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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해남 박사
아시아연구소 HK연구교수 / 동북아시아센터이 책은 지난 20년간 저자가 경험적 연구를 통해 빈곤을 학술적·실천적 주제로 탐구해 온 과정에 대한 기록이다. 저자는 한국과 중국의 여러 현장을 대상으로 하여, 빈곤을 새롭게 발견하고 쟁점화하고자 하였다. 무허가 판자촌, 공장지대, 슬럼화된 노동자 거주지 등 빈곤의 전형성이 도드라진 현장에서 전형적이지 않은 빈곤의 역사성과 관계성에 주목했고, 대학 수업, 이주자들의 공간, 국제개발과 자원봉사 무대처럼 서로 이질적인 현장에서 빈곤이 실존의 불안으로 현상하는 공통성을 포착했다. 인구 다수가 불평등 구조의 피해자를 자처하는 ‘경계 없는 불평등’의 시대, 다른 한편에선 금융자본주의와 팬데믹을 거치면서 부의 양극화가 가파르게 진행 중인 시대에 빈곤을 긴요한 정치적·윤리적 의제로 소환하려면 어떤 접근이 필요한 것일까? 복지국가의 몰락 이후 선진국과 후진국의 이분법이 무색해진 지금, 빈곤은 국경을 넘어서고 있으며 빈자들은 국경을 넘어 이동하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일국적 차원을 넘어 동아시아라는 지역적(regional) 차원에서 빈곤을 이해하고 탐구해야 할 것인가? 저작비평회는 이러한 물음에 응답하기 위하여 마련되었다.
발표: 조문영(연세대 문화인류학과)
사회: 박 우(한성대 기초교양학부)
토론: 소준철(충남대 사회학과)
박해남(서울대 아시아연구소)
박민희(한겨례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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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화와 신자유주의는 한국에게, 아시아에게 무엇을 안겨 주었는가? 일부 전문가들은 세계화와 신자유주의가 부의 편중을 일으키지만 낙수효과(trickle down effect)를 통해 전체적인 부를 증가시킨다고 말한다. 또 다른 전문가들은 바닥을 향한 경우(race to bottom)를 통해 양극화와 빈곤을 심화시킨다고 말한다. 세계화와 신자유주의가 시작된 1980년대 이후 아시아가 경험한 역동적인 변화를 고려하면 후자보다는 전자의 주장에 무게가 실리는 것 같이 보인다. 하지만 그 속에서 살아가는 이들이 경험하는 것은 숫자로 표현될 수 없다. 사회적 안전망이 갖춰지지 않은 아시아의 대다수는 불안정 노동, 즉 프레카리아트의 삶을 살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들은 끊임 없이 분투하지만 그토록 원하던 삶의 안정성은 결코 쉽게 손에 넣을 수 없다. 저자는 그래서 빈곤은 숫자로서가 아니라 과정으로 이야기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이 책은 저자가 활동가이자 연구자로 빈곤과 조우해온 과정에 대한 기록이다. 지난 20여 년간 서울의 신림동을 시작으로 중국의 선전과 하얼빈, 베이징, 다시 서울의 동자동 등 여러 현장에서 저자는 빈민, 노동자, 대학생, 활동가 등 다양한 사람들을 만났다. 어떻게든 삶을 일궈가려는 이들의 분투, 그러한 분투에도 불구하고 손에 닿지 않는 ‘안정된 삶’, 그래서 이들이 짊어지고 살아가는 불안을 이 글은 생생하게 그리고 있다.
신림동의 빈민부터 명문사립대를 다니는 대학생들에 이르기까지, 저자는 불안과 함께 살아가는 다양한 사람들을 등장시키고 있다. 이는 신자유주의와 세계화 시대를 관통하는 빈곤 레짐이 빈민을 ‘의존하는 이들’로 표상하면서 이들에게 자립과 자활을 요구하고 있는 현실을 드러내기 위함이었다. 국가가 제공하는 복지시스템이건, CSR, ESG, ODA, 자원봉사 등으로 이야기되는 글로벌 빈곤 퇴치 프로그램이건 간에, 빈곤을 ‘의존’으로, 목표를 ‘자활’로 설정하는 관행에 있어서는 큰 차이가 없다. 하지만 저자는 의존은 인간의 자연스러운 상태라는 것을, 중요한 것은 자립과 자활이 아니라 빈곤과 관련한 연루의 구조를, 배치의 구조를 바꾸어야 한다는 것을 말한다.
아시아의 빈곤을 어떻게 볼 것인가? 어떻게 연구하고 또 어떠한 실천을 창출해나갈 것인가? 이 질문은 아시아를 연구하는 이들이 피할 수 없는 화두이다. 이 책은 우리가 아시아의 빈곤을 마주할 때 활용해 온 ODA, ESG, CSR 등의 언어를 재고할 것을 요청하고 있다. ‘제 3세계’에서 ‘제 1세계’로의 진입이라는 예외적인 족적을 롤 모델처럼 보여주며 자활과 자립을 말할 것인가? 아니면 그들의 빈곤과 우리의 불안을 새롭게 연결해나갈 것인가? 이 책은 빈곤을 통해 아시아를 새롭게 바라보는 법을 말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