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핀, 분배의 불완전함이 만든 ‘엘리트 민주주의’


정법모(동남아센터 선임연구원)

빈곤, 부패, 치안불안의 늪

필리핀은 1986년 일찍이 ‘피플 파워(people power)’란 이름으로 마르코스 독재 정권을 무너뜨려 1987년 한국, 1988년 미얀마의 민주화운동에 영향을 주었을 정도로 아시아 민주주의 역사에 중요한 역할을 했던 나라이다. 2001년 두 번째 민중혁명을 통해 부패 대통령을 탄핵했고, 여성 대통령 두 명을 배출했으며, 다수의 정치인과 행정 관료가 여성이다. 아동, 여성, 노동자, 성소수자 등에 대한 국제협약 서명국이고, 1987년 헌법 등 매우 진보적인 법률이나 제도를 다른 아시아 국가들보다 일찍 구축하기도 했다. 마르코스 독재시기에 정권 탄압을 피해 학교나 종교 기관의 엄호 아래 활동했던 사회운동 세력들이 1987년 이후 시민단체로 전환하면서, 현재 필리핀에는 약 25만에서 50만 개의 시민단체가 있을 정도로 시민사회도 크게 성장했다.

하지만 동시에 필리핀은 2014년 기준 24.8%의 빈곤층이 있고, 인구 열 명 중 하나는 해외 이주노동자일 정도로 양질의 일자리가 부족한 나라이기도 하다. 식민통치로부터 독립한 이후에도 농산물이나 광물 등의 1차 산물을 수출하는 데 초점을 두고 2차 산업 육성을 등한시했던 필리핀 경제는 자생적인 성장 기반을 마련하지 못했다. 다른 인접 국가들이 하나씩 경제적으로 추월해 가는 동안 필리핀은 만연한 부패와 잘못 설정한 성장 전략으로 인해 몰락해 가는 국가 이미지를 형성해 왔다. 리콴유 전 싱가포르 총리는 필리핀 사회에 “필리핀에 필요한 것은 민주주의가 아니라 훈육(discipline)”이라는 조언 아닌 조언을 했다. 이 말은 맞는 말이었을까?

다행스럽게도 최근 필리핀 경제는 이주노동자 송금이나 비즈니스 아웃소싱인 BPO(business process outsourcing) 산업의 성장으로 글로벌 경제위기를 잘 넘겼을 뿐만 아니라 최근 5년 동안 5%가 넘는 경제 성장률을 보이면서 국제 신용 평가 회사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고 있다. 하지만 장밋빛 경제 전망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부패 이미지가 강하고, 무엇보다 ‘위험한’ 나라라는 낙인이 찍혀 있다. 실제로 길거리에서 강도나 유괴 등의 범죄가 많이 일어나는 데 비해 국가의 치안 능력은 낮은 수준이다. 더욱이 이슬람이나 공산주의를 기반으로 하는 무장반군이 심심치 않게 정부군과 교전을 벌이고 있으며, 외국인을 대상으로 인질극을 벌이는 무장 그룹도 있다. 또한 정치인, 언론인, 주민 리더를 대상으로 한 초사법적 살해나 선거 관련 폭력이 계속 발생하고 있어 국제 시민사회로부터 지탄의 대상이 되고 있다.

<사진> 필리핀 ‘피플파워’ 혁명 30주년 기념행사  (출처: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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