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 이후 한국은 자전거도 제대로 만들지 못했다. 오늘의 한국은 LCD 패널, 휴대전화, 석유화학, 철강, 반도체, 배터리, 자동차, 선박, 비행기 등 생산에서 세계를 선도하고 있다. 세계 5대 제조업 강국이다.
한국은 지구 가치사슬(global value chains) 안에서 하도급에서 조립가공을 거쳐 독자 생산으로 이동하였다. 이른바 '나는 기러기(flying-geese)' 모델이 보여주듯 초기 의류, TV와 같은 노동집약적 소비재 생산에서 후기 반도체, 배터리와 같은 기술집약적 자본재 생산으로 입지를 제고해왔다.
삼성전자, 현대자동차, SK하이닉스, LG전자, 포항제철, 현대조선, 한화디펜스, 현대로템, 한국우주항공 등 글로벌 선도기업(lead firm)들이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세계 경제 안에서 이들은 부가가치(value-adding)가 높은 생산활동을 통해 산업의 고도화(upgrading)를 이끌어왔다.
근래 한국 경제가 어렵다. 무려 1년여 만에 무역수지가 개선되었지만, 수입 감소에 따른 축소형 흑자다. 성장의 엔진인 수출이 여전히 부진하다. 미·중 간 패권경쟁이 공급망의 균열을 가져왔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미국·유럽연합(EU)과 러시아·중국 사이의 진영 대립으로 치달으면서 지구 가치사슬이 분열되었다. 원자재, 에너지, 농산물 수급에 차질이 생겼고 반도체, 배터리, 가전 수출에 장애가 나타났다.
지구 가치사슬은 특정 제품을 설계·생산·유통·소비하는 네트워크로서 공급망(supply chains)으로 조밀하게 조직되어 있다. 다음의 특징을 갖는다. △투입-산출구조: 상품 설계에서 소비에 이르는 일련의 활동 △지리적 분포: 이러한 생산활동의 공간적 분산 △거버넌스: 지리적·조직적으로 분절된 이러한 활동을 조정·통합하기 위한 지배구조 △제도 환경: 무역과 투자에 관한 국제 규범과 제도.
글로벌 생산 네트워크로서 공급망은 조직적 분절과 지리적 분산으로 특징지어진다. 한 국가의 경계 안에서 이뤄지던 기업의 부가가치 활동은 점차 복잡한 생산, 교역, 투자의 국제적 연계망을 거친다. 예전과 같이 수입 대체나 수출 증진 공업화의 구분은 더 이상 의미가 없다. 글로벌 선도기업들은 하도급(outsourcing)을 통한 '조직적 분절(organizational fragmentation)'과 역외화(offshoring)를 통한 '지리적 분산(geographical dispersion)'을 통해 생산활동에 참여한다. 이를 합친 역외 하도급(offshore outsourcing)도 있다.
세계 최대 휴대전화 브랜드인 한국 갤럭시와 미국 애플은 생산 전략에서 매우 대조적이다. 삼성전자가 한국에서 설계한 제품의 생산을 주로 역외화에 의존한다면, 애플은 설계만 미국에서 하고 생산은 모두 역외 하도급으로 해결한다. 갤럭시는 한국 구미에서 소량의 최고급품만 만들고 거의 모든 휴대전화는 베트남과 인도에서 생산한다. 애플은 전량을 아시아의 중국, 인도, 필리핀에서 제조한다.
글로벌 공급망의 확산에 따라 세계 경제에 주요한 변화가 일어났다. 세계 교역구조는 소재·부품·장비(소부장) 등 중간재(intermediate goods)가 국경을 오가면서 추가 가공 과정을 거치는 복잡한 네트워크가 되고 있다. 중간재의 교역이 증가하면서 무역은 사전에 조정된다. 한국이 일본에서 반도체 소부장을 수입하고 그 완제품을 수출한다. 한국이 중국이나 베트남에 휴대전화 부품을 수출하고 완제품을 수입한다. 글로벌 선도기업들은 투자, 교역, 생산을 조직적·공간적으로 연계시킨다. 삼성이나 LG와 같은 한국의 전자 선도기업들이 베트남에 휴대전화, 디스플레이 등 대규모 생산시설에 투자함에 따라 한국에서 베트남으로 전자부품 수출이 늘어난다.
최근 미·중 패권경쟁의 심화로 지구 가치사슬의 분열이 일어나고 있다. 미국은 중국의 첨단무기 제조를 막기 위해 인공지능(AI)·컴퓨터 관련 반도체와 그 생산 장비에 대해 수출통제를 시행했다. 중국도 갈륨·게르마늄과 같은 반도체 핵심 소재에 대해 수출통제라는 맞불을 놓았다. 공급망의 단절이다. 기업의 생산 네트워크가 흔들린다. 국가안보에도 위해가 올 수 있다.
지구 가치사슬이 파열되고 있다. 전 세계적으로 이어진 공급망이 흔들린다. 지역적 범위에 한정된 가치사슬(regional value chains)로 좁힐 수 있다. 하지만 지금까지의 가치사슬은 글로벌화되면서 지역적 기반 아래 얽혀 있었다. 작금의 변화는 가치사슬의 단순한 규모 축소보다는 서로 다른 규모(일국, 지역, 글로벌 수준)의 가치사슬이 병존하면서 상호작용하고 나아가 공진화(co-evolution)하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미국과 중국 사이의 패권경쟁 와중에서 미국은 공급망에서 중국을 떼어놓기 위해 4자 협의체(QUAD), 3자 협의체(AUKUS), 인도·태평양경제프레임워크(IPEF)를 통해 중국을 견제하려 하고 있다. 이에 대해 중국은 '쌍순환' 전략에 의해 자국 내 공급망을 심화하면서 동남아시아 지역에 새로운 공급망을 구축하고 있다. 중국은 역내포괄적경제동반자협정(RCEP)의 결성을 통해 아시아를 기반으로 EU와의 거래를 확대하고 있다. 일본도 포괄적·점진적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CPTPP)의 구축을 통해 미국을 측면에서 지원하고 있다. 한국은 RCEP 합류에 자족하지 말고 CPTPP도 가입해야 한다. 우리와 처지가 비슷한 중견국들(middle power countries)과도 공급망 확대를 위해 공조 관계를 강화해야 한다.
지정학 위기에 디지털·그린 전환도
포스트 코로나 시대의 지구 가치사슬은 신냉전 아래 지정학적 위험, 기후변화에 따른 그린 전환, 4차 산업혁명에 따른 디지털 전환이란 중대한 도전에 직면해 있다. 특히 미·중 패권경쟁으로 공급망에 혼란과 단절이 일어나고 있다.
공급망의 재편은 네 가지 시나리오를 가상할 수 있다. (1)탈세계화: 기업들이 본국으로 회귀하면서 해외 직접투자나 역외 하도급이 감소한다. 지구 가치사슬이 모국 중심으로 축소한다. 생산활동의 리쇼어링(reshoring)은 쉽지 않다. (2)지역화(regionalization): 아시아, 유럽, 북미 등 가치사슬이 최종 시장에 따라 지역적으로 배치되는 '니어쇼어링(near-shoring)'이다. 가치사슬이 지역적으로 축소된다. (3)분기(bifurcation): 미·중 패권경쟁에 따라 미국 중심의 가치사슬과 중국 주도의 가치사슬로의 블록화다. '프렌드쇼어링(friend-shoring)'이다. (4)다변화(diversification): 기업들이 가치사슬의 대규모 단절이 가져오는 위험을 고려하여 공급망의 다각화를 추구하는 것이다. 공급망이 더 복잡하고 중층적인 구조로 변모한다.
디지털 전환은 세계 여러 곳으로 분산된 공급망을 쉽게 조정·통제하게 함으로써 기업 간 거래 비용을 낮춰준다. 과업의 외부화(externalization)와 모듈화(modularization) 추세를 촉진한다. 로봇과 AI 기반 자동화 기술의 진보는 지구 가치사슬의 배치에서 노동비용의 차이를 줄여준다. 자본집약도가 높아지면서 규모의 경제가 중요해진다. 3차원(3D) 프린팅과 같은 적층제조는 동일한 제품의 복제 생산을 쉽게 만들면서 생산지와 소비지 간 거리를 줄여준다. 소비자의 필요를 반영한 맞춤생산을 늘린다.
지구 가치사슬은 전 지구적 수준의 대량생산과 소비를 떠받드는 방식으로 작동해왔다. 기후 재난, 탄소 배출, 종 다양성 감소를 가져왔다. 이는 인류의 지속가능성과 지구의 회복탄력성을 위협한다. 지구 가치사슬을 통해 낮은 노동, 환경 관련 비용으로 생산된 제품이 범람하면서 폐기물 또한 넘쳐나고 있다. 기후위기는 자연 재난에 따라 농산물과 제조업의 공급망에 영향을 미친다. EU와 미국에서 보듯 무역규제, 환율정책과 같은 경제정책뿐 아니라 탄소국경세 도입에 따라 거래비용이 높아진다. 선도기업들은 RE100을 따라야 한다. 생산활동 과정에서 ESG(환경·책임·투명경영)의 실천이 필수적이다.
지구 가치사슬의 녹색화(greening)는 탄소중립 시대에 기업 간 경쟁을 배가시킨다. DEI(Diversity, Equity and Inclusion)에 따른 노동과 소수자에 대한 포용은 시민사회의 세력 개편을 가져온다. 넷제로를 향한 경제구조의 근본적인 변화는 전기차의 등장에서 보듯 전통적으로 자동차 산업의 선도기업인 완성차 업체의 지위를 위협한다. 테슬라, BYD 등 전기차에 기반한 선도기업들이 주요 보기다. 배터리가 핵심 부품으로 부상하면서 CATL, LG에너지솔루션과 같은 배터리 제조업체가 새로운 가치사슬을 창출한다. 여기에 자율주행기술과 모빌리티 서비스가 더해지면서 구글이나 애플과 같은 빅테크 기업들의 참여가 이어진다. 자동차 산업의 가치사슬은 플랫폼화를 통한 광범위한 구조 재편과 새로운 산업 거버넌스 출현을 예고하고 있다.
디지털 전환과 그린 전환에 따른 지구 가치사슬의 변화는 지정학적 위기라는 맥락 안에 자리 잡고 있다. 미·중 패권경쟁이란 지정학적 위험으로 불확실성이 높아지면서 지난 수십 년간 이뤄져온 신기술에 대한 개발과 투자 흐름이 끊기고 있다. 이는 시장의 집중화나 독과점화를 강화한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 따른 에너지와 원자재 수급에 대한 불확실성이 높아지면서 식량 가격은 올라가고 화석연료와 원자력에 대한 의존도 높아지고 있다.
브레이크 없는 세계화는 코로나19로 잠시 감속하였다. 그러나 포스트 코로나 시대는 인류 공존의 재세계화(reglobalization)라기보다 자국 중심주의 아래 각자도생으로 가고 있다. 다시금 지구촌(global village)의 이상은 멀어지고 있다.
한국은 지구 가치사슬에 깊숙이 통합되어 있다. 글로벌 공급망의 혼란은 국가의 미래와 직결되어 있다. 리쇼어링, 니어쇼어링, 프렌드쇼어링, 다변화를 시의적절하게 활용해야 한다. 하지만 그 어느 것도 분열된 공급망에 대한 궁극적인 해결책은 아니다. 국제 정치와 달리 세계 경제에는 적과 동지의 구분이 희미하다. 미·중 패권경쟁의 와중에서 헤징(hedging)은 현명하지 못하다. 우리는 탈동조화(decoupling)의 위험을 줄이면서(derisking) 불원 나타날 재동조화(recoupling)에 대비해야 한다.
[임현진 서울대 명예교수 아시아연구소 창립소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