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중남미에 대해 무엇을 상상하는가. 빈곤, 마약, 폭력, 열정, 체게바라? 인구 6억 2,500만. 다양한 언어와 인종과 문화가 33개 이상의 나라에서 각자 모습으로 공존하는 중남미의 진짜 모습을 민원정 칠레 가톨릭대교수가 전해준다.
복잡한 계급·빈부격차 등의 사회 전반 문제에도 상명하복 강요 않는 칠레의 상호존중 고유문화 개헌 투표부결에도 흔들리지 않는 칠레 민주화
"너 어느 학교 나왔어?" 칠레 현지인 직원을 야단치던 한국 주재원이 말했다. "저요? 무슨 학교 나왔는데요." 직원의 말대꾸에 비위가 상한 주재원이 다시 말했다. "뭐? 도대체 학교에서 뭘 배웠어?" 한국식 물음에 칠레식 대답이 이어졌다. "이러저러한 과목을 배웠습니다."
수업 조교와 만나기로 한 날. "내가 돈 줄게 오는 길에 커피 한 잔만 사다 줄래?" 부탁한 커피를 들고 연구실로 들어서며 조교가 말했다. "제가 할 일은 아니지만, 교수님께는 특별히 해드립니다."
한 학생이 성적 정정을 요구했다. 과제물이든, 시험이든, 교수는 채점기준표를 제시해야 한다. 채점기준표에도 불구하고 성적에 불만인 학생은 때로는 학생 담당 사무실을 통해 공식서한을 보내기도 한다. 개인적인 사정을 대며 우는소리를 하는 학생은 드물다.
자기 의사를 밝혀라. 단 떼쓰지 말고 논리를 대라. 개똥철학이라 비난을 받을지라도 근거와 논리는 필수다. 중남미 대화의 기본이다. 아이가 어른들의 대화에 끼어 의견을 밝혀도 버릇없다고 야단치지 않는다. 오히려 어른들은 아이의 이야기를 귀 기울여 듣는다. 상사나 교수의 지시에 부하직원도, 학생도, 자기 의견을 얹는다. "어디서 배운 버르장머리야"라던가 "어디 감히"는 없다. 무응답은 상대방의 의사를 무시하는 행위다. 아랫사람에게 언짢은 소리를 할 때도 논리가 따라야 한다. 상명하복을 자연스럽게 생각하지만, 이는 규칙을 지키고 변칙을 허용하지 않으며 상사에 대한 존중을 잃지 않되 자신이 맡은 일만 한다는 의미다. 당연히 일의 속도는 느리다. 위아래 모두 선을 넘지 않는 범위에서 요구하고 응하는 관계는 지나치게 냉정하고 차가워 보이기도 한다. 피해를 주지도 받지도 않으며 각자 할 일만, 원칙대로만 처리하는 모습은 답답하다. 그러나 투박하지만 얍삽하지 않고, 사람에 대한 존중을 기본으로 한다. "하라면 해야지 무슨 말이 많아!"는 통하지 않는다. 갑질의 결이 다르다. 아랫사람에게 군기를 잡겠노라 야단을 치거나, 큰소리를 내는 일은, 특히나 엘리트 사회에서는 있을 수 없다. 못 배운 사람이 하는 짓이라 여긴다. 개인의 인성에 따라 차이는 있을지언정, 아무나 누리는 혜택이 아니기에 교육 수준이 높을수록 자부심이 높기 때문이다.
노동시간, 임금협상, 부당해고, 성희롱, 성추행 등 노동현장에 있는 문제는 물론 있다. 피부색에 따른 암묵적 계급의식은 함정이다. 그러나 시간이 걸려도 의견을 조율하며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은 계급과 별개의 문제다. 쿠데타로 시작된 피노체트 군사 독재(1973~1990)도 국민투표를 통해 종식됐다.
2019년 10월에 발발한 시위와 코로나를 겪으며 각자의 "규칙을 지키고 변칙을 허용하지 않는" 범위가 충돌하기 시작했다. 2020년 10월, 약 78%의 국민이 헌법 새로 쓰기에 동의했다. 2021년 5월, 새 헌법을 쓸 위원회가 구성되었다. 계획대로라면 2022년 중순 새 헌법 초안이 나오고 국민투표를 통해 승인을 받은 후 2023년부터 시행될 예정이었다. 그러나 지난 9월 4일 투표에서 약 62%의 국민이 새 헌법 초안에 반대했다. 엘리살데 상원의장의 말대로 이제 칠레 정부는 "새 헌법 초안을 위한 협상이 아닌, 가장 적절한 절차를 수립하고 대다수 칠레인이 수용하고 지지하는 문서를 준비하기 위해" 다시 협상을 시작했다.
작금의 칠레 상황은 답답하기 그지없다. 그러나 그들은 라울 소토 하원의장의 말대로 "천천히, 그러나 확실하게 함께 전진"하는 데 합의의 의의를 두고 나름의 오랜 협의 과정을 거치는 중이다. 비록 그들의 속도가 세상보다 느릴지라도, 칠레는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노력 중이다. 선을 넘지 않고 천천히, 그리고 확실하게.
민원정 칠레 가톨릭대 교수·서울대 아시아연구소 선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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