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일보] 한국, 미·중 주도 무역체제 활용해 동북아 브뤼셀 돼야

[중앙일보] 한국, 미·중 주도 무역체제 활용해 동북아 브뤼셀 돼야

“한국, 미·중 주도 무역체제 활용해 동북아 브뤼셀 돼야”

서울대 임현진 교수-싱가포르국립대 두아라 교수 대담

2012년 9월 18일 만주사변 발발 81주년을 맞아 중국 시위대가 일장기를 불태우고 있다. 이런 민족주의의 분출을 정부가 국내 통합을 위해 이용할 수 있지만 통제할 수 없는 수준에 다다르면 다른 차원의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 [중앙포토]

 

국제체제나 한반도의 미래는 안갯속에 휩싸였다. 가능하면 여러 각도와 시각에서 의견을 들어보는 게 좋다.

싱가포르국립대 프라센지트 두아라(63) 석좌교수는 참조할 만한 이야기를 다각도로 해줄 수 있는 학자다. 인도 아삼 지방 출신인 그는 중국사, 20세기 아시아 역사 전문가다. 하버드대에서 박사학위(사학)를 받은 그는 프린스턴대·스탠퍼드대·시카고대 교수를 역임했다. 현재는 싱가포르국립대 아시아연구원 소장이다. 최근 두아라 교수는 서울대 아시아연구소가 주최한 ‘아시아학의 새로운 지평’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한국을 방문했다. 중앙SUNDAY를 위해 그와 대담한 서울대 사회학과 임현진 교수(하버드대 박사)는 서울대 아시아연구소 창립 소장, 한국사회과학협의회 회장이다. 다음은 대담 요지.

-임: 아시아에 주목하는 이유는.
두아라: “미래는 아시아에 달렸다. 경제 성장의 기초를 갖춘 곳은 아시아다. 또한 ‘지속가능성의 위기(the crisis of sustainability) 문제가 가장 첨예하게 드러나는 곳도 아시아다. 지난 200년간의 서구식 발전이 아시아에서 유지된다면 지속가능성의 위기는 더욱 심화될 것이다.”

-아시아로 힘의 이동이 이뤄지고 있다. 어느 쪽이 최강국이 될 것인가에 대해 학자들의 의견이 갈린다. 중국 학자들은 중국이 초강대국이 될 것이라고 한다. 미국·유럽 학자들은 경제 챔피언 자리를 중국에 물려줘도 군사적·문화적으로는 미국이 초강대국으로 남을 것이라고 한다. 한편 세계 속의 중국은 강하지만 중국 국내체제는 약하다.
“19, 20세기 패러다임에 입각한 논란이라고 본다. 중국 또한 옛 패러다임을 따르고 있지만 21세기에는 유용하지도, 사용할 수도 없는 패러다임이다. 게임의 법칙이 바뀌고 있다. 심화된 상호의존성 때문에 그 누구도 단독으로 힘을 독점할 수 없다. 미국은 약화되지 않을 것이다. 세계는 이미 다극(多極·multipolar) 국제체제에 진입했으며 다극화 구조는 오래갈 것이다. 중국 내부 문제도 국제 권력 방정식의 일부다. 중국 민족주의는 내부 문제로부터 주의를 ‘딴 데로 돌리기 위한(diversionary)’ 전략이다.”

-부상하는 아시아를 학술적·정책적 이유로 연구하는 데 여러 이슈가 있지만 그중 두드러진 것은 ‘하나의 아시아(one Asia)’냐 ‘여러 아시아(many Asias)’냐가 논란이 되고 있다. 인종·종교·문화적 다양성, 경제와 민주주의의 발전 수준 차원에서 보면 ‘여러 아시아’라는 관점을 지지하게 된다.
“그렇다. 여러 아시아가 있다. 역사적으로도 그렇다. 앞으로도 아시아는 유럽의 근대화 여정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길을 걷게 될 것이다. 지금도 그렇지만 보다 통합이 진전된 아시아도 유럽과는 달리 ‘네트워크형’ 공동체가 될 것이다. 네트워크형이 된다고 해도 아시아 통합의 심화는 계속될 것이며 권력도 증진될 것이다.”

-아시아는 유럽연합이나 남미와 비교하면 단일 아시아로 가는 것은 힘든 게 사실이다.
“단일 아시아가 목적이 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가능성도 낮고 바람직하지도 않다. 민족국가 간의 경쟁이 근대성을 달성하는 데 도움도 됐지만 수많은 문제를 야기시켰다. 각기 단일화된 아시아·유럽·중남미 등의 경쟁은 세계를 파멸시킬 것이다.”

-신형 안보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시민사회 조직과 정부 기관 간의 협력뿐만 아니라 아시아라는 지역 공동체 차원의 협력 메커니즘이 필요하다. 그러나 지역 공동체가 가장 성공적이라는 EU도 위기를 겪고 있다.
“EU의 교훈은 명확하다. 문화적 단일성과 연결성이 가장 앞선 유럽도 수많은 문제가 있는 이유는 부분적으로 초국가(supranational) 모델을 추구하는 고속 통합을 추진했기 때문이다. 그 결과 약소국들도 지나친 비중으로 목소리를 내고 있다. 주권 문제를 중심으로 아시아가 지역 통합의 새로운 대안을 제시해야 한다. 동남아시아국가연합(아세안)과 남아시아지역협력연합(SAARC)은 이미 가시적인 성과를 내고 있다. 특히 국가 간 네트워크형 연계(linkage)가 주목할 만하다.”

-아세안의 발전 양상은 어떤가.
“아세안은 금융 통합 문제를 연기했다. 환경 분야에서는 흥미로운 진전이 있었다. 아세안 차원의 법적·제도적 장치를 마련해 아세안 전역에서 시민단체 활동이 활성화됐고 글로벌 차원의 시민 연대도 강화됐다. 새로 확보한 힘을 바탕으로 이들은 정부와 오염원 배출자들에게 책임성(accountability)를 요구하고 있다.”

-하지만 아시아 지역 정부들은 시민사회에 비해 훨씬 강하다.
“그렇다. 그러나 시민사회 단체들은 강력한 감시자(watchdog) 역할을 할 수 있다. 미얀마에서 미얀마-중국 합작으로 진행되던 수력발전용 댐 건설이 2011년 중단된 배경에도 80개에 달하는 미얀마와 아세안 시민단체의 저항이 있었다.”

-아시아 지역 공동체 중 주목되는 것은 아세안과 느슨한 협의체이긴 하지만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가 있다. 아세안의 확장은 계속되고 있다. 아세안은 APEC을 대체할 것인가.
“그럴 가능성이 있다. 미국이 주도한 APEC은 영향력을 잃고 있다. 중국이 ‘중국 배제 클럽(China exclusion club)’이라고도 부르는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 역시 미국이 주도하고 있는데, 이에 대한 아세안의 대처는 매우 현명하다. TPP뿐만 아니라 역내 포괄적 경제동반자협정(RECP)에도 참여하고 있다.”

-한국은 어떻게 해야 할까.
“한국과 싱가포르 모두 ‘강소국(small power)’이다. 싱가포르는 도시국가이기 때문에 그렇지만 한국은 이웃 나라들의 경제·인구 규모가 훨씬 크기 때문에 ‘강소국’이다. 한국도 TPP의 수혜자가 돼야 한다고 본다. 싱가포르는 동남아의 브뤼셀이다. 한국의 경우 중·일 간의 적대 관계 때문에 동북아의 브뤼셀·싱가포르가 되는 게 더 힘들 것이다. 하지만 한국이 TPP와 RECP를 통해 중국과 일본 사이에서 입지가 강화될 것이라고 본다. 아세안의 경우 양쪽에 가담하는 데 아무런 문제가 없다. 아무도 ‘무조건적인 충성(unconditional loyalty)’를 요구하지 않는다. 바로 그게 다극 국제체제가 선사하는 장점이다.”

-한국과 달리 싱가포르는 국제사회의 권력정치(power politics)로부터 자유롭다.
“그럴수록 한국은 그물을 넓게 던져야 한다(cast your net wider). TPPRECP 양쪽 모두에 참가해 한국과 싱가포르가 궁극적으로 경쟁하길 바란다.”

-동남아에서 일본을 바라볼 때는 어떤 영상이 떠오르는가. 최근 일본 아베 신조 총리는 아무리 완곡하게 이야기하더라도 ‘오해의 소지가 있는’ 행동을 하고 있다.
“그의 정치적 행위는 비난받아 마땅하다(reprehensible). 일본 우파를 누그러뜨리려고(assuage) 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일이다. 중국이 이를 양해하면 어떨까 하는 견해도 있다. 하지만 중국 입장에서는 국내 민주주의를 위해 일본이라는 적이 필요하다는 측면도 있다. 2005년의 경우처럼 중국 정부가 민족주의의 분출을 통제하기 힘든 상황에 빠지기도 하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