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의 애치슨 라인은 소련과 중국과 군사적 위협에 대응해 미국이 그었다. 미국의 인도태평양전략과 중국의 일대일로가 경쟁하는 지금은 석유ㆍ천연가스 등 에너지와 반도체 등의 공급망을 놓고 새로운 애치슨 라인이 그어지고 있다. 그 최전선이 한국이다. 빅데이터 분석 결과 한국은 배터리와 문화, 미국은 글로벌 이슈와 환경, 일본은 경제와 방위, 중국은 개발, 보건 등이 자국 이익을 대변하는 분야로 나타났다. 4개국 모두 공급망 등이 국익의 핵심 분야임을 뜻한다.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국제사회에서 국가안보(國家安保)의 개념이 바뀌고 있다.
그간의 안보는 군사적 성격이 강했다. 안보의 사전적 정의부터 ‘외부의 위협이나 침략으로부터 국가와 국민의 안전을 지키는 일’로 사실상 군사적 방어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러나 이제 안보는 군사뿐 아니라 무역과 자원, 생산 요소 확보라는 경제의 영역까지 포괄하는 ‘공급망 안보’의 개념으로 재편됐다.
중앙일보가 서울대 아시아연구소와 함께 한국ㆍ미국ㆍ일본ㆍ중국 등 4개국 824개 언론의 최근 3년간의 보도 내용과 2017년 보도를 비교한 빅 데이터 분석 결과 안보는 전통적 군사 안보에서 공급망 확보 등 교역과 경제를 포괄하는 개념으로 급격하게 변화한 것으로 나타났다.
미ㆍ중 경쟁이 본격화하기 시작한 2017년만 해도 무역ㆍ기술ㆍ공급망과 관련한 이슈가 안보의 측면에서 기술된 비율을 뜻하는 ‘상관관계’가 각각 19%ㆍ37%ㆍ20%에 그쳤다. 빅데이터 분석 기법상 통상 20% 이하의 상관관계는 직접적 연관성이 떨어지는 것으로 본다. 즉 에너지, 자원 확보, 무역 등은 전통적 개념의 군사적 안보와는 사실상 별개의 영역으로 인식되고 있었다는 의미다.
한ㆍ미ㆍ일ㆍ중 4개국 언론사의 기사 550여만건 빅데이터 분석에 따르면 2017년엔 안보와 무역ㆍ기술ㆍ망의 교집합은 크지 않았다. 하지만 2022년 보도에선 안보와 무역ㆍ기술ㆍ망의 교집합이 대폭 늘었다. 숫자는 무역ㆍ기술ㆍ망 등의 키워드가 안보적 측면에서 기술된 비율을 뜻한다. 그래픽=김영옥 기자 yesok@joongang.co.kr
하지만 5년여 만에 안보의 뜻이 완전히 달라졌다. 에너지, 기술, 자원 등 전 영역에서 펼쳐지고 있는 미국과 중국의 ‘공급망 전쟁(Chain War)’이 부른 결과다.
지난해 보도에서 안보는 무역ㆍ기술ㆍ공급망 등 미ㆍ중 경쟁의 핵심 키워드와 각각 37%ㆍ41%ㆍ52%의 상관관계를 보였다. 직관적으로 표현하면 안보와 관련한 기사의 절반가량이 무역과 기술 경쟁, 특히 공급망 확보의 관점에서 기술되고 있다는 뜻이다. 석유와 천연가스 등 에너지 공급망을 확보하고 자동차 제조에 필요한 반도체 공급선을 확보하는 경쟁이 국가 안보의 개념으로 다뤄지고 있음을 의미한다.
무역ㆍ기술ㆍ공급망 중에서도 가장 두드러진 핵심 고리는 공급망이다. 공급망 확보 경쟁은 무역과 기술 등의 키워드와도 각각 47%와 46%의 상관관계를 가진 것으로 나타났다. 공급망이 신(新) 안보의 중심에 자리 잡은 것으로 해석된다.
전문가들은 이러한 변화를 공급망 등 ‘돈을 벌고, 먹고 살기 위한’ 경제 현안이 기존의 군사적 안보 영역과 상호 융합하는 새로운 ‘포괄안보 시대’로의 전환으로 해석한다.
빅 데이터 분석을 담당한 김도훈 아르스프락시아 대표는 “에너지와 기술 등 밸류체인을 중심으로 한 ‘안보 컨버전스’가 빠르게 진행된다는 게 명확히 확인됐다”며 “에너지ㆍ기술ㆍ공급망을 확보하고 경쟁국의 망을 차단하려는 각국의 시도는 무력이 동원되지 않았을 뿐 실제 전쟁 준비에 버금가는 방식과 수위로 진행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실제로 한ㆍ미ㆍ일ㆍ중 4개국은 상대국을 어떤 프레임으로 기술하는지에 대한 빅 데이터 분석 결과, '망 확보' 경쟁이 주요 4개국의 공통된 압도적 1위로 나타났다. 주요 국가들이 이미 서로를 ‘공급망 경쟁’의 우군 또는 적군의 프레임으로 상대를 바라보고 있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빅데이터 분석 결과 한ㆍ미ㆍ일ㆍ중 4개국은 '망(Chain) 확보'를 각자의 관심사로 놓고 있다는 점에서 일치했다. 한국은 '망' 이외에 중국과는 코로나와 국제물가가 공동 관심였고, 일본과는 국제물가와 미사일 대응이 공동 관심사였다. 그런데 동맹국인 미국과는 '망' 외에 다른 미래가치를 공유하지 못한 것으로 나타났다. 반면 미국과 일본은 미사일, 군사정보, 기후변화 등의 관심사를 공유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래픽=김주원 기자 zoom@joongang.co.kr
국민들도 이미 안보를 더는 군사적 개념이 아닌 포괄적 안보 개념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한국리서치의 여론조사에서 ‘올해 가장 주안점을 둬야 할 안보 분야’를 물었더니, 47.7%가 ‘글로벌 경기 침체에 따른 경제 위기 대응’이라고 답했다. 전통적 의미의 안보에 해당하는 ‘북한 도발에 대한 대응과 차단’ 응답은 19.6%였다. ‘가장 우려되는 외교ㆍ안보 이슈’를 묻는 질문에도 글로벌 경기 침체가 36.2%로 가장 높았고, 북핵 위기는 21.5%로 집계됐다.
그래픽=차준홍 기자 cha.junhong@joongang.co.kr
그래픽=차준홍 기자 cha.junhong@joongang.co.kr
물론 공급망 등 경제 이슈가 안보의 주요 축이 됐다고 해서 전통적 군사 안보의 중요성이 퇴색하거나 후순위로 밀리는 것은 아니다. 이보다는 군사 안보가 경제 영역과 급속하게 융합하면서 한국도 북핵과 경제 위기 대응을 통합적으로 바라보고 국익을 최대화하는 포괄 안보의 과제를 떠안게 됐다는 지적이 나온다.
안보를 둘러싼 국제 질서의 변화와 한국의 대응 과제를 명확히 보여주는 사례는 5년의 시차를 두고 이뤄진 미국 대통령의 첫 방한 동선이다. 두 미국 대통령은 첫 방한 때 모두 경기도 평택을 찾았는데 행선지가 달랐다.
2017년 11월 7일 당시 문재인 대통령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경기도 평택의 미군기지 캠프 험프리스에서 한·미 장병들과 오찬을 했다. 험프리스 기지 방문은 트럼프 전 대통령의 방한 첫 일정이었다. 연합뉴스
2017년 11월 방한한 당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첫 일정으로 평택 험프리스 미군 기지를 찾았다. 험프리스는 세계 최대 규모의 해외 미군기지다. 당시 문재인 정부는 험프리스 기지를 한ㆍ미동맹 안보의 상징물로 내세우며 트럼프 대통령의 험프리스 방문을 먼저 요청했다.
반면 5년 뒤인 지난해 5월 조 바이든 대통령은 가장 먼저 평택 삼성전자 공장을 방문했다. 윤석열 대통령과 바이든 대통령은 공장을 함께 둘러본 뒤 양국 관계를 ‘포괄적 전략동맹’으로 격상하고, 협력 분야를 군사 안보는 물론 경제, 보건, 기후 등 전 영역으로 넓혀 공동 대응하는 데 합의했다.
윤석열 대통령과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지난해 5월 20일 경기 평택 삼성전자 반도체 공장을 시찰하던 중 양손 엄지 손가락을 함께 들어보이고 있다. 뉴스1
곽성일 대외경제정책연구원 경제안보전략실장은 “안보의 개념이 경제ㆍ군사의 융합 형태로 변화하면서, 동맹국과의 공급망 확보 협력에서 소외될 경우 전통적 군사적 안보까지 연쇄적으로 무너지는 구조로 바뀌고 있다”며 “한국 입장에선 전통적 동맹과 전 영역에서 협력하는 포괄안보 전략을 구사하면서 향후 우려되는 자국 중심주의에 따른 진영 내 파편화까지 차단하는 전략적 접근이 필요하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