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 후반 조선-청의 외교 관계에 나타난 ‘편법’ 외교라는 특성

 

이 책에서는 특히 19세기 후반 조선(한국)과 청의 외교적 관계의 특성을 ‘편법’ 외교라는 개념으로 정리하고 있다. 천조상국(天朝上國)을 자처하면서 조선을 ‘속국’으로 간주하였던 청은 19세기 중반 이후 서구의 도전 아래 대등한 독립 주권 국가 간의 관계를 전제로 하는 근대적 외교 체제를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천조상국이라는 체면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한 청은 마지막 조공국으로 남은 조선에 대해 전통적 조공 관계와 근대적 외교 관계가 공존하는 현실 속에서 그 사이의 빈틈을 노리는 ‘편법’을 계속 모색하였다. 조선은 속국이지만 종래 내정·외교는 스스로 해 왔다는 ‘속국자주’론이나 조선이 서구 국가와 조약을 체결할 때마다 각국에 보내도록 요구한 ‘속방조회’라는 것은 그 대표적 사례가 된다. 이를 통해 청은 ‘속국’ 조선을 근대적 식민지·보호국으로 ‘치환’하려는 사고를 보여 주었으며, 이후 조선과의 외교 관계에서도 지속적으로 상국의 ‘체통’에 얽매이는 모습을 보여 주었다. 김형종 교수는 이러한 설명을 통해 청이 근대적 외교 체제와 그것을 뒷받침하는 관념을 받아들이는 데 여전히 큰 한계가 있었음을 입증하였다. 이 점은 조선과 청이 근대화에 실패한 점에 대한 근본적인 원인으로 작용하였다고 논파하고 있다.

 

 

저자 소개

김형종(金衡鍾)

서울대학교 역사학부 교수. 서울대학교 동양사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교 대학원에서 중국근대사를 전공으로 석·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저서로 『아틀라스 중국사』(공저), 『청말 신정기의 연구』, 『1880년대 조선-청 공동감계와 국경회담의 연구』가 있고, 역서로 『신중국사』, 『중국현대사상사론』, 『진인각, 최후의 20년』, 『1880년대 조선-청 국경회담 관련 자료 선역』, 『서문으로 보는 중국의 역사 사상』, 『복혜전서』 1-3, 『국역 《청계중일한관계사료》』 1·2·3·4·5 등이 있다.

 

 

차례

머리말

제1장

제1장 서론

  1. 집필의 목표
  2. 이 책의 구성
  3. 몇 가지 개념의 사전 정리

제2장

제2장 1870년대 중후반까지의 조선–청 관계

  1. 천조체제와 ‘속국자주’
  2. 일본의 도전과 조선· 청의 대응

제3장

제3장 1880년대의 조선과 청: ‘속국자주’론의 딜레마

  1. 조선의 문호개방과 「조· 미수호통상조약」
  2. 임오군란과 청의 대응
  3. 청의 새로운 군사전략
  4. 「중국· 조선상민수륙무역장정」의 의정(議定)
  5. 갑신정변과 천진조약

제4장

제4장 1880년대 조선· 청의 영토 분쟁과 국경회담

  1. 1880년대 영토 분쟁의 출현
  2. 제1·2차 공동감계와 국경회담
  3. 국경회담의 무산과 청의 대응

제5장

제5장 청· 일전쟁 전후 조선-청 관계의 재편

  1. 원세개의 파견과 ‘속국체제’론
  2. 청· 일전쟁 직전의 조선-청 관계
  3. 청· 일전쟁과 조선 ‘독립’
  4. 대한제국 성립과 「한· 청통상조약」 체결

제6장

제6장 결론

 

참고문헌

찾아보기

발간사

본문 중에서

 

청의 조선 정책은 1882년을 전후하여 분명하게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고 해도 좋다. 이른바 유길준의 ‘양절체제’론이나 권혁수가 제기한 ‘하나의 외교, 두 가지 체제’라는 분석의 틀이 본격적으로 적용되는 시기가 되는 것이다.

하지만 이 당시 청과 조선의 관계는 전통적 상국-속방 관계도 아니고, 그렇다고 근대적 종주국과 속국(보호국)의 관계가 아닌 애매모호한 상태에 머물러 있었던 데다가, 이것은 만국공법이나 조약을 통해 새로운 시대변화에 맞춘 관계로 전환하려는 노력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 때문에 청 말 수많은 관료·사대부들이 조선의 외교나 정치를 “청이 대신해서 [조선의 정치를] 주지하는(‘代爲主持’)” 방안으로 조선에 대한 직접적인 개입과 통제(內地化나 州縣化, 監國大臣의 파견이나 保護國化 등)를 제안하였지만, 실질적으로 청의 조선 정책을 책임진 직예총독 겸 북양대신 이홍장은 시종일관 청이 뒤에서 “몰래 유지하고 보호하는 것(密爲維持保護)”을 선호하는 태도를 고집하였다. 그는 조선에 대한 통제권 강화에는 기본적으로 동조하면서도 고위 관료나 감국을 파견하게 되면 사사건건 열강에 대해 중국이 그 책임을 지게 될 뿐만 아니라 중국이 지금까지 간여하지 않았던 조선의 국내 정치에 개입하면 이러한 갑작스러운 정책 변경(‘속국자주’론에서의 이탈)은 조선의 강력한 반발을 살 것이라는 우려를 내세워 이를 줄곧 반대하였다. 이것은 시종일관

견지되는 이홍장이나 청 조정의 조선에 대한 거의 일관된 정책이었다.

본문 14쪽

 

대등하고 독립한 주권국가 사이의 교섭이라는 원칙을 수용하는 것 자체가 중국과 주변 국가의 위계질서를 전제로 한 천조체제를 바탕으로 삼는 청 왕조의 정통성·정당성을 부인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따라서 이러한 ‘치환’의 희망은 여전히 근대적 국제질서의 전면적인 수용을 거부하면서 무너져 가는 천조체제와 천하관념을 억지로 지탱하려는 집착을 버리지 못한 청의 일방적 ‘상상’과 ‘희망’에 지나지 않았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청·일전쟁에서의 청의 패배와 이후의 사태 전개에 보이는 국제법, 나아가 힘의 논리를 기반으로 하는 제국주의의 전성기라는 현실 세계의 정치적 전개는 이러한 상상과 희망의 실현을 결코 용납하지 않았다.

52쪽

 

조선이 문호개방 정책을 취하던 초기에 청의 협조를 간절하게 원하였던 것과는 달리, 1880년대에 들어와 청의 개입이 본격화되어 조선의 왕권과 국정에 심각한 잠재적인 위협으로 등장하자, 도리어 조선 측의 반발이 강력한 움직임으로 나타나게 된 것은 앞으로 살펴볼 양국 관계에서 가장 두드러진 특색으로 드러나기 때문이다. 이 시기는 양국 관계가 가장 밀접하면서도 동시에 조선의 반발이 가장 강하였던 갈등과 마찰의 시기로, 수백 년에 걸친 양국 관계에서는 오히려 예외적이었던 시기였다고 해야 할 것이다.

255쪽

 

이화원이 1860년 영국·프랑스 연합군의 공격으로 파괴된 지 이미 20년이 지났는데, 광서제를 사실상 괴뢰로 만들어 권력을 독점한 자희태후는 광서제가 성년이 되어 친정을 하게 되면 ‘귀정(歸政)’한 다음 노후를 보낼 곳을 마련한다는 명목으로 1886년부터 이화원 공사를 시작하는 사치를 마다하지 않았다. 청불전쟁이 끝난 다음 거의 1천만 냥에 가까운 경비가 들어갔다고 하는 이화원의 재건을 주동한 책임자 순친왕 혁현(광서제의 親父)은 1885년 성립된 해군아문대신(海軍衙門大臣)으로 9년 동안 재임하는 도중, 그 경비를 여기에 빼돌리느라 단 1척의 새로운 군함도 구매하지 않았다.

따라서 청·일전쟁 패배의 ‘원인(遠因)’은 「천진조약」보다는 오히려 이러한 점에서 찾아야 한다는 주장은 충분한 설득력이 있다. 청 말자강운동의 ‘실패’ 원인을 중심 지도층의 소질 불량과 관련하여 논의할 경우, 무엇보다도 거기에 대한 가장 큰 책임을 져야 할 것은 장기적인 정치적 통찰이나 계획이 전혀 없었던 자희태후, 즉 그녀의 ‘오국(誤國)’·‘화국(禍國)’에서 찾아야 한다는 지적도 마찬가지다. 오늘날의 이화원의 곤명호에는 여전히 자희태후가 해군아문 경비를 빼돌려 만든 대리석 유람선이 그 아름다운 모습을 자랑하면서, 청 조정의 무능과 부패를 여실히 상기시켜 주는 상징으로 남아 있다.

480-482쪽

 

이 때문에 ‘평행지국’으로서의 양국의 외교 관계가 20세기에 접어들 무렵에야 정식으로 출범하였지만, 양국이 그러한 관계를 누릴 수 있는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20세기에 들어오면서 중국의 의화단 사건이나 러·일전쟁 등 국제적 격변이 거듭되고, 일본의 한국 침략이 본격화되면서 양국의 외교 관계는 곧바로 중단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한국의 외교권이 박탈된 「을사조약」 후인 1906년 2월 총리아문은 다른 나라처럼 주한 공사를 철수시키고 대신 총영사 마정량(馬廷亮)을 파견하였다. 1910년 대한제국이 일본에 합병되고, 1911-1912년의 신해혁명으로 청이 무너지면서 그는 청에서 파견한 마지막 총영사가 되었다. 이후 거듭된 정치적 격변으로 말미암아 주지하듯이 양국이 다시 정식으로 국교를 수립하기까지 상당한 긴 시간이 필요하게 되었다. 청·일전쟁의 패배로 확인되는 중국의 조선 정책의 실패가 양국이 거의 비슷한 무렵에 앞서거니 뒤서거니 ‘몰락’을 맞이하는 결과로 이어졌던 것은 광서제가 ‘보거순치(輔車脣齒)’로 표현하였던 양국 관계가 지닌 무게나 의미를 다시 한번 되새기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