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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11월 25일 - 3:30 pm
End
2024년 11월 25일 - 5:00 p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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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학교 아시아연구소 303호
나시르 쿠스라우의 ‘사파르나마’(Safar nāma)는 11세기에 페르시아어로 작성된 최초의 무슬림 성지순례기이다. 현 타지키스탄 카보디욘(Qabodiyon) 출신으로 셀주크투르크의 주요 도시 메르브에서 재정관료로 일하고 있었던 그는 어느 날 꿈에서 메카를 가리키는 한 사람을 보고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이슬람의 3대 성지인 예루살렘, 메카, 메디나와 당시 이슬람 학문의 중심지였던 카이로를 향해 7년간의 순례 여행을 떠났다. 본 발표에서는 나시르 쿠스라우의 발자취를 따라 중세 무슬림에게 성지순례가 어떤 의미였는지 살펴볼 것이다.
발표자: 이주연 (경희대학교 한국고대사·고고학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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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11월 25일(월) 아시아연구소 서아시아센터에서는 경희대학교 한국고대사·고고학연구소 이주연 박사를 초빙해 ‘11세기 중앙아시아 무슬림의 메카와 예루살렘 순례’를 주제로 특별 강연을 마련했다. 이주연 박사는 서울대학교 물리교육과를 졸업 후 동 대학원에서 동양사학 석사 및 박사학위를 받았다. 주요 연구 분야는 중앙아시아사이며, 대표 저서로는 《사료로 보는 몽골 평화 시대 동서문화 교류사》 등이 있다.
2024년 아시아연구소 저술지원사업에 선정된 이주연 박사의 연구 주제는 ‘11세기 무슬림의 성지순례 여행기 《사파르나마(Safar nāma)》의 번역과 해제’이다. 여기서 번역은 현존하는 페르시아어 여행기 중 가장 이른 시기인 11세기 중반에 작성된 성지순례여행기에 대한 번역을, 해제는 동 서적에서 드러난 11세기 아랍-이슬람권의 정치, 경제, 문화, 종교에 대한 설명을 의미한다. 이번 강연에서는 현재 진행 중인 작업 과정에서의 연구 및 발견 성과를 발표했다.
강연은 《사파르나마》의 저자 나시르 쿠스라우(Nashir Khusraw, 1004?~1088?)에 관한 설명으로 시작됐다. 이주연 박사는 그를 ‘여행가, 시인, 이스마일리 선교사’라는 3가지 정체성을 지닌 인물로 설명했다. 특히, 순례 전후로 그의 성향은 관료적에서 종교적으로 바뀌었다. 성지순례 여정 중 꿈에서 계시를 통해 나시르는 자신의 종교, 이슬람교를 위해 살겠다고 다짐하게 된다. 또 7년 간의 순례를 마친 뒤에는 시집(DIVAN of NASIR-l-KHUSRAW)을 작성하기도 했고, 이스마일리 교리를 전파하기도 했지만, 물리적 박해를 받아 아프가니스탄 동부로 피신 후 그곳에서 생을 마감한다.
나시르의 순례기는 1045년 이란 북동부 호라산이 위치한 메르브(Merv)에서 시작된다. 그는 이라크 북부 일대를 지나 튀르키예 동남부 디야르 바크르로 들어가는데, 당시 이곳은 이슬람교와 기독교의 접경지대였기 때문에 기독교인들을 처음 목격한 후 느낀 그의 놀라움이 여행기에 나타나기도 한다. 이후 시리아를 지나 예루살렘에 도착해 창세기 족장들의 묘가 있는 헤브론(Hebron)에서 순례를 진행한다. 예루살렘 순례를 마친 후 그는 메카 순례를 위해 아라비아반도에 진입한다. 당시에는 개인 순례가 위험했기 때문에 특정 집합지를 중심으로 메카로 향하는 순례 카라반이 운영되었다. 순례 카라반 경로는 다마스쿠스(레반트)발, 바그다드발, 이집트발 등이 대표적이며, 이 외에도 마그리브발 카라반과 인도, 이스탄불 등에서 출발하는 카라반도 존재했다. 그러나 그가 처음으로 메카를 방문하려던 해에는 공식 카라반이 운영되지 않아 그는 소규모 도보 카라반에 합류해 예루살렘에서 메카까지 이동했다. 그런데도 나시르는 첫 번째 메카 순례에 실패하였고, 이후 그는 카이로(당시 파티마조 수도)에서 거주하며 4번의 시도 끝에 메카 순례를 완성할 수 있었다.
이주연 박사는 《사파르나마》의 객관적이고 자세한 서술 방식에 주목하였다. 저자인 나시르는 순례 전 셀주크 투르크의 디완(Dīwān, 이슬람권 정부의 행정 부처)에 속해 서기직과 술탄의 재정을 관리하는 일을 겸직했다. 여행기를 읽다 보면 여기에서 기인하는 그의 뛰어난 서술 능력과 수학적, 그리고 과학적 지식을 엿볼 수 있다.
카이로 거주 시절 그는 본인이 임대한 주택의 크기, 가격 등을 기록해 당시의 부동산 시세를 확인할 수 있다. 나시르는 약 18평 규모의 집을 월 15 마그레브 디나르에 구매했는데, 이는 한화로 약 4~500만 원에 달한다. 동시에 70평 규모의 집에 350명이 살고 있다는 기록이 있어, 당시 카이로의 빈부격차까지 실감할 수 있다. 또한, 여행기에는 그가 방문한 지역에 대한 면적, 건물의 높이, 거리의 폭, 시장 물가, 성채의 구성요소 등 수적인 묘사가 풍부하게 드러난다. 이동 과정에서는 이슬람력과 이란력을 병용하는 놀라움을 보였다. 이를 통해 그가 천문학과 역법에 굉장히 밝았음을 추측할 수 있다. 또한, 상세한 핫즈(Hajj) 순례 기록을 통해 과거와 오늘날의 순례 방법을 비교할 수 있다. 《사파르나마》에 기록된 핫즈 순례에는 이흐람(Ihram)을 포함한 순례 전 정결 의식, 카바 신전을 도는 타와프(Ṭawāf), 사이(Saʿī, 사파와 마르와 사이를 왕래하는 의식) 등을 확인할 수 있다. 이를 통해 오늘날 이슬람 순례 방식은 오래전부터 큰 변화 없이 유지되어 왔음을 알 수 있다. 다만, 11세기 핫즈는 단 이틀 정도만 소요되어 보통 5일 정도인 오늘날의 순례 기간과 차이를 보이기도 했다. 이주연 박사는 나시르의 객관적이고 상세한 서술 방식의 목적이 자신의 고향 사람들에게 생생하고 정확한 순례 여정기를 전달하기 위함이었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이주연 박사는 이슬람과 중앙아시아 역사와 페르시아어에 대한 풍부한 지식을 바탕으로 11세기 이슬람 제국에서 살아갔던 무슬림의 성지순례를 포착했다. 특히, 접하기 힘든 당시 무슬림 생활사에 대한 자세하고 흥미로운 이야기를 선사하면서 현재진행 중인 《사파르나마》의 연구 성과를 더욱 기대하게 하였다. 강연 종료 이후에도 참여자들 간 열띤 질의응답 속에서 서아시아센터의 특별강연이 마무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