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내일신문] 임현진 칼럼 - 우크라이나, 머나먼 국가 건설의 길2022-04-04 22:25
작성자 Level 10

[창립소장 임현진 교수(시민사회 프로그램 디렉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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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현진 서울대 명예교수 정치사회학


문명과 야만은 한뿌리다. 야만은 계몽과 해방에 의해 문명으로 바뀐다. 그러나 소통과 포용이 사라지면 문명은 다시 야만으로 돌아간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은 문명과 야만이 표리를 이루고 있음을 잘 보여준다. 우리가 역사적으로 뼈저리게 경험했듯이 나라를 제대로 일으켜세우지 못하면 강대국들의 장기판에서 졸(卒)의 신세를 벗어나지 못한다.

냉전과 열전의 교차가 강대국 국제정치의 특징이다. 우크라이나는 미국·유럽과 러시아 사이에서 냉전의 전초로서 열전의 희생물이 되고 있다. 민간시설에 대한 무차별 포격을 주저하지 않는 러시아는 국제사회의 반전 여론에 아랑곳하지 않는다. 미국과 유럽은 경제제재를 통해 러시아를 서서히 고사시키려 하지만 러시아는 핵무기 사용도 불사하겠다고 협박한다.

인구의 1/10이 인접국으로 대피하는 비극 아래 국민은 삶의 터전을 잃고 생명의 위협을 받고 있다. 우크라이나는 서구의 자유주의와 러시아의 전체주의간 세계관 충돌 아래 미·러 군사대결의 피해자가 되고 있다. 러시아는 신유라시아주의(Neo-Eurasianism) 추구로 과거의 영광을 되찾으려 하고, 미국은 러시아를 새장 안에 가두려는 봉쇄정책 아래 NATO의 동진을 지지했다.

종전 이후 분단국가가 나올 가능성

우크라이나는 러시아와 유럽을 연결하는 중추 국가다. 모두 일곱 나라와 국경을 접하고 있다. 이중 루마니아 슬로바키아 헝가리 폴란드는 NATO에 가입했고, 러시아와 벨라루스는 NATO의 동진을 막으려고 동맹하고 있다. 몰도바는 친러 트란스니스트리아 독립 문제로 이도 저도 못하고 있다. 흑해를 두고 마주한 불가리아와 터키는 NATO 회원국이다.

2000년대 후반만 해도 우크라이나 국민의 28% 정도만 NATO 가입을 지지했다. 그러나 2014년 러시아가 부다페스트 양해각서를 위반하고 크림반도를 병합하면서 NATO 가입에 찬성하는 국민은 70% 이상으로 늘었다. 드니프로강을 경계로 우크라이나의 동부지역 공업지대에는 친러 성향의 노동자들이 많다. 곡창지대인 서부지역의 농민들은 서구지향적이다. 이들은 중산층화하면서 러시아식 중앙통제와 자유에 대한 제한을 싫어한다. 역사적으로 동부는 러시아식 전제정을 따랐고, 서부는 유럽식 의회정을 쫓았다. 종전 이후 동서 두개의 분단국가가 나올 우려가 적지 않다.

친러정권을 무너뜨린 일련의 시민혁명에서 우크라이나의 변화를 본다. 친러와 친서구의 극단적 대립으로 인한 지역분열에 식상한 시민들이 주권의식 아래 뭉쳤다. 2004년 오렌지혁명에서 여당의 부정선거에 저항하며 재선거를 쟁취했다. 그러나 친러정권의 부패와 무능을 보고 2013년 유로마이단 시위를 통해 대통령 탄핵을 이끌었다.

우크라이나는 오랫동안 민족과 영토가 갈라지고 찢기면서 나라 만들기에 대한 갈망이 컸다. 몽고 타타르 폴란드 리투아니아 러시아 오스트리아 헝가리 등 연방 형태의 제국으로부터 지배를 받았다.

몽골인의 통치로부터 해방되는 과정에서 모스크바국(國)이 주도적 역할을 하면서 러시아는 키이우에서 모스크바로 중심을 바꾸었다. 중세 키이우루스공국은 당시 유럽에서 가장 넓은 영토를 지닌 나라였다. 오늘의 우크라이나뿐 아니라 러시아와 벨라루스도 키이우에 뿌리를 두고 있다.

'루스의 땅'이라는 의미에서 보듯 러시아는 우크라이나를 늘 자신의 일부로 간주한다. 그러나 우크라이나는 러시아와는 전혀 다른 독자적 민족과 국가의 정체성을 찾는다. 우크라이나인이 77.8%로 다수고, 러시아인은 17%에 불과하다. 러시아어를 알지만 독자적 우크라이나어가 공용어다. 우크라이나정교도가 주류지만 카이우파가 50.4%로 모스크바파 26.1%보다 많다.

우크라이나 문학에서도 러시아에 대한 저항이 두드러진다. 러시아의 직간접 지배 아래 민속이나 희극과 같은 비정치적 작품만 허용되었다. 페데르부르크에서 러시아어로 글을 쓴 고골(Nicolai Gogol)은 원래 우크라이나의 중부 출신이다.

그의 소설 '크리스마스 전야' 주인공인 코사크 협잡꾼은 예카테리나여제를 만나 황국의 거대함과 여제의 위대함에 눌리지 않고 왜 자신들의 자율을 파괴했냐고 묻는다. 우크라이나의 기상을 풍자해 러시아에 굴종하지 않음을 시사한 것이다.

신유라시아에 대한 환상이 만든 전쟁

푸틴은 2014년 크림반도 병합 이후 우크라이나 없이 러시아가 제국으로 부활할 수 없다고 보았다. 관변 국수주의 사상가 두긴(Alexandr Dugin)이 제시한 유럽과 아시아에 걸치는 신유라시아주의 아래 안으로는 구소련 국가들을 품고 바깥으로 유럽연합을 손아귀에 넣으려 한다. 괴물로 묘사되는 미국은 최대의 적이며, 중국은 해체되어야 할 경쟁자이고 바다 건너 있는 일본이 협력자로 등장한다.

신유라시아주의 환상 아래 푸틴의 전쟁이 오히려 우크라이나로 하여금 국가건설의 중요성을 절감하게 만들어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