서 마을만들기 사업에 활용되는 것이다. 이는 지역 정치의 차원에서 전개되는 부분이다.

현장에서 새롭게 발견한 문제도 있었다. 제가 가고시마에 갔을 때, 가고시마에 특공 연구하러 왔다고 하면 다양한 반응들이 있었다. 이 과정에서 가고시마라고 하는 곳이, 기본적으로 ‘조선’이라고 하는, 심상 지리 혹은 실체인 조선 반도와 밀접한 관련 맺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조사 과정에서 조선인 특공대원이나 조선인 강제연행의 문제들을 발견한 것이다. 필드를 안 했으면 발견 못했을 문제들이다. 인류학적 작업은 필드와의 상호작용을 통해 만들어진다는 걸 이 연구를 통해 확인했다.

특히 19개의 비행장을 만들기 위해 4년동안 그 일을 누가 했는가의 문제가 이와 관련되어 있다. 6-70년대 자료를 보면, 가고시마의 전쟁기억에 대해 이야기 할 때는 특공에 대한 기억보다, 더 중요한 건 자기들이 비행장을 만들면서 힘들었던 기억이 환기된다. 동시에 그 기억 기술의 과정에 등장하는 ‘타자’들이 조선인, 강제 연행된 중국인 포로였다. 그런데 그런 이야기들이, 점점 8-90년대로 가면서 잊혀졌다. 왜? 이런 기억이 잊혀지는가. 이것이 잊혀지면서 일본인들의 전쟁 체험으로 기억이 바뀌면서 특공에 대한 기억으로 변이가 일어나는가. 기억의 정치. 강제연행이라고 하는 필드에서 만난 체험을 계기로 새롭게 발견했다.

결론을 내리기는 어려운 논문이었다. 그런에도 결국 죽음이라는 것, 죽은자들, 죽음이라는 것을 한 사회가 어떤 식으로 맞이하고, 그걸 기억하고 수습할 것인가의 문제가 가장 본질적인 문제라고 생각했다. 이건 모든 사회가 보편적으로 직면하고 있는 문제다. 그 한 방식으로서의 행위가 ‘애도’라고 한다면, 애도는 무엇이어야 하는가, 전후 일본사회라는 이 사회는 그 애도를 어떠한 특징을, 양상을 나타냈고, 어떤 방향으로 치닫고 말았는가. 본질적인 애도의 기능인 죽은자와의 만남, 죽은자의 이야기 듣기는 풍화되고 다른 기억으로 화하는 가,란 질문이 결론에서 하고 싶었던 이야기다.

연구를 마치며 깨달은 2가지 부분이 있었다. 먼저, 전후 일본사회와 죽음의 문제가 국민국가와 관계맺는 방식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논의라는 점이다. ‘국가를 위해 죽는다’라는 국민국가에서 공유되는 관습적 사유에 대해, 전후 일본은 비켜설 수 있었다. 어찌되었건 (잘못된) 전쟁때문에 300만이 죽었다는 경험은 그들로 하여금, 국가를 위해 싸우다 죽음 이라는 것에 대해 ‘의문시’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이는 전후 일본이 전 세계에 던질 수 있는 중요한 유산이었다. 그런데 이 체험이 희석되고 바뀌어 간다는게 안타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 한가지는 ‘죽음’의 성스러움의 문제다. 어찌되었건 죽음이라는 것은 보편적으로 성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여진다는 전제가 있었다. 죽은자에 대해선 우리가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전제. 그런데 최근, 세월호에 대한 이야기들을 보다 보면, 지금의 한국사회에서 죽음이란 과연 성스러운 것인가란 생각이 들었다. 죽은자에 대해서, 유족들에 대해서 사회가 반응하는 것이 과연 보편적인가. 이런 부분이 죽음에 대한 ‘성스러움’이란 개념이 바뀌는 것 아닌가. 마찬가지로 단식이라고 하는 것이 무의미해진 상황. 이는 죽음의 무의미성을 의미할 것이다. 그럼 이런 사회에서 애도는 무엇일까, 이 부분에 대해 다시 고민해봐야 할 것 같다.

 

김인수(연세대학교 국학연구원 박사후연구원):

김인수(연세대학교 국학연구원 박사후연구원):

논문을 어떻게 쓰게 되었는지부터 말씀드려야 할 것 같다. 저는 2,3,4장을 역순으로 썼다. 그 과정을 말씀드리겠다.

기본적인 문제의식은 바로 1930년대론, 그리고 이 시기의 ‘안정화’에 대한 것이었다. 1920년대까지는 소작쟁의가 활발하게 이루어졌는데, 1930년대 넘어와서 법적 다툼의 문제, 경제적인 이해관계를 다투는 방식으로 소작쟁의가 변화한다. 이와 관련해서, 1930년대의 조선사회성격논쟁이 일종의 통계논쟁이 되어 있는게 인상적이었다. 그래서 이걸 분석하기로 마음 먹었다. 특히 식민지 농정에서 ‘인식체계’라는 것이 결정적이었다고 해석하게 되었다.

특히 이를 지식생산양식의 분석으로 진행하고자 했다. 지식생산을 위해선 여러 가지 전제들이 필요하다. 이론과 자료와 방법론이 어떻게 나오고 있는지가 중요할 거다. 이를 통해 우리의 지식 생산이 방향이 정해지는 것이고, 또 사후에 어떻게 구조화되는지를 생각해볼 수 있었다. 이 과정에서 지식생산의 동아시아성을 충분히 생각해볼 필요가 있겠다는 생각도 했다.

이 논문은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일제하 조선에서 농정의 인식과 관련하여 식민지 사회의 지식장에 미친 영향을 당시의 인식체계를 구축한 세 가지 요인인 법, 조사, 사회과학에 대한 검토를 수행한 것이다. 법은 개념을, 조사는 범주를 결정하는 역할을 하며, 사회과학은 이론과 방법론을 제공한다. 이 논문에서 그 의미를 각각 추적하고자 했다.

논문의 시작은 5-6년전 한 연구모임에서, 전향한 사회주의자 인정식이란 사람에 대한 글을 검토하는 기회에서였다. 이 자료를 계속 읽다 보니, 그 안에 1930년대의 동아시아론이 등장하고 있었다. 사실 인정식은 그동안 ‘친일’이란 문제로서만 다루어졌기 때문에 그동안 이 책은 잘 보지 않던 책이다. 1930년대 일본의 동아시아론의 맥락 안에서 조선인의 동아시아론은 결국 친일의 문제와 연결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인정식의 전향은 어떻게 가능했을까? 그 지적 전환을 어떻게 추적할 수 있을까? 지식인이라고 한다면 지식생산에 필요한 소재나 이론, 자료, 방법이 있다. 바로 이 부분에서의 변화를 추적해서 어떤 국면이 전향의 결정적인 계기인지 아닌지를 테스트해보는 방식으로 연구를 진행했다. 그랬더니, 흥미로운 일이 있었다.

가령, 지표에서도 동아시아, 동양농업에서 경작규모의 영세성이나 역사유물론의 시선이, 38년의 전향 이후로는 토지생산성, 아시아적 생산양식으로 이동한다. 이론 안에서의 상충이 있는데, 기존에는 부정했던걸 다시 채용하는 과정을 목격할 수 있었다. 사회과학이 기준으로 삼는 지표와의 방식, 비교의 대상으로 선정하는 상대가 전향 전후로 현격하게 바뀌는 것이다.

지금까지는 조선사회성격논쟁은 1980년대에 사회구성체논쟁의 전사(前史) 형태로 이론적으로 소비했던 경험이 있다. 식민지반봉건사회론에서 일본에 미국을 넣고 조선에 한국을 넣으면 상당히 유기적으로 잘 들어맞았던 거다. 결정적 차이는 1930년대 논쟁은 통계논쟁이었다는 점이다. 1980년대 사구체논쟁은 이론적 정합성의 문제였지, 통계의 문제가 아니었다. 1920년대 중국에서도 사회성질논쟁이 있었는데, 여기에도 통계가 없었다. 일본에서 자본주의논쟁은 통계논쟁이었다.

사실상 통계는 장악력의 상징이다. 사회를 얼마나 통치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지를 보여주는 지표이기 때문이다. 통계는 식민국가의 조선사회에 대한 통치의 능력을 보여주는 지표가 된다.

당시 논자 중 박문규라는 사람을 예로 들면, 경성제대 2기생으로 스승이 시가타 히로시였다. 일본에서 1910년대 사회정책학회 활동을 많이 한 사람인데, 통계를 추출해서 개혁적, 정책적 논의를 해야 한다는 태도를 가지고 있었다. 조선에 처음 부임해서 한 일이 바로 통계자료를 수집해서 묶어내고 해제를 다는 작업이었다. 그는 조선은 비지성과 비합리가 난무하는 공간이어서 경성제대, 경제학교실에서 통계를 많이 만들어내고 수집해서 합리적인 방식으로 제압해 들어가야 한다는 기본 구상을 가지고 있었다. 바로 박문규가 이 조수일을 했다. 1933년에 논문을 냈는데, 일종의 조선인이 보여준 아카데미즘의 수준을 보여주는 논문이라는 평가를 받는 글이다. 조선총독부에서 수집한 통계 수치 24개를 내세우며 조선사회의 반봉건성을 설명하는 논문이다.

통계를 지식사적으로 놓고 보면, 통계는 사물에 대한 지식이 부족할 때가 아니라, 지식과 의견이 난무할 때 내는 것이다. 통계는 결정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면서 결정하는 방법이다. 또한 아카데미즘을 구축할 때 유용한 자원이다.

박문규는 학문적 훈련이 되어 있었던 반면, 인정식은 공산당에서 선전과 조직 업무를 열심히 하던 사람이었다. 1920년대 말에 검거되어 감옥에서 4년 반을 살고 나오는데, 여기서 나오자마자 통계 논쟁을 벌인다. 감옥에 있으면서 마냥 쉰게 아니라, 그 안에서 각고의 노력을 한게 보인다. 그런데 아카데미즘은 제도, 고유한 문법, 장 안의 논리가 있다. 입회의 자격이 필요한 것이다. 사회과학적 방법론이라는 게 그런 역할을 한다. 통계라는 독특한 지식생산수단이 만들어낸 효과가 장을 제어하게 되고, 그래서 그 속으로 걸어들어간 지식인은 ‘탈혁명화’, 전문가화되는 것이다.

또 참고자료를 추적하다보니, 조선사회성격논쟁에서 가장 많이 등장하는 자료가, 조선의 소작관행이라는, 1932년에 나온 보고서다. 이 자료는 지금도 식민지근대화론 논쟁에서 기초자료로 쓰인다. 2,000페이지가 넘는 자료인데, 간략히 얘기하면, 그 이전까지 하지 못한 면 단위에서 소작기간, 소작료, 소출 등의 자료를 수집해서 군으로 올려서 평균치, 통계치를 내는 자료다.

총독부에서 했던 소작제도에 대한 조사보고서 찾다 보니 35가지 종류가 잡혀나왔다. 그 내용분석 했더니, 면 단위에서 계수화, 지수화 되다 보니, 옆마을 소작료가격, 전국 평균치 같은게 드러난다. 소작료가 적정한지, 올릴지 깎을지를 알 수 있는 근거가 생긴 것이다. 예전에는 얼마가 적정한지 파악 못하니 맘대로 올리거나 할 수 있었는데, 그래서 논란이 많았는데, 통계 자료가 공개된 이후에는 상당히 조정이 이루어졌다. 어떤 수준이 적합한지의 판정이 가능해지는, 농정 문법의 변화가 나타난 것이다. 그래서 결론적으로, ‘조선의 소작관행’이라는 보고서는 식민국가의 사회 장악력을 보여주면서도, 사회관계를 숫자로 환산, 표상해서 사회갈등을 조정 타협할 수 있게 해주는 역할을 했다.

더 흥미로운 부분은, 1932년 ‘조선의 소작관행’에서, 질문 항목과 조사 방식이 1921년 일본에서 이루어진 소작관행 조사를 거의 그대로 본땄다는 점이다. 일본에서는 1885, 1912, 1921, 1936년 4회에 걸쳐 대대적 소작관행 조사를 수행했다. 특히 1921년에는 부재지주 조사를 최초로 했다. 이는 1932년 조사에도 그대로 반영된다. 부재지주, 그리고 소작지관리인, 우리말로는 ‘마름’인데, 이에 대한 조사 수치가 확보된다. 그 결과 전국에서 보면 전체 지주의 35%가 부재지주로 나온다. 소작지에 있는 소작인들이 부재지주 땅을 경작하는 소작인이 전체 소작인의 38%정도였다. 흥미로운 건, 일단 총독부는 조사 자료를 기초로 1934년에 조선농지령을 만들어서 마름에 대한 규제를 강력하게 한다. 또 동아일보를 필두로, 여러 신문에서 부재지주, 악지주, 악사음에 대한 담론들이 33-35년에 폭발적으로 늘어난다. 이 담론은 그 근거를 32년 조사 결과에 두고 있다. 이와 관련된 입법도 진행되었다.

결국 의도하진 않았지만, 이 자료는 중요한 전환을 가져오게 된다. 1920년대는 총독부의 착취를 욕하는 방식이었다면, 이 자료 이후로는 그 비난이 상당히 부재지주와 악지주로 넘어간다. 이들이 사회악으로 표상되고 이들을 규제하며 갈등을 해소하는 주체로서 총독부가 조정자의 위상을 갖게 되는 것이었다. 결국 총독부가 문제의 직접적인 타겟이 되는 구도에서 벗어났다는 점에서도, 사회장악력이 높아지는 결과를 낳기도 했다.

그런데 사후적으로 보니 부재지주란 범주 그 자체가 상당히 설득력이 없는 범주였다. 당시 부재지주의 기준이 되는 땅의 크기가 들쭉날쭉 했다. 이런 식으로 탈맥락화해서 기록된 것이었다. 내적 성립이 불가능한 걸로 조사를 하고, 타겟이 된 것이다. ‘조선의 소작관행’을 보통 일제시대 자료이자 객관화된 자료로 보는 경향엔 문제가 있다. 통계에서 개념이나 범주는 조사가 끝난 다음이 아닌, 조사 이전에 결정되어 기입되는 것이다. 여기에 권력이 개입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소작이라는 개념 자체도, 이것이 조선사회에 일반적인게 아니라, 구한말 일본에서 들어온 개념이다. 더 추적하면 일본 안에서도, 민법 제정과정에서, 토지임대차 관행에 대한 조사를 보면 생각보다 분명하지는 않았던, 기준이 일관되지 않은 것을 알 수 있다. 즉 개념에 변화가 있었던 지점이 있다는 걸 확인했다.

이상의 논의를 통해 결론적으로 식민 농정에서 1930년대를 지배했던, 세 가지 요소인 법, 조사, 사회과학이 만들어낸 인식체계는 식민지 사회를 ‘안정화’하고 식민지 지식인을 전향하게 하는 힘이었다, 라고 논리를 정리했다. 지식사회학적으로는 의미 있는 논문을 썼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지만, 정치사회학적인 측면이나 개념적인 부분에선 좀 더 보완이 있어야 한다는 점을 잘 알고 있다. 앞으로 더 보완해서 좋은 책이 나올 수 있도록 하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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