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신문] 임현진 칼럼 – 지역의 위기 ‘가벼운 공동체’에 길 있다
[창립소장 임현진 교수(시민사회 프로그램 디렉터)]
인간은 누구나 지역에서 태어나 살다가 죽는다. 이 지역이 과거 농촌이라면 지금은 도시다. 현재 우리 국민중 92%가 도시에 거주한다. 도시가 농촌을 대체하고 있다. 농촌이 중요한 이유는 단지 인구를 배출하고, 식량을 조달하고, 환경을 정화하는 데만 있지 않다. 공동체의 모태로서 농촌에서 인간이 희로애락의 공동생활을 하면서 갈등과 협력을 배우고 사람다워질 수 있기 때문이다.
필자는 농촌으로서의 지역이 저출산과 고령화를 극복하고 미래 한국의 지속가능성을 높여줄 해답을 제공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런데 농촌에 아이울음 소리가 그친 지 오래고, 초등학교는 문을 닫고 빈집이 늘어나고 있다. 작년 기준으로 전국 243개 지자체 중 절반 이상에서 인구가 줄었다. 이 추세라면 대도시만 살아남고 나머지 지방이 사라지는 것은 시간문제다.
농촌이 빚더미에 시달리고 있는 것은 잘 알려졌다. 이보다 더 큰 고민은 젊은이를 찾기 어렵고 60세 이상의 노령자가 대부분이라는 사실이다. 이렇듯 농촌이 공동화되는 것은 젊은이들이 일자리를 찾아 대도시로 떠나기 때문이다. 농촌에서 미래를 보장해줄 좋은 일자리를 찾을 수 없기에 그들은 기회의 장소인 수도권으로 끊임없이 옮겨가고 있다. 이제 농촌은 수도권을 보조하는 곳으로 전락했다.
풀뿌리 민주주의 여전히 성공 못해
올해는 지방선거가 부활된 지 30년 되는 해다. 그런데 이번에 개정된 지방자치법은 가장 중요한 ‘주민자치’ 조항을 삭제했다. 자치분권 시대를 거꾸로 가고 있다. 지방분권과 자치는 주민참여를 통해 민주주의를 활성화시킨다. 그러나 불행히도 우리의 현실은 그렇지 않다. 민선 7기까지 당선된 단체장 중 400여명이 기소되었다는 사실은 풀뿌리 민주주의를 다지는 데 성공적이지 못했음을 자인할 수밖에 없게 만든다.
오직 당선을 위해 편법을 마다하지 않다가 자신에게 표를 준 이익집단의 강력한 로비에 4년 내내 시달린다. 선거에서 이기기 위해 실현불가능하고 부적합한 정책을 남발한다. 자신의 이익을 극대화하려는 지역 토건세력의 발호로 개발을 둘러싼 주민들 사이에 갈등이 끊이지 않는다.
지금 지방자치가 표류하고 있다. 토건세력의 사적 이해관계에 따른 지역의 오도된 선거과정이 주민참여와 소통, 토론을 통한 바람직한 정책결정으로 이어지지 못하게 만든다. 지역의 미래를 위해 공공의 문제를 인지하고 정책화하는 과정에서 숙의와 공론을 통한 학습과 실천이 따르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동안 추진해 온 균형발전 명목의 지방 혁신도시 실험도 소리만 요란하지 아직 갈 길이 멀다.<본지 2020년 10월 8일자 임현진칼럼 참조> 거의 모든 정책이 위에서 정해져 내려오면서 지역 현장의 목소리가 잘 반영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역의 목소리를 이른바 떼쓰기로 치부하고, 재정지원을 통해 지역에 떡을 떼어주는 식의 달래기 정책은 의미를 상실한 지 오래다. 지역 주민이 스스로 문제해결을 위해 함께 기획하고, 실행할 수 있는 기회를 넓혀주어야 한다.
수도권으로 떠난 청년들이 지방으로 다시 돌아오는 비율은 9.5%에 불과하다. 85.3%가 수도권에 남으려 한다. 일자리를 비롯한 사회 문화 복지를 누릴 수 있는 기회는 수도권이 절대적으로 유리하다. 주거와 교육비용이 부담스럽지만 수도권에서 얻을 수 있는 혜택이 지방의 청년들을 수도권으로 몰리게 한다.
특히 지방을 쉽게 떠나는 이유는 교육기회를 통해 사회계층의 사다리를 탈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아이들은 어려서부터 서울에 있는 대학에 가야 한다고 세뇌교육을 받고 산다.
수도권 중심의 대학 서열화는 지방을 경시하고 지방자치와 분권에 대한 문제의식을 소멸시킨다. 마음이나 몸이 이미 중앙에 종속되어 있기에 지역사랑에 기반한 주민자치의 자긍심이 약화되어 있다.
지역의 위기를 기회로 바꾸기 위해 필자는 ‘가벼운 공동체’ (light community)를 대안으로 제시하고자 한다. 사회혁신 분야의 대가 에치오 만치니(Manzini) 밀라노 공대 교수는 현대사회의 탈근대적 변화로 인해 과거와 같은 방식의 연고에 기반한 공동체를 부활하는 것은 어렵다고 본다. 좀더 유연하고, 열려 있고, 약한 연결고리에 기초한 가벼운 공동체를 통해 각자도생의 삶의 방식을 극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21세기 민주주의 출발점 ‘가벼운 공동체’
제4차산업혁명이라는 전지구적 맥락에서 볼 때 한국사회는 지역 주민의 끊임없는 이동과 이주로 인해 지난날처럼 강한 연결망을 유지하기 어려운 여건이다. 그러므로 지연 혈연 학연 등의 연줄에 기초한 공동체를 재생하기보다 풀뿌리 주민 스스로 조금은 가벼운 마음으로 누구나 쉽게 들어가고 적응하고 또 필요하면 쉽게 옮길 수 있는 사회 복지 문화공간을 만들어주어야 한다. 귀촌 귀농 귀향을 바라는 젊은이들에게 지역에서 열린 참여환경을 마련하는 것이 재정적 지원보다 중요하다.
자치와 분권을 통해 지역을 되찾기 위해서는 가벼운 공동체를 지향하는 아래로부터의 주민자치가 활성화되어야 한다. 21세기 민주주의는 가벼운 공동체를 지향하는 참여와 공유를 통한 풀뿌리 주민자치에서 출발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