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신문] 임현진 칼럼 – 혐오와 차별을 넘어
[창립소장 임현진 교수(시민사회 프로그램 디렉터)]
인류 역사는 전염병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고대부터 인류를 괴롭혔다. 제국을 파괴하고 문명을 위협했다. 천연두로 인한 아즈텍과 잉카제국의 붕괴, 그리고 스페인독감 이래 각종 신종바이러스에 따른 문명의 위기가 그것이다. 전쟁보다 병균으로 죽은 숫자가 훨씬 많았다. 바이러스가 미사일보다 무섭다는 말이 실감난다.
인류에게 가장 큰 공포를 준 세계적 대유행전염병(pendemic)으로 페스트를 들 수 있다. 14세기 중국에서 발원해 당시 인구 1/3에 해당하는 3000만명을 희생시켰고 실크로드를 따라 유럽으로 건너가 7500만명을 사망에 이르게 했다.
700여년 전인 1347년 11월. 페스트로 인해 오도가도 못하고 흑해 연안을 떠돌던 배들에 대해 마르세유는 입항을 허가했다. 이 전염병이 도시의 많은 주민을 죽음으로 몰아갔고 남부 프랑스와 이탈리아를 거쳐 프랑스 전역, 영국 아일랜드 네델란드 스칸디나비아 모스크바로 전파됐다.
세계적 전염병이 무섭다는 것은 죽음이라는 공포가 정신을 메마르게 하기 때문이다. 내가 지하철에서 기침을 하면 승객이 피하듯 나도 마스크를 쓰지 않은 사람으로부터 떨어지려 한다. 이른바 ‘사회적 거리두기’는 가급적 모임을 줄이고 만나더라도 간격을 두라는 것인데 대화와 교감의 기회를 줄일까 걱정이다. 인적이 끊어지고 소통이 막힌 지역에서 감염의 공포보다 무서운 것이 나와 너를 ‘우리’로부터 갈라내는 것이다. 폐쇄공포로 인해 분노 우울증 공황장애가 올 수 있다.
카뮈(Albert Camus)의 ‘페스트’는 나치 치하에서 프랑스의 해방을 은유한 것이지만 전염병이란 재앙 아래 인간의 우애와 연대가 얼마나 어렵고 중요한가라는 메시지를 전달해준다. 어려움에 처한 인간의 다양한 행태를 통해 반드시 선악 강약 빈부라는 이분화를 넘어서려 한다.
신부 파늘루와 달리 불가지론자인 의사 리외는 신에 의탁하기보다 자신의 직무에 충실하고자 한다. 관념적 실천, 형식적 기부, 종교적 맹신, 세속적 타협의 미망을 보여준다. 그는 의사로서 맡은 바 치료에 전념함으로써 가능한 많은 사람을 살리려는 실존적 인간의 표상이다.
한중일의 낯뜨거운 코로나19 대응
세계보건기구(WHO)는 이제서야 코로나19가 최고 위험단계라고 발표했다. 중국 눈치보느라 뒷북이다.
코로나19는 치사율이 낮지만 전파력이 강해 지구상 거의 모든 나라로 번져가고 있다. 100만명 인구대비 확진자수는 한국이 중국과 일본보다 높다. 확진자를 감추려는 일본과 줄이려는 중국에 비해 한국은 늘어나는 숫자를 숨기지 않고 빠르게 처리한다. 한중일의 서로 다른 대처자세에 따른 확진자 통계의 허실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미국과 중국 사이의 헤게모니 쟁투 아래 유럽에서 아시아로 권력전이가 일어나는 시점에서 여러 나라들에서 ‘아시아 포비아’가 일어나고 있다. 지난날의 ‘황화론’(黃禍; yellow peril)이 되살아날까 걱정된다. 영국 독일 이탈리아 미국 등에서 피부와 색깔만으로 동양인으로 오해받아 거리에서 폭행당하고 식당에 못 들어가고 호텔에 격리되는 불행한 일이 그치지 않는다. 국가와 인종이란 장벽 아래 편견과 배타, 혐오와 차별이 나타난다.
아시아의 안에서 들어다 보면 더 낯이 뜨겁다. 중국은 코로나19가 우한이 아닌 곳에서 발생했을지 모른다며 염치없는 짓을 서슴지 않는다.
베트남 터키는 한국에서 온 비행기를 착륙시키지 않고 되돌려보내는 결례를 하고 있다. 거주자의 아파트 출입을 막고 방문자를 강제로 격리하는 사건이 중국과 베트남 등지에서 일어났다.
코로나19라는 재난을 통해 한중일의 민낯을 보면서 국격은커녕 비뚤어진 국익 논리와 뒤떨어진 시민의식이 안타깝고 답답할 뿐이다. 이번 봄 시진핑의 방문이 무산될까 중국의 눈치를 보는 일본과 한국에서 국민이 빠진 정권의 존재의의에 대해 반문하지 않을 수 없다. 도쿄올림픽 연기를 우려해 요코하마항에 묶인 크루즈선 다이아몬드 프린스 승객들의 생명과 안전을 내던진 일본의 처신은 반인륜적이었다. 거의 7세기를 격하고 볼 때 마르세유의 선택을 무지라고 힐난하기 이전에 올림픽이 표방하는 우애와 평화의 정신은 어디 갔는지 묻고 싶다.
어려운 시기, 협력과 연대 넓힐 기회
총선을 앞두고 여야는 여전히 정권지원론과 심판론이라는 프레임에 갇혀 있다. 재난극복을 위해 정치인들은 공심(公心)으로 돌아가야 한다. 지금 영세 소상공인들은 하루 생계가 어렵다. 재난기본소득을 말하기 전에 정부는 마스크라도 지자체를 통해 무상으로 배급해주었어야 했다. 우리 스스로도 손길을 내밀어 어려움을 나누어야 한다. 어려움에 대한 공감을 통해 협력과 연대를 넓힐 기회다.
한국사회에 오랫동안 자리잡은 혐오와 차별에 대해서도 돌아볼 필요가 있다. 얼마 전 남성에서 여성으로 성전환한 군인이 있었다. 군대 조직의 운영상 복무연장이 어렵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런 성전환여성이 여대에 입학하려 했을 때 학교 당국이 아닌 학생들이 반대한다는 것은 다른 얘기다. 사회적 소수자를 일방적으로 옹호하는 ‘언더 도그마’의 오류에 빠지고 싶지는 않다. 그러나 우리 사회의 불평등과 불공정에서 나오는 갑질 미투 하대 무시 배제를 되돌아보는 성찰의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