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지성] 전체주의와 영구적 혼돈 사이에서 민주주의 지키기

[대학지성] 전체주의와 영구적 혼돈 사이에서 민주주의 지키기

  • 이승원 서울대·정치학  승인 2026.03.15 01:00

포퓰리즘은 오랫동안 정치적 일탈이나 대중 선동의 동의어로 취급받아 왔으며, 정치적으로 미성숙한 군중이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일시적인 병리 현상으로 폄하되어 왔다. 포퓰리즘에 대한 학계의 연구는 대체로 포퓰리즘이 이념적으로 일관성이 없고 학술적 분석 범주로 사용하기에는 지나치게 모호하다고 보고 있으며, 이런 이유로 이 개념 자체의 폐기를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다.

아르헨티나 출신 정치사상가 에르네스토 라클라우(Ernesto Laclau)는 『포퓰리즘 이성』을 통해서 이러한 통념을 정면으로 뒤집는다. 포퓰리즘은 정치의 변종이 아니라 정치 그 자체의 근본 논리이며, 그것이 나타내는 모호성은 용어에 연결된 의미의 문제라기보다는 오히려 현실 정치의 특징을 반영한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 그는 포퓰리즘에 대한 기존의 경멸적 거부 반응은 사실 정치 자체에 대한 거부이자, 공동체의 문제를 기술 관료적 행정으로 환원하려는 반민주적 충동의 표현이라고 단언한다. 이 책에서 펼쳐지는 라클라우의 문제의식은 단지 포퓰리즘을 옹호하는 것을 넘어, 자크 랑시에르가 기술한 ‘치안’에 갇힌 정치를 복원하는 시도와 함께한다고 볼 수 있다.

요구, 등가사슬, 그리고 인민의 구성

이 책의 이론적 출발점은 ‘요구(demand)’다. 사회 안에는 충족되지 못한 수많은 민주적 요구들이 항상 존재한다. 라클라우는 ‘요구’를 분석의 가장 기초적인 단위로 설정하면서, 주거, 교육, 고용, 환경, 의료, 안전 등 개인이나 집단이 제도적 체계를 향해 제기하는 것들을 이 범주 아래 모은다. 이 요구들이 기존 제도 안에서 개별적으로 처리될 때 이 요구들은 ‘민주적 요구(democratic demands)’의 위상을 가지며, ‘차이의 논리(logic of difference)’가 지배하는 기성 사회 안에서 조정된다. 각각의 민주적 요구와 그에 따른 갈등은 분리되어 관리되고, 그에 따라 사회 체제도 정상성을 유지한다. 따라서 개별 갈등은 체제를 위협할 정도로 응축되기 전에 관리되며, 여기서 작동하는 기술 관료적 행정이 정치의 자리를 대체하게 된다. 이것이 정치 없는 오늘날 신자유주의 통치의 본질이다.

그러나 제도가 요구들을 흡수하지 못하고 미해결된 민주적 요구들이 쌓여갈 때, 서로 다른 요구들 사이에 ‘등가 사슬(equivalential chain)’이 형성된다. 본래 이질적인 요구들이 공통의 적, 즉 기존 지배 블록에 대한 대항의식 속에서 하나로 연결되는 것이다. 가령 주거 문제를 제기하는 집단, 교육 불평등에 분노하는 집단, 고용 불안에 처한 집단이 각자의 요구를 유지하면서도 ‘기득권 체제’에 맞선다는 공통의 전선을 구축한다. 바로 이 과정에서 요구는 ‘인민적 요구(popular demands)’로 재구성되고 특정한 이름으로 묶인 ‘인민(the people)’이라는 정치적 주체가 비로소 구성된다. 라클라우에게 인민은 미리 존재하는 실체가 아니라, 등가사슬의 접합(articulation)을 통해 사후적으로 만들어지는 담론적 구성물이다. 이 점에서 그의 이론은 ‘인민’을 실정적 범주로 간주하는 실증주의 또는 정통 마르크스주의적 관점 모두와 단절하고 있으며, 정치이론을 결정론이나 환원주의로부터 해방시키려 한다고 볼 수 있다. (중략)

출처 : 대학지성 In&Out(http://www.unipres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