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시아의 두 경학(經學): 조선을 통해서 본, 15-18세기 베트남 레(Lê) 왕조(黎朝)의 실학(實學)

일시: 2025년 12월 1일(월) 11:45-13:15 장소: 서울대학교 아시아연구소 304호
       

참석자

윤대영 박사
아시아연구소 HK연구교수 / HK⁺메가아시아연구클러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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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12월 1일 - 11:45 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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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12월 1일 - 1:15 p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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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학교 아시아연구소 30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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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학교 아시아연구소 HK+ 메가아시아 연구사업단은 윤대영 박사(HK 연구교수)를 초청하여 ‘동아시아의 두 경학(經學): 조선을 통해서 본, 15-18세기 베트남 Lê) 왕조(黎朝)의 실학(實學)’을 주제로 제6회 SNUAC 비교지역연구 콜로퀴움을 진행하였다.

윤대영은 발표를 시작하며 제목에 ‘경학’과 ‘실학’을 함께 넣은 이유를 설명하면서 우리가 통상적으로 이해하는 실학 개념이 역사적으로는 매우 다양한 의미로 사용되어왔음을 지적했다. 또한 동아시아라는 범주는 1960년대 일본 역사학계에서 본격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한 개념으로 한자·유교·불교·관료제와 과거제 등 공통된 경험을 공유하는 지역을 가리켜 왔다고 설명하며 이러한 기준 속에서 한국·중국·일본이 동아시아의 중심으로 이해되어 온 반면, 베트남은 때로는 동남아, 때로는 동북아, 혹은 애매하게 동아시아로 포섭되거나 배제되는 존재로 다루어져 왔다고 설명했다. 이러한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다이비엣(대월)이라는 국호를 공유한 여러 베트남 왕조 가운데 특히 레 왕조를 중심에 두고 중국의 지적 영향을 공유한 조선과 베트남을 비교해보고자 한다고 밝혔다.

통상적으로 실학은 ‘실용적인 학문’이라고 이해되어왔으나 실학이라는 용어는 시대와 화자에 따라 매우 다양하게 사용되어왔다. 현재 한국사에서 통용되는 실학 개념이 1960년대 이후 정립된 것으로 한국사의 내재적 발전을 설명하고 세계사적 보편 발전단계를 검증하려는 목적론적 의도와 연결되어 있다. 북송 성리학자 정이가 말한 실학은 경학과 고학을 의미했고, 주희 또한 실학을 중용 사상과 연결하여 인간사를 다루는 실천적 학문으로 이해했다. 이러한 맥락에서 송대 성리학자들이 사용한 실학은 경전 연구를 중심으로 하면서도 그 주변의 실용적 학문까지 포함하는 개념이었다.

고려 말 이제현의 상소를 보면 그는 불교를 ‘허학’이라 부르고 유학을 등지고 불교를 따르거나 실학을 버리고 문장만 익히는 풍조를 비판했는데 여기서 실학은 실용 기술이 아니라 육예와 오교에 기초한 참된 유학을 뜻했다. 조선 시대에도 실학이라는 말이 과거 준비를 위한 경학이나 정통 유학의 의미로 주로 사용되었다.

베트남에서는 리·쩐 왕조를 거치며 유학이 점차 정착되었으나 조선과는 다른 양상이 나타났다. 14세기 말에는 송대 성리학을 강하게 비판한 호꾸이 리가 등장했는데 그는 주희 등 송나라의 성리학자들이 현실과 맞지 않는 텍스트를 반복하고 독창성이 부족하다고 비판하였다. 호꾸이 리는 『시경(詩經)』을 해설하는 쯔놈 작품 『국어시의(國語詩義)』를 지어서 후비(后妃)와 궁인(宮人)이 학습하도록 했을 때에도 주자(朱子)의 해설을 따르지 않았고 과거시험에서는 농민 생활과 수학 능력을 묻는 문제를 출제하는 등 교육과 제도 개혁을 시도했다. 그러나 그의 통치는 7년에 불과했고, 1407년 명나라의 침입과 점령으로 이러한 시도는 결실을 맺지 못했다.

명 지배 이후 레 러이가 독립을 회복하고 레 왕조가 성립되면서 유학은 본격적으로 국가 이념으로 자리 잡았다. 레 왕조 5대 황제 레 타인 똥(성종)의 시 「실학」에서는 남에게 보이기 위한 공부가 아니라 자신을 위한 공부를 강조하고 화려한 문장과 재주를 겨루는 풍토를 비판했다. 이 시는 『대학』과 『논어』의 격물치지를 언급하면서 당대 사인들의 지적 풍토를 비판한 글이며 성종이 말한 실학은 진실한 유학 또는 충실한 경학을 뜻한다. 정책적으로도 성종은 과거시험에서 시무와 관련된 문제를 출제하고 합격자들에게 3년간의 실습을 거쳐 관리로 임용하도록 하는 제도를 도입하였다.

성종의 뒤를 이은 레 히엔 똥 역시 이러한 기조를 계승하고자 했지만 이후 레 왕조는 단명한 군주, 권신의 전횡, 정변과 반란이 이어지는 혼란한 시기에 들어서게 되었다. 16세기에는 막씨 왕조가 레 왕조를 찬탈했고, 이후 레 왕조 부흥 운동, 정씨와 응우옌씨의 남북 분열, 막씨 잔존 세력의 존속 등 복잡한 정치 상황이 장기간 지속되었다. 이러한 남북 경쟁과 정치적 분열이 베트남 국가의 통일성과 안정성을 크게 약화시켰다.

조선과의 비교에서는 세 가지 기준이 제시된다. 첫째는 정치적 안정성으로, 조선은 고려에서 조선으로 이어지는 약 천 년 동안 왕조 교체가 한 번뿐이었던 반면, 베트남은 빈번한 왕조 교체와 내전을 겪었다. 둘째는 대중국 사행의 조건으로, 조선 사신단이 매년 북경에 파견되어 비교적 자유롭게 체류하며 서적을 구입할 수 있었던 데 비해, 베트남 사신단은 파견 횟수와 체류 조건 모두에서 불리한 제약을 받았다. 셋째는 서적과 기록의 보존 시스템으로, 명나라의 베트남 점령 시 문서와 서적이 대규모로 반출되었고, 이후에도 전쟁과 반란으로 자료 유실이 반복되었다. 18세기 레 꾸이 돈은 국가에 남아 있는 서적이 100여 종에 불과하고 그마저 상당수가 중국 서적며 도서관과 기록 보존을 위한 전담 체계가 부재했다고 평가했다. 반면 조선은 교서관, 춘추관, 홍문관, 규장각 등 여러 기관을 통해 서적의 수집과 보존, 간행이 체계적으로 이루어졌다.

이러한 조건 속에서 16~18세기 베트남 유학은 교육의 경직화와 과거 수험 중심의 학풍이 확산되었다. 부이 시 띠엠의 「십조」는 당시 사인들이 경전을 직접 읽지 않고 참고서에 의존하며 문구를 짜깁기해 글을 짓는 풍토에 대해 비판했다. 레 꾸이 돈 또한 과거 수험서 위주의 학습과 서적 유통의 문제를 지적하며, 인재를 길러낼 환경이 열악했다고 평가한 바 있다고 언급했다.

17~18세기의 대표적 인물인 레 꾸이 돈은 다섯 세대에 걸친 학맥 속에 있었고, 이 학맥의 일부 인물들은 직접 중국을 방문해 명말·청초의 지적 풍토를 접했다. 레 꾸이 돈은 역사 연구에서 사실의 정확한 배열과 기존 사서의 공백을 메우는 작업을 중시했으며, 『운대유어』에서는 사물과 일용을 이해하는 치용의 관점에서 자연·천문·지리 지식을 정리했다. 또한 예수회 선교사들과 서양 학문이 중국에 유입되는 과정을 소개하며, 서양식 지리서와 세계지도를 통해 중국 밖의 세계를 인식하게 되었음을 기록했다. 윤대영은 18세기 이후 조선에서 ‘실학’이라는 용어의 사용이 줄고 ‘경세치용’과 같은 표현이 부각된 것처럼, 베트남에서도 ‘치용’이라는 개념이 중요해졌다고 설명하며 발표를 마무리했다.

발표 후 질의응답이 이어졌다.

먼저 김호(아시아연구소)는 이번 발표가 초반에는 베트남의 실학을 경학의 논의 속에서 출발시키다가 후반부 레 꾸이 돈 부분에 가서는 서양 학문의 수용, 경세치용, 이용후생 등 기존 실학 담론이 사용해온 실용성의 범주를 그대로 사용하는 것처럼 보인다고 지적했다. 그는 실학이라는 말을 쓰지 않더라도 경세치용·이용후생과 같은, 이미 경전에 등장하는 어휘를 통해 당시 학문 동향을 충분히 논의할 수 있음에도 여전히 실학을 근대 학문과 연결하는 틀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것 아니냐고 질문했다. 아울러 18세기 레 꾸이 돈 이외에 논어·상서 등 경전을 경학적으로 연구한 학자들의 분포와, 단순히 글재주에만 치중하고 공허한 학문을 했던 인물들이 어떻게 존재했는지에 대해서도 궁금하다고 덧붙였다. 이에 대해 윤대영은 베트남 경학, 특히 18세기 중·후반의 경학 연구가 아직 초보적인 단계에서 겨우 모습을 드러내는 정도라고 보고 있으며 레 꾸이 돈 역시 그 초기 단계에 해당한다고 생각한다고 답했다. 자신은 경학을 전문적으로 장기간 연구해 온 것은 아니고 선행 연구자들이 지적해 둔 부분들을 모아 하나의 구성을 만든 수준이라고 설명하면서 애초에는 조선사의 서학·서양 과학 수용사를 설명하던 틀을 가져와 서양 학문과 가톨릭 소개를 중심으로 프레임을 짰으나 이 틀 역시 수정이 필요함을 인정했다. 또한 레 꾸이 돈 이후 18세기 말에서 19세기 후반 사이 경학에 천착한 베트남 학자들을 추적해 볼 계획을 갖고 있지만, 자료와 시간을 모두 많이 필요로 하는 작업이라 당장 수행하기는 쉽지 않다고 덧붙였다.

이어서 김호는 책으로 출간될 원고의 머리말에서 실학을 근대 학문으로 보는 선입견을 어떻게 희석할 것인지가 중요하다고 다시 지적했다. 이에 윤대영은 우리가 실학이라는 개념을 잘못 이해하게 된 계기와 20세기에 형성된 실학 개념이 어떤 과정을 거쳐 굳어졌는지를 머리말에 추가해 이러한 선입견을 성찰하는 내용을 보완하겠다고 답했다.

고가영(아시아연구소)은 조선과 베트남을 비교하는 방식에 대해 질문했다. 그는 발표가 서적 구입 통로, 유학과 지적 풍토에 대한 평가, 서적 유통과 연구 환경, 자연과학과 서양 종교·지리 지식의 수용, 학맥과 인물사 등 다양한 요소를 넘나들며 비교를 시도하고 있는 만큼, 서두에서 미리 어떤 범주와 항목을 중심으로 비교를 진행할 것인지, 예를 들어 ‘연구 풍토’, ‘서적·지식 유통’, ‘자연과학·서학 수용’, ‘학맥·인물사’ 등과 같이 비교의 카테고리를 보다 친절하게 제시해 주었으면 좋겠다고 제안했다. 이에 대해 윤대영은 현재 발표문이 원래 다른 목적의 글을 재구성한 것이라 구조의 일관성이 다소 약한 측면이 있다며 책의 방향에 맞추어 비교 범주를 명확히 드러내는 방식으로 다시 써 보겠다고 답했다.

또한 고가영은 왕조가 바뀌는 과정에서 불교 세력이 부상했다가 다시 유교가 강조되는 양상이 반복되는 것처럼 보이는데 이것이 각 시기의 정치 세력과 어떤 방식으로 맞물려 있었는지 물었다. 윤대영은 이 부분은 아직 충분한 연구를 진행한 상태는 아니라고 전제하면서도, 남북 분열기 남쪽 정권이 불교를 적극 장려한 사례가 있다고 답했다. 남부는 본래 참파가 지배했고 참파 엘리트층은 힌두교·이슬람과 연결된 종교 문화를 중심으로 형성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 지역을 베트남 문화권으로 편입하는 과정에서 유교와 불교가 함께 활용되었으며 옛 참파 영역 곳곳에 베트남식 사찰과 유교적 건축물이 혼재하는 모습이 남아 있다고 설명했다.

고가영은 또, 명·청 교체기 조선에서 소중화 의식이 강화되고 청을 야만으로 규정하는 담론이 형성된 것처럼 베트남에서도 청을 비판하면서 유학적 정통성을 강조하는 담론이 존재했는지 질문했다. 윤대영은 베트남 실록을 보면 청 황제를 노골적으로 비판하는 대목이 확인된다며 조선과 마찬가지로 청을 멸시하는 담론이 형성되었다는 점에서 공통성이 있다고 간단히 언급했고 김호는 이에 대해 베트남·조선·일본 모두 청에 대한 멸시와 거리두기가 나타난다는 점을 보충하였다.

오명석(아시아연구소)은 조선과 달리 베트남에서는 14세기 호꾸이 리 이후 성리학에 대한 비판이 어떻게 이어졌는지 그리고 베트남 유학이 조선처럼 강한 성리학적 헤게모니 아래에서 심화된 철학적 논쟁을 전개했는지에 대해 질문했다. 이에 대해 윤대영은 조선의 성리학자들이 매우 심각한 철학적 고민과 논쟁을 펼쳤던 데 비해, 베트남 유학에서는 그런 유형의 심화된 논쟁이 상대적으로 드물어 보인다고 답했다. 뒤이은 논의에서 김호는 일본에도 유학과 양명학의 사례를 들어 일본에서는 승려들이 성리학을 수용하고, 에도 유학자들이 봉건 영주를 보좌하는 실무 학문을 담당했다는 점, 그리고 이런 구도가 일본 학계가 조선 성리학을 ‘현실과 동떨어진 허황된 학문’으로 규정하고 에도 유학·양명학을 ‘실학’으로 부각시키는 담론 구조와 연결되어 있음을 설명했다. 그는 한국의 실학 담론 역시 이러한 일본식 구도와 서양 과학사를 전제한 평가틀의 영향 아래, 16세기 성리학자들의 현실 정치·제도 개혁 논의를 과소평가하고 18세기 정약용 등만을 실무적 학문의 대표로 띄우는 방식으로 구성된 측면이 있다고 비판하면서 베트남 사례에도 이 틀을 기계적으로 적용하지 말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에 대해 윤대영은 자신이 공부한 세대는 과거의 경전과 전통 속에서만 모델을 찾기보다는, 중국·일본·서양에서 들어온 새로운 텍스트와 사상 속에서 다른 유형의 ‘모델’을 설정하려 한 인물들에 주목해 왔으며 19세기 초 이후에는 과거로 돌아가는 방식이 점차 힘을 잃고 외부에서 도입한 새로운 기준과 무대를 통해 진보를 모색하는 견해가 등장한다고 설명했다.

김종철(아시아연구소)은 조선과 베트남을 함께 놓고 볼 때, 정치적 문제에 부딪힐 때마다 상서 등 경전으로 되돌아가 해법과 선례를 찾는 순환 구조가 공통적으로 보이며 여기에 16~18세기 마테오 리치 이후 서구 세계관·학문의 유입이 기존 순환을 깨는 외부 충격으로 작용한 것 같다고 말했다. 조선의 상대적 정치 안정성과 베트남의 빈번한 혼란이 각각 사회·신분·계급 문제에 대한 학자들의 관심과, 해결책을 찾기 위해 참조하는 모델의 차이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 그리고 외부에서 들어온 새로운 참조 틀이 동아시아 지성사 변화에 어떤 역할을 했는지 질문했다. 윤대영은 18세기 후반까지는 중국을 매개로 한 간접적인 외부 영향이 주를 이루었으나 이후에는 다른 내용과 방향을 가진 학문·사상이 유입되면서 더 이상 과거만을 모델로 삼지 않고 외부 세계에서 새로운 기준과 무대를 찾는 시도가 나타났다고 답했다. 그는 자신이 관심을 가져온 인물군도 바로 이런 변화 속에서 외부 텍스트를 토대로 새로운 진보의 방향을 모색한 사례라고 덧붙였다.

마지막으로 고가영은 조선에서 출세를 위해서는 경전을 잘 아는 유학자의 길이 가장 중요한 경로였던 것처럼 왕조가 자주 교체된 베트남에서는 무인과 문인의 사회적 위상이 어떻게 구성되었는지, 칼을 쓰는 사람과 글을 쓰는 사람의 지위 관계가 조선·일본과 어떻게 달랐는지 물었다. 윤대영은 현대 베트남 대학에서도 남녀 학생 모두가 군사훈련을 받는 등 무·문이 완전히 분리된 전통은 아니지만, 동시에 공부하는 사람을 존중하는 문화가 여전히 강하게 유지되고 있다고 답하며 베트남 사회에서도 학문과 지식을 가진 이들에 대한 존중이 중요한 가치로 남아 있음을 언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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