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기연 외 10인 지음 | 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 312쪽
2010년 12월 17일 튀니지 중부 지역의 소도시 시디 부지드(Sidi Bouzid)에서 행상을 하던 청년 무함마드 부아지지(Muhammad Bouazizi)가 도시 중심부에 위치한 광장에서 분신을 감행한다. 그날 아침 그는 여느 때처럼 이른 시간에 일어나 시장으로 향했다. 다른 상인보다 먼저 좋은 자리를 잡기 위해서였다.
트럭을 살 돈이 없어 직접 만든 수레에 배, 사과, 바나나를 실었다. 튀니지의 초대 대통령 이름을 딴, 번화한 하비브 부르기바 거리에 평소처럼 자리를 잡았다. 어려운 경제 사정으로 대학 공부를 할 수 없던 그는 스물여섯 살이 되었는데도 정식 허가도 받지 못한 채 과일을 파는 처지였다. 그래서 수시로 경찰에게 과일과 수레를 빼앗겼다.
경찰의 지나친 단속, 그것이 이 청년을 분노하게 한 직접적인 원인이었다. 그날도 경찰이 과일을 압수했고 벌금 20디나르(약 1만 원)를 부과했다. “하루 10디나르를 버는 사람에게 경찰은 벌금으로 20디나르를 물립니다. 말이 안 되어요.”
무함마드의 동료 상인이 한 말이다(ChabetD’Alix, 2012). 경찰이 저울을 압수하자 무함마드는 빼앗기지 않으려 했고, 한 여경이 그에게 수갑을 채웠다. 물건을 압수당한 무함마드는 몇몇 동료와 시의 관할 부서를 찾아갔다. 그러나 무함마드는 들어가지 못했고 감정이 격해진 채 가게에 들러 휘발유를 샀다.
손님을 기다리던 택시 기사, 행인 그리고 동료들이 보는 앞에서 무함마드는 휘발유를 몸에 끼얹고 이슬람의 신앙 고백인 샤하다를 읊은 뒤 불을 붙였다. --- p.4
광장에 모인 이들은 성별이나 계층, 종교 차이에 따라 분열되지 않고 여느 때보다 시민으로서 연대하는 모습을 보여 주었다. 시민들은 무바라크 하야라는 공통 목표를 공유하면서 때로는 축제처럼 누리고, 때로는 다치거나 현장에서 사망한 시위대 동료를 임시 치료소로 옮기며 치열하게 싸웠다.
시민들은 언제 공격을 받을지 모르는 상황에서도 광장에 천막을 쳐서 임시 거처를 만들고 밤낮으로 타흐리르 광장과 거리를 지켰다. 때가 되면 어디에선가 마련해 온 음식을 나누어 주고 함께 저항의 노래를 불렀다.
이집트의 시민으로서 이들이 이때보다 더 강한 연대 의식과 인류애를 경험해 본 적은 없었을 것이다. 이 경험은 이집트 국민이 자신들을 적극적이고 책임감 있는 시민으로 정체화하는 의미 있는 사회적 경험이기도 했다.
종교 차이에 따라 때로는 분열되기도 했던 기독교인과 무슬림 사이에서도 화합과 협력의 모습이 보였는데, 광장에서 무슬림들이 기도할 때 기독교인들이 서로 손을 잡고 둘러싸 바리케이드를 쳐주었던 장면은 서구 미디어에서도 경쟁적으로 보도되었다. --- pp.36~37
2015년 여름 레바논의 수도 베이루트에는 골목마다 있는 공동 쓰레기 수거장에 파란색, 검은색, 흰색 등 색색의 비닐봉지에 싸인 가정용 쓰레기가 산처럼 쌓였다.
국내외 뉴스는 연일 베이루트 인근 계곡에 강물처럼 긴 흰색 쓰레기 봉지의 물결을 내보냈다. 베이루트와 레바논산 지역의 쓰레기를 매립하던 나으메(Naameh) 매립장에 더 이상 쓰레기를 매립할 수 없게 된 데다 쓰레기 처리 업체와 정부 간 계약이 만료되는 시점이었기 때문이다.
쓰레기를 옮겨 둘 장소가 없었고 쓰레기 처리 회사 또한 업무를 멈추었다. (...) 쓰레기 사태 발생 초반부터 종파와 상관없이 모인 젊은 활동가들은 ‘유 스팅크(You Stink)!’라는 구호와 함께 정부에 쓰레기 사태에 대한 책임을 묻는 시위를 조직했다.
소규모로 시작했던 시위는 점차 규모가 커져 한 달 정도가 지난 후에는 수천 명이 결집해 한목소리를 냈으며, 베이루트를 포함한 남부 도시 시돈(Sidon)과 북부 도시 트리폴리(Tripoli) 등에서도 시위가 일어났다. 이 시기 국민들은 아랍의 봄 시기에 들었던 ‘국민들은 종파주의 정권 타도를 원한다’라는 아랍어 피켓을 함께 들고 참여했다.
10년 전 백향목 혁명과는 달리 경찰은 최루탄과 고무탄으로 무장하여 시위대를 폭력적으로 진압했다. 이 시위에 얼마나 다양한 종파가 참여했는지 알 수 없지만, 적어도 특정 종파만 두드러지게 참가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탈종파주의에 대한 레바논 국민의 목소리가 점차 형성되었다고 볼 수 있다. --- pp.160~162
2003년 미국의 이라크 침공으로 사담 후세인 정권이 무너진 후 권력에서 소외된 수니파가 아랍의 봄 이후 극성을 부린 ISIS 든든한 자원이 되었다. ISIS의 기원은 요르단의 아부 무스아브 알자르까위(Abu Mus‘ab al-Zarqawi)로 거슬러 올라간다.
부랑아로 살던 알자르까위는 감옥에서 살라피 아부 무함마드 알마끄디시(Abu Muhammad al-Maqdisi)에게 우상에 불과한 인간이 만든 법을 강요하는 통치자는 무슬림이 아니라 배교자이기 때문에 제거해도 된다고 배웠다.
감옥에서 알자르까위를 살라피로 만든 알마끄디시는 사우디아라비아의 왕정을 배교자, 즉 비무슬림 왕정으로 보았다. 그러나 알마끄디시는 정작 지하디 살라피로 나서지 않고 정적 살라피로 남은 반면, 알자르까위는 지하디 살라피가 되어 직접 행동에 나섰다.
알자르까위는 2003년 알카에다 지도부에 편지를 보내 이라크 미군에 가장 효과적으로 대처하려면 이라크 시아파와 내전을 벌여야 한다고 하면서 2004년 3월 시아파 모스크에 자살 폭탄 공격을 감행, 180명의 목숨을 앗았다.
알카에다는 시아파를 공격하지 않았지만 알자르까위는 시아파가 이단이므로 처형해도 좋다는 생각을 견지했다.
이는 14세기 이븐 타이미야와 18세기 이븐 압둘 와합의 반(反)시아관과 일치한다. 2006년 미군 공격에 알자르까위는 목숨을 잃었지만 알자르까위가 만든 지하드 조직은 계속 존속했고, 2011년 시리아 내전을 틈타 2013년 4월 시리아 라까(al-Raqqah)를 수도로 삼아 이라크와 레반트 이슬람국가(Islamic State in Iraq and Levant)를 세웠다. 그 뒤 2014년 6월 29일에는 ISIS로 이름을 바꾸고 칼리파제 국가를 선언했다. --- pp.233~234
이제 다시 제2의 아랍의 봄을 운위한다. 수단과 알제리에서 이미 정치 변동이 일어났고, 레바논의 정세가 불안하다. 2010년 12월 17일 시디 부지드에서 일어난 사건처럼 주목받지 못한 작은 일이 순식간에 세계를 뒤집어 버릴 수 있는 초연결 사회다.
불가측 시대에 나비효과의 파괴력과 확장성은 주요 변수 중 하나로 여겨진다. 따라서 중동에서 일어나는 사건에 관한 각별한 관심과 주의가 필요하다. 서아시아 연구에 있어 이런 불연속성의 고리 속에서 인과율을 찾기란 쉽지 않다.
본질적 어려움이 기본값인 셈이다. 익숙한 학문 체계나 어휘로 설명하기 힘든 여집합 세계에서 벌어지는 사건을 이론화라는 추상 체계 속에 녹여 내어 논리를 부여하는 작업이다. 이를 위해 패권적 담론(hegemonic discourse)으로서의 종교 이해가 필수적이며, 부족의 1차 집단적 정서와 관련된 유연한 교감도 필요하다.
최승우 기자 kantmania@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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