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민자치] 피크 코리아 [4] 갈등 공화국: ‘헝그리 사회’에서 ‘앵그리 사회’로 [주민자치] 피크 코리아 [4] 갈등 공화국: ‘헝그리 사회’에서 ‘앵그리 사회’로](https://snuac.snu.ac.kr/2015_snuac/wp-content/uploads/2026/07/화면-캡처-2026-07-13-103639.png)
[주민자치] 피크 코리아 [4] 갈등 공화국: ‘헝그리 사회’에서 ‘앵그리 사회’로
대한민국은 ‘갈등 공화국’이다. 세계 어느 나라를 가든 님비NIMBY: Not In My Backyard나 핌피PIMFY: Please In My Frontyard와 같은 행태는 있기 마련이지만, 한국은 온갖 종류의 사회갈등이 개인과 집단 사이에서 일어나고 있다. 단일민족의 신화 아래 언어와 문화의 동질성으로 인해 조그만 차이도 용납하지 않는다. ‘같음의 정학靜學’에 빠져 ‘다름의 동학動學’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다. 정부의 공공정책을 둘러싼 다양한 이해관계자 사이의 충돌을 넘어 이념, 빈부, 지역, 세대, 젠더, 고용 등 여러 영역에서 갈등을 볼 수 있다. 마치 사회갈등 박람회를 차린 것과 같다.
사회갈등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어느 사회에나 존재한다. 가치, 자원, 보상을 둘러싼 개인이나 집단 사이의 이해다툼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인간이 질병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듯이 사회도 문제를 지니기 마련이다. 인간이 만든 질서는 자의적이기에 완벽한 사회란 있을 수 없다.
그러나 질병을 다스리지 못하면 인간도 생명을 다하듯이, 사회도 병폐를 고치지 못하면 지속하기 어려워진다. 이 점에서 사회갈등에 따른 불안과 긴장은 문제해결을 위한 진단과 처방을 가르쳐준다. 갈등 없는 사회는 오히려 역동성이 떨어지고 변화를 위한 잠재력을 갖기 어렵다.
사회갈등이 제도화를 통해 흡수될 수 있을 때 화해와 통합이 이루어질 수 있지만, 그렇지 못하면 사회는 와해하거나 붕괴한다. 사회의 발전과정에서 갈등이 지니는 양면성이다. 원래 민주주의는 사회갈등에 기반을 둔 정치체제이다. 소수에 의한 독점을 막아주고 승자와 패자 사이의 주기적 교체를 통해 기회의 균등을 늘려준다. ‘민주주의의 엔진’으로 사회갈등을 볼 필요가 있다. 그러나 사회성원들이 민주주의의 합의된 게임의 규칙을 따르지 않으면 사회갈등은 건설적이기보다 파괴적일 수 있다.
일찍이 정치사상가 마키아벨리N. Machiavelli는 갈등이 논쟁disputando으로 가면 긍정적인데 투쟁combattendo에 빠지면 부정적이라고 지적했다. 우리는 크고 작은 분쟁이 일어나면 대화로 풀기보다 싸움으로 해결하려 한다. 게임의 규칙을 따르지 않고 조직이해 아래 극단으로 싸우다가 원칙 없는 야합이 이루어지는 경우가 적지 않다.
우리는 토론, 협상, 타협의 문화가 부족하다. 어린 시절부터 가정, 학교, 직장에서 차이를 인정하고 더불어 살아가는 민주시민으로서 훈련을 통해 매사 소통과 대화로 문제를 풀어가는 훈련이 필요하다.
우리 사회가 온갖 갈등으로 쌓여 있는 것은 공정이란 이름 아래 매사에 게임의 규칙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공정이란 공평하고 정당한 것을 뜻한다. 출발의 불평등을 줄여야 경쟁의 과정에서 결과의 평등에 기여할 수 있다.
작금 청년세대가 좌절하고 있는 이유는 기회의 문이 닫혀있기 때문이다. 기회균등조차 ‘아빠찬스’ 등 위법과 특혜에 의해 망가지고 있다. 사회경제적 지위의 차이로 인해 능력주의가 또 다른 세습을 낳고 있다. 이러한 모순을 해결해 주는 것이 출발에서 결과에 이르기까지 모든 과정을 지배하는 사회성원들이 합의한 게임의 규칙이다.
어느 사회고 격차가 있기 마련이다. 사회성원이 합의한 공정한 게임의 규칙이 작동하면 격차가 있더라도 대립과 갈등보다 공존과 화합으로 나아갈 수 있다. 패자나 승자가 모두 받아들이는 규범이나 원칙이 필요하다. 그래야만 낙오자도 다시 일어나 뛸 수 있다. 영원한 승자도 영원한 패자도 없다. 더불어 사는 공동체가 가능하다.
그러나 공정하다고 해서 반드시 정의가 따르는 것은 아니다. 절차로서 공정과 달리 정의는 본질에 관한 것이기 때문이다. 종교, 도덕과 같은 윤리적 차원의 해석과 법, 권력과 같은 현실적 차원의 집행 사이에서 정의는 시공간적으로 서로 다른 모습을 지닐 수밖에 없다. 모든 인간의 자유, 존엄, 동등을 주장하는 세계인권선언도 세속종교와 국가권력 앞에서 무력한 이유이다. (중략)
출처 : 월간 주민자치(http://www.citizenautonomy.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