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신문] 임현진 칼럼 – 시대정신을 호도하지 말라
[창립소장 임현진 교수(시민사회 프로그램 디렉터)]
요즈음처럼 잘먹고 잘사는 시대가 있었을까. 그러나 이 시대를 사는 한국인들은 스스로 불행하다고 생각한다.
역사를 되돌아보면 거의 모든 왕조마다 백성은 기아에서 헤어나지 못했고 역병이 자주 돌았다. 조선왕조 500여년 중 거의 2/3에 해당하는 기간 동안 1000여건의 역병이 돌았다.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17세기 후반 역병으로 죽은 사람이 60만명에 달했다. 이는 당시 인구 600만명의 10%에 해당한다.
한국은 2019년 인구 5000만명 이상에 1인당 국민소득 3만달러가 넘는 3050클럽에 합류했다. 일본(1992) 미국(1996) 영국(2004) 독일(2004) 프랑스(2004) 이탈리아(2005) 다음으로 일곱번째다.
그러나 한국인의 행복도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8개국 중 꼴찌다. 그간 삶의 양이 늘어난 반면 삶의 질은 나빠지면서 물질적 풍요에 비해 정신적 만족을 누리지 못하고 있다. OECD 38개국 중 자살률이 가장 높고, 연간 노동시간이 두번째로 많다. 특히 빈부격차가 커지면서 상대적 박탈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1인당 국민소득 1만달러에서 2만달러를 거쳐 3만달러를 돌파하기까지 기간은 일본이 8년으로 가장 짧았고, 스위스가 12년, 영국이 15년 걸렸다. 한국은 가장 긴 18년이 걸렸다. 산업화와 민주화라는 험난한 터널을 지나기가 쉽지 않았다.
지구의(地球儀) 위의 한국은 작다. 그러나 남북을 합치면 영국과 국토면적이 비슷하고 인구는 독일보다 적지만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보다 많다. 비록 중국 일본 러시아에 끼어 있지만 동북아지역의 종석(宗石)으로서 지역강국으로 나아갈 수 있다. 통상과 외교에서 한몫을 충분히 할 수 있다. 분단이 안타깝고 통일이 그리운 이유다.
모순과 대결의 방향으로 재세계화
코로나19는 디지털 전환을 가속화시키고 있다. 비대면이 정상이 되면서 사회관계가 원격 접촉·소통으로 바뀐다. 4차산업혁명은 메타문명(meta civilization)의 출현을 예고한다. 가상과 현실의 결합을 넘어 시공간에 제약받지 않는 새로운 차원의 세상이 나타난다. AI로 무장한 로봇이 인간을 대신한다. 3D 프린터가 필요로 하는 거의 모든 물건을 만들어낸다. 인간은 주체의 자리에서 물러난다. 유토피아가 아닌 디스토피아가 될 수 있다.
코로나19의 세계적 대유행 이후 거의 모든 나라들이 포퓰리즘으로 흐르고 있다. 방역이란 이름 아래 통치가 시민저항을 불러오고 민주주의를 위협한다. 자국 중심의 국수주의를 넘을 인류공존의 전망은 흐릿하다. 지난달 영국 글래스고에서 열린 제26차 유엔기후변화협약 당사국총회(COP26)에서 보았듯이 선진국은 후진국에 책임만 전가하지 도와줄 생각을 하지 않는다.
무한질주하던 세계화는 코로나19로 멈칫하더니 미중 패권경쟁이 격화되면서 균열이 일어나고 있다. 모순과 대결의 방향으로 재세계화(re-globalization)가 진행되고 있다. 아시아지역의 영향권을 확보하려는 중국과 이를 저지하려는 미국이 서로 글로벌 가치사슬(Global Value Chain)을 장악하려는 과정에서 생산과 공급의 공백이 나타나고 있다. 한국도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줄타기를 벗어나 자강을 위한 외교와 안보역량을 키워야 할 것이다.
우리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시스템을 보강하면서 리더십을 바로 세워야 한다. 한국이 처한 국내외적 현실에 대한 적확한 진단아래 미래창발적 비전을 갖고 적실성 있는 발전전략을 펼 수 있는 지도자가 나와야 할 것이다. 무엇보다 보수와 진보 사이에 사회대타협을 이끌 수 있는 돌파력을 지녀야 한다. 자신의 이념적 기본색이 있더라도 진영논리를 넘어 시대정신을 선도하는 리더십이다. 그런데 우리 여야 대선후보들은 정책경쟁보다 서로 비방과 욕설에 열을 올린다.
시대정신이란 세상을 같이 살아가는 사회구성원들의 공통된 염원을 담는다. 아래로부터 투영되지만 위로부터 조작되기도 한다. 사회변동 와중에서 시대가치는 바뀌기 마련이다. 자유 성장 분배 복지 못지않게 생태 평화 인권 공정 통합이 중요하다. 문제는 동서고금을 통해 지도자들이 시대정신을 왜곡하고 편용해왔다는 것이다.
스마트 리더십이 필요한 시기
새시대 새정치는 하루아침에 오지 않는다. 새 대통령은 이러한 역사의 대면을 통해 잘못된 과거를 되씹어보고 올바른 미래를 만들어가야 한다. 현재적 시각에서 과거의 공과를 비판적으로 미적(微積)해 미래구축을 위한 자산으로 키워야 할 것이다.
우리는 정치인(politician)은 많은데 정치가(stateman)가 드물다. 필자는 지혜와 관용의 연성(soft) 리더십과 용기와 뚝심의 경성(hard) 리더십을 합친 스마트한 지도자가 필요하다고 본다.
조지프 나이(Joseph S. Nye) 하버드대 교수는 스마트한 지도자는 국가경영의 과정에서 국민을 매혹시킬 포용력을 갖추고 그들을 이끌 수 있는 추진력을 겸비한 인물이라고 했다. 진짜와 가짜가 섞여 선정(善政)을 참칭하는 정치인들을 보면서 스마트한 정치가의 출현을 기다려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