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띡(batik) 이야기: 자바의 영혼에서 인도네시아의 정신으로 (1)


바띡(batik)은 천연 밀랍의 저항력을 이용한 납염(蠟染) 방식을 의미한다. 바띡은 엄격한 의미에서 하나의 염색방법이지만,일반적으로 바띡 기법을 사용해서 만들어진 의상과 다양한 상품을 지칭한다. 인도네시아의 전통적인 바띡은 짠띵(canting)이라는 도구의 선단에, 뜨겁게 녹인 밀랍(beeswax)을 담은 후 염색되지 않은 면이나 명주에 그림을 그리는 작업으로 시작된다.

20150402111732_71673

<그림1> 짠띵*

*바띡을 만드는데 사용되는 도구로서 만년필과 비슷한 원리를 가지고 있다. 금속으로 만들어진 앞부분은 녹인 왁스를 담는 용도로 사용되고 끝부분의 부리처럼 뾰족한 관은 녹인 왁스를 흘려 내리면서 그림을 그리는 데 사용된다.

그 다음 단계에서 밑그림이 그려진 천을 염색한다. 이때 밀랍으로 방염 된 부분은 염색이 되지 않고 하얀 선이나 면으로 남게 된다. 매번 방염이 필요한 부분에 밀랍을 바르는 과정을 수 차례 반복하여 의도한 특정한 무늬를 만들 수 있다. 따라서 밀랍으로 모티프를 그리는 과정은 고도의 집중력과 인내력이 요구된다. 바띡 혹은 그와 유사한 납염 방식은 인도네시아를 비롯한 세계 여러 지역에서 발견된다. 하지만 인도네시아의 바띡은 다른 지역에서 발견되는 것과는 여러 가지 측면에서 차별성을 갖는다. 정교한 무늬를 넣기 위해 짠띵을 사용하는 것이나 천의 한쪽 면에만 밑그림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양쪽 모두에 똑 같은 밑그림을 그리는 것은 바띡의 완성도를 높여준다. 또한 인도네시아의 바띡은 일반적인 전통의상과 달리 21세기인 현재에도 일상복으로서 그리고 다양한 상품으로서 상업적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다. 더욱이 2009년에 바띡이 국제연합 교육과학문화기구(유네스코)의 인류무형문화유산 대표목록으로 선정되면서 인도네시아를 대표하는 문화 아이콘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유도요노(Susilo Bambang Yudhoyono) 전직 대통령은 2011년 자까르따에서 열린 월드바띡써밋(world batik summit)의 기조연설에서 인도네시아를 대표하는 첫 번째 상징물로 바띡을 언급했다.

20150402111921_86756

<그림2> 월드바틱서밋

바띡은 본래 몇몇 지역을 제외하면 인도네시아의 지리적 중심이며 인구의 절대 다수가 거주하는 자바 지역에서 성행했다. 자바 지역에서도 다수 종족인 자바족에 의해 주도된 문화였다. 하지만 최근 들어 바띡은 특정 종족의 범위를 넘어서 인도네시아 전체를 대표하는 상징으로 성장했다. 바띡 상품의 판매량 증가, 일상복으로 활용되는 빈도의 증가, 자바에 거주하는 사람뿐만 아니라 인도네시아의 다른 지역에 거주하는 사람들의 바띡에 대한 인식의 변화, 그리고 젊은 세대의 바띡에 대한 태도 변화 등을 고려할 때, 지금 바띡은 특정 지역 혹은 종족의 문화가 아닌 인도네시아 전역을 대표하는 국민문화로서 전성기를 맞이하고 있다. 바띡은 상업적인 성공과 함께 인도네시아 전체를 대표하는 문화적 상징물이 되었고, 자바를 대표하는 자바의 영혼을 넘어서 인도네시아 전체를 대표하는 정신으로 확대되었다.

원시형태의 바띡은 최소한 1500년 이전에 시작되었고, 의상으로서 착용된 것은 대략 17세기 자바의 궁궐에서 시작된 것으로 추측된다. 원시형태의 바띡으로는 쌀풀의 저항력을 이용한 까인 심붓(kain simbut)이 있다. 하지만 수용성인 쌀풀은 정교한 문양을 표현하는 데 많은 제약이 따랐기 때문에 까인 심붓의 모티프는 단순한 십자 선이나 원 형태였다. 현재 인도네시아 국립박물관에 19세기 서부 자바의 반뜬(Baten) 지방의 것으로 추정되는 까인 심붓이 소장돼 있다. 또 다른 형태의 원시 바띡은 남부 술라웨시 또라자(Toraja)에서 발견되는 마(Ma’a)다. 마가 외부와 격리된 산악지역에서 시작되었다는 사실은 바띡이 인도네시아에서 유래되었다고 주장하는 학자들의 주장의 근거로 사용되기도 한다. 초기에는 쌀로 만든 풀을 천에 바른 후 색칠을 하는 단순한 형태였지만 점차 대나무로 만든 펜을 이용해서 왁스를 바르는 더욱 세련된 방식으로 발전했다. 원시형태의 바띡과 현재와 같은 형태의 바띡과의 차이는 밀랍과 다른 물질의 혼합물인 말람(malam)의 사용여부다. 말람은 염색될 직물에 저항력을 주기 위해 사용되는 고체물질로서 기본적으로 밀랍(beeswax)과 파라핀(paraffin)의 혼합물에 송진(resin), 유칼리(eucalyptus)유, 동물성 기름을 첨가해서 만들어진다. 말람의 정확한 사용 시점은 알려지지 않았지만 말람의 사용은 정교한 모티프와 완성도 높은 바띡을 만드는 것을 가능케 했다.

바띡은 인도로부터 수입된 직조 방식으로 만들어진 직물을 대체하는 형태로 발달했다. 바띡은 다른 방식의 전통의상이나 수입품에 비해 장식이 쉽고 자유롭기 때문에 처음에는 단순히 다른 직물을 모방하는 것에서 시작해서 서서히 모방했던 물건들을 대체하기 시작했다. 이 시기의 바띡은 의상보다는 똑위(tokwi)라고 불리는 제단이나 궁중에서 사용되는 천이나 벽을 장식하는 용도로 사용되었다. 당시 제단에 사용되었던 천은 중국에서 들어온 정교하게 수가 놓인 직물이었다. 하지만 점차 현지에서 수요가 증가하는 반면 공급이 부족하자 이러한 품목들이 바띡으로 대체되기 시작했다. 그 후 이슬람 상인들이 가져온 양질의 재료를 사용하기 시작하면서 바띡이 더욱 고급스럽고 완성도 높은 경지에 오르게 되었다.

인도네시아는 오랜 기간 네덜란드의 식민지배를 받았는데, 식민통치 동안 현지인들은 고달픈 삶을 영위했지만 1815년부터1860년 사이에 인구가 약 두 배로 성장했고 1900년까지 또 다시 두 배로 늘어났다. 현지인들의 인구증가와 함께 대규모 농장의 확장과 석유의 발견이 네덜란드인의 유입을 증가시켰다. 이와 같은 인구의 폭발적인 성장은 노동력 증가, 구매력을 갖춘 소비자의 증가, 면화와 바띡 시장의 성장으로 이어졌다. 1840년대는 바띡 작업의 효율성을 획기적으로 높여준 짭(cap)의 등장으로 바띡의 산업화가 이루어졌다. 짭은 표면에 바띡 무늬가 새겨져 있는 나무 혹은 구리로 만들어진 큰 도장 형태의 도구로서 19세기 초반에 바띡 작업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만들어졌다. 짭은 바띡 생산의 혁명을 일으키면서 바띡의 산업화를 가능케 했다. 짭은 짠띵을 사용해서 완성하는 데 길게는 45일까지 소요되는 밑그림 작업을 하루에 20개 완성할 수 있도록 만든 기술적 혁신이었다.

20150402112032_15332

<그림3> 다양한 형태의 짭

20세기로 들어오면서 바띡에 새로운 변화가 생겼다. 면의 품질 향상으로 인해 정교한 디자인이 가능해졌고 바띡 생산과 구매에 자바인 외에 유럽인, 중국인, 인디서(Indische), 아랍인이 참여하면서 바띡 디자인의 다양성이 요구되었다. 그 결과 새로운 실험을 통해 디자인과 색상의 범위가 확대되었다. 또한 바띡 상품의 다각화가 이루어지면서 바띡을 이용한 다양한 상품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1850년대 후반 독일에서 화학염료가 개발되고 대략 1890년경에 자바로 수입되었다. 화학염료의 등장으로 색상의 폭이 다양해졌을 뿐만 아니라 작업시간이 단축되었다. 1920년대 쁘라나깐(peranakan)들이 바띡 제품의 주요 고객이 되면서 화학염료는 이전의 천연염료를 대체하기 시작했다

독립 후 기존의 지역적인 특성을 살리면서 동시에 지역적인 특성을 뛰어넘는 전 인도네시아적인 바띡을 개발하려고 노력했다. 수까르노 는 바띡에 굉장한 관심을 나타냈으며, 쁘라나깐 출신의 바띡 디자이너인 하르조나고로(K.R.H.T. Hardjonagoro)로 하여금 지역 중심의 바띡이 아닌 전 국민적인 바띡 즉 ‘바띡 인도네시아(Batik Indonesia)’를 개발하도록 요구했다. 하르조나고로는 서로 다른 지역의 특색이 심미적으로 잘 조화될 수 있도록 혼합해서 범국민적인 모티프를 만들었다. 바띡 인도네시아는 하나의 상징적인 사건으로서 당시 침체되었던 바띡 산업을 활성화시켰고, 바띡이 인도네시아를 대표하는 상징성을 갖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20150402112139_87087

<그림4> 하르조나고로에 의해 만들어진 ‘바띡 인도네시아’: 사웅갈링

바띡 산업은 196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번영기를 누렸지만 1980년대 이후 바띡이 비실용적이고 구세대의 패션이라는 인식과 함께 쇠퇴기를 맞이했다. 21세기에 들어와서는 이웃 나라인 말레이시아와 바띡 소유권 문제로 갈등을 빚었고, 2009년 유네스코의 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말레이시아와의 바띡 소유권 갈등은 바띡 판매의 증가와 인도네시아 국민의 바띡에 대한 인식 전환의 계기가 되었다. 특히 바띡에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았던 젊은 세대에게 바띡을 다시 생각하게 하는 기회가 되었고 인도네시아 전역에서 ‘바띡 내셔널리즘’이 일어났다. 바띡 내셔널리즘은 말레이시아 정부에 대한 공식·비공식 항의, 말레이시아의 행동을 비방하는 글을 신문 사설란에 싣는 것, 각종 행사에 바띡 착용을 권장하는 것, 바띡의 날 제정, 바띡과 관련된 세미나 및 문화행사 등을 포함한다. 2000년대 후반부터 외부적인 기폭제에 힘입어 바띡 산업은 새로운 활력을 되찾기 시작했다.

요컨대 바띡은 끊임없이 변화하면서 외연을 확대하고 있다. 원시적인 염색법에서 예식에 사용되는 고급스러운 직물을 만드는 염색법으로 발전했고, 집안이나 궁궐에서 행해지던 가내 수공업에서 산업의 형태로 성장했다. 산업화를 통해 바띡은 대중적 의상으로 변모했고 다양한 상품의 형태로 다각화되었다. 1970년대 이후 순수예술의 영역으로까지 확대되고 있으며 최근에는 말레이시아와 바띡 소유권 갈등을 빚으면서 인도네시아를 대표하는 중요한 문화 아이콘으로 대두되고 있다.

20150402112211_57552

   <그림5> 2009년 당시 솔로(Solo) 시장으로서 바띡 카니발에 참여한 인도네시아 대통령 조코위

글 /그림. 이지혁(서울대 아시아연구소 동남아센터 선임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