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는 최선의 정치체제다. 자본주의나 사회주의 모두 민주주의를 판다. 자유민주주의, 입헌민주주의, 인민민주주의, 민중민주주의, 사회민주주의 등 100가지가 넘는다. 시대의 변화에 따라 민주주의는 변질한다. populocracy(포퓰리즘정치), kakistocracy(극악정치), kleptocracy(도둑정치), plutocracy(금권정치), algocracy(알고리즘정치), mobocracy(중우정치), dinocracy(소음정치) 등 여러 가지다.
민주주의의 변질
미국정치학회 회장을 역임한 샤츠슈나이더(E E Schattschneider) 교수는 국민은 민주주의의 주체임에도 불구하고 '절반의 주권자(semisovereign people)'에 지나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demos(인민)의 kratos(지배)로서 민주주의는 선거를 통해 선택받은 소수의 엘리트들이 거꾸로 다수의 국민을 지배한다. 시민은 온라인이나 거리로 나가 민주주의를 직접 하려 한다. 민주주의가 시끄러워진다.
유럽정치에 정통한 안병영 연세대 명예교수에 따르면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지금까지 미국은 14명 대통령, 한국은 13명 대통령, 영국은 18명 총리, 일본은 33명 총리를 두었지만, 독일은 불과 8명 총리만을 가졌다. 아데나워(Adenauer)가 14년, 콜(Kohl)과 메르켈(Merkel)이 각기 16년 총리로 재직했다. 독일이 정치안정에서 돋보이는 이유가 무엇일까? 내각제만은 아니다.
정치 연합을 가능케 하는 제도에 열쇠가 있다. 하나는 선거를 통해 의회와 정부를 연결하는 정치대표체계, 다른 하나는 이익집단을 통해 시민과 정부를 매개하는 이익조정체제다. 영국, 일본, 미국, 한국 등의 다수제(majoritarian) 정치는 승자 독식과 권력 독점이 나타난다. 이와 달리 독일의 합의(concensus) 정치는 선거 이후 다수파와 소수파가 연정을 구성하여 각료 배분과 정책 공조를 통해 효율성을 높인다. 노사정 3자 협의에 기초한 코포라티즘이 시민사회의 복잡한 이해 조정을 도와준다. 독일은 극단적 좌우로 편향되지 않는다. 합의 정치와 코포라티즘이 사회적 대화를 통해 시민사회와 의회와 정부를 서로 연결한다.
한국 정치 3.0의 시대
최근 여론조사를 보면 국민은 문화는 선진국, 경제는 중진국, 정치는 후진국이라 한다. 국회에 가면 'BTS'는 없고, '오징어 게임'만 있다. 민주화의 전기를 마련한 '87년 체제'를 넘지 못하고 있다. 권위주의 시대 1.0은 끝났다. 사회가 복잡해졌고, 시민의 주관이 뚜렷한 소득 3만달러 시대다. '87년 체제'의 2.0으론 어렵다. 이제 한국 정치 3.0으로 가야 한다. 한국은 대통령 중심제 아래 소선거구제에 입각한 단순 다수결주의를 채택하고 있다. 다수제 정치에서 50% 미만이라도 소수점 +만으로도 승자 독식(winner-takes-all)이 일어난다. 20대 대선에서 유권자의 투표율은 77.15%로 비교적 높았으나 1위 48.56%와 2위 47.83% 사이의 차이는 불과 0.73%포인트에 지나지 않았다. 패자가 승복하지 않는다. 여소야대 아래 대결로 치닫는다.
국회의원 선거도 단순 다수결주의로 인해 2등보다 한 표만 많으면 당선된다. 소선거구제는 사표를 양산한다. 승자 독식 아래 대표성과 비례성이 왜곡된다. 역대 총선에서 사표의 비율을 보면 17대 50%, 18대 47%, 19대 46%, 20대 50.3%, 21대 44%다. 유권자 유효 투표의 거의 절반 내외가 사표가 된다. 국민의 절반이 "나를 대표하는 의원이 없다"고 절망한다.
한국사회의 분화는 급격하다. 지금의 양당 중심 제도로는 시민사회의 다양한 이해관계를 대변하기 어렵다. 국회의원 300석 중 47석의 비례대표제는 형식적이다. 사회 분화에 따른 갈등과 균열을 해소하려면 다양한 계급, 집단, 부문의 목소리를 담을 수 있는 다당제가 필요하다. 내각제나 분권제를 향한 권력 구조의 개혁은 다당제가 정착될 수 있도록 소선거구제를 중대선거구제나 도농복합선거구제로 개편해야 한다.
지금의 소선거구제 아래 단순 다수결주의에 의한 국회의원 선출은 거대 여야 정당의 지역주의에 근거한 엘리트 카르텔을 지속시킨다. 대통령선거도 결선투표나 선호 투표 없는 단순 다수결주의로 진행되기 때문에 선거가 과열되고 승자 독식에 따른 권력의 독점이 나타난다. 여러 사회 세력의 공존과 상생이 어렵다. 5년 단임제는 대통령의 레임덕을 일찍 가져오고 정부의 효율성과 정책의 지속성도 떨어뜨린다. 이왕 대통령제를 하려면 4년 중임의 대통령제로 바꿔야 한다. 내각제로 가려면 준비가 필요하다. 내각제를 도입하기 위해서는 아래로부터의 공천제도의 도입과 함께 지금의 소선거구제를 중대선거구제 혹은 도농복합선거구제로 바꾸어야 한다.
대안을 찾아: 합의 정치와 코포라티즘
한국이 산업화와 민주화를 동시에 이루었지만 힘의 집중과 부의 편중을 넘지 못하고 있다. 다수제 정치대표체계와 다원주의의 이익조정체계의 한계에 기인한다. 선거의 정치는 유권자의 숫자를 반영하지만, 유권자 각각이 가지는 이해관계의 강도를 대변하지 못한다. 반면 코포라티즘적 이익집단의 정치는 참여자들이 가지는 이해관계의 강도를 반영한다.
숫자를 대표하는 정치대표체계와 이해의 강도를 반영하는 이익조정체계가 보완적인 관계를 유지해야 한다. 사회의 갈등과 균열을 해소하여 통합으로 나아갈 수 있다. 의회가 중심이 되는 정치대표체계와 시민사회를 포용하는 이익조정체계가 합류해야 한다. 연정(coalition)에서 보듯 합의 정치는 의회에서 여러 가지 산업, 무역, 복지, 노동, 소득, 조세 등 사회경제정책에 의해 뒤받쳐준다. 의회에서 당장 해결하지 못하는 시민사회의 현안은 코포라티즘적 이해조정에 의해 정부 정책으로 구현될 수 있다.
사회가 분화되고 다양성이 교차하면서 대치선이 복잡해지고 있다. 지역, 계층, 이념, 세대, 젠더, 고용의 차이에 따른 사회 갈등과 균열이 늘고 있는 가운데 특정 정치 세력들 사이에 진영 대립이 격화되고 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 여러 정당이 의회에서 경쟁하면서 정책을 조율하는 정치대표체계, 그리고 시민사회 이익집단들 사이의 다양하고 상충적인 이해를 정부와 조율하는 이익조정체계의 변화가 절실하다. 이를 위해 이해관계자 자본주의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다수제 정치에서 합의 정치, 그리고 사회 다원주의에서 사회 코포라티즘으로의 전환이 그것이다.
영미식 주주 자본주의와 유럽식 이해관계자 자본주의의 차이를 정치대표체계와 이익조정체계의 측면에서 도해한 것이 아래 그림이다. 두 가지를 가르는 본질이 다수제 정치와 합의 정치의 차이에 있다. 주주 자본주의는 자유 시장경제를 기반으로 국가-사회 관계가 사회 다원주의를 취한다. 주로 대통령제 아래 지역구 기반의 선거제가 특징이다. 미국, 한국 등이다. 이와 대조적으로 이해관계자 자본주의는 조정된 시장경제를 기반으로 국가-사회 관계가 사회 코포라티즘을 취한다. 주로 내각제 아래 비례대표제가 특징이다. 스웨덴, 독일, 네덜란드, 프랑스 등이다. 이해관계자 자본주의를 추구하는 나라들이 주주 자본주의를 취하는 나라들보다 경제성장과 사회복지가 낫다. 범죄율과 투옥률도 낮고, 이민과 난민에 대해 수용적이고 해외원조도 많다.
사진설명사진 확대 합의 정치에서 비례대표제는 복잡다단한 시민사회의 이해를 반영하면서 코포라티즘은 이익집단들이 정부와 정책을 협의하고 결과에 대한 책임을 공유하게 해준다. 어느 사회이고 다수는 유동적이다. 선거를 통해 오늘의 다수가 내일의 소수가 되고 그 반대가 이루어진다. 그러나 다수제 정치에서 소수가 배제됨으로써 과반이 안되더라도 승자 독식 아래 다수 일변도 정책이 나타날 수 있다. 그러므로 소수의 권리를 보호하고 다수의 독재를 견제하는 반(反)다수주의적(countermajoritarian) 장치로 합의 정치의 장점이 있다. 특히 소셜미디어를 이용한 진영논리에 따라 정치적 양극화가 심해질 때 사회적 대화(social dialogue), 토론(discussion), 협상(bargaining), 협의(concertation)를 중시하는 사회 코포라티즘은 문제의 해결에 유리하다.
정책협치 가능하다
유럽의 독일, 영국, 프랑스, 덴마크, 핀란드, 스웨덴, 네덜란드 등은 다수제 정치로부터 합의 정치로 제도적 변화를 거쳐 코포라티즘적 이해 조정에 의해 사회갈등을 해소하기 위해 노력해왔다. 이들은 인종, 종교, 언어, 계급, 지역, 세대, 젠더에 따른 분열과 대립을 해소하기 위해 소수를 정치 과정에 동참시키는 합의 정치와 다양하고 복잡한 이해를 수렴할 수 있는 코포라티즘의 사회적 대화를 제도화시켜왔다.
작금 여소야대로 인해 입법 독주와 거부권 행사가 부딪치고 있다. 스웨덴의 '계약 의회주의(contract parliamentarism)'를 참고하자. 오늘의 한국은 국내외적으로 위기 상황이다. 국민의힘, 더불어민주당, 정의당 등이 정책에서 협력해야 한다. 대통령제 아래 연정이 어렵다는 현실을 고려하여 국회 주도 아래 사회경제 분야 입법 과정에서 서로 공통적인 것을 수렴하는 정책협치를 통해 위기를 돌파해야 한다.
[임현진 서울대 명예교수 아시아연구소 창립소장]
https://www.mk.co.kr/news/contributors/107599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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