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일보] ⑤ “이제는 아시아 시대” – 서울대 아시아연구소 기획 ⑤ ‘인재 허브’로 뜬 비결

[중앙일보] ⑤ “이제는 아시아 시대” – 서울대 아시아연구소 기획 ⑤ ‘인재 허브’로 뜬 비결

싱가포르는 동·서양 교육의 ‘용광로’

지난달 30일 난양공대 학생회관에서 학생들이 활기차게 토론을 하고 있다. 인도네시아 출신인 니코 다르마완(20·왼쪽 둘째)은 “어릴 때부터 싱가포르 정부 장학금을 받고 유학을 온 동남아시아 학생이 많다”고 말했다. 인구 500만 명의 싱가포르는 아시아의 교육 ‘허브(Hub)’로 떠오르고 있다. [싱가포르=이한길 기자]

21세기 들어 아시아 대학들의 성장세가 두드러지고 있다. 영국의 대학평가기관인 THE(Times Higher Education)와 QS(Quacquarelli Symonds)사의 2004년 세계대학평가에서 100위권 안에 든 아시아 대학은 13곳이었다. 그러나 지난해에는 19곳으로 늘었다. 그 선두에는 인구 500만 명의 도시국가 싱가포르가 있다. 싱가포르국립대(NUS)는 지난해 세계대학랭킹(QS 평가) 25위에 올랐다. 아시아 대학 중 홍콩대(23위)에 이어 둘째다. 미국의 명문주립대인 UCLA(31위)나 아이비리그의 브라운대(42위)보다 높은 순위다. 싱가포르 제2의 명문대인 난양공대(NTU) 역시 47위에 랭크됐다. 아시아 시대를 이끌 인재들은 결국 교육시스템을 통해 만들어진다. 중앙일보와 서울대 아시아연구소 공동 취재팀은 지난달 말 아시아의 교육 허브(Hub)로 떠오른 싱가포르를 찾았다.

정부 예산 21% 교육에 투자

 지난달 29일 만난 탄응치에(陳永財) 싱가포르국립대 부총장은 성장 비결을 묻는 질문에 망설임 없이 정부의 적극적인 지원을 꼽았다.

 싱가포르국립대의 지난해 예산은 약 1조8000억원. 서울대(8000억원)의 두 배가 넘는다. 이 중 70% 이상을 정부가 대주고 있다. 난양공대도 비슷한 수준의 지원을 받는다. 다음 날 만난 프레디 보이 난양공대 부총장도 “정부의 아낌없는 지원이 오늘의 난양공대를 만든 원동력”이라며 “2005년부터 지난해까지 정부가 지원한 연구비만 1억6000만 달러(약 1800억원)다. 정부 지원이 많아 소화불량에 걸릴 정도”라고 말했다.

 싱가포르 정부는 올해 전체 예산의 21%를 교육에 투자하고 있다. 한국(15%)보다 훨씬 높다. 땅도 자원도 없는 싱가포르에서 ‘인재가 곧 자원’이라는 판단이 작용한 결과다.

 이런 지원 덕분에 주변 국가 인재들이 자석에 이끌리듯 싱가포르로 몰려들고 있다. 싱가포르에서 공부하고 있는 외국인 학생은 8만4000명(2012년 기준)이다. 싱가포르 정부는 베트남·말레이시아 등에서 우수한 학생을 발굴해 장학금과 생활비를 지원한다. 조건은 대학 졸업 후 최소 3년을 싱가포르에서 일해야 한다는 것이다.

 난양공대 캠퍼스에서 만난 경영대 3학년 니코 다르마완(20)도 이런 경우다. 인도네시아 국적인 그는 싱가포르 정부 장학생으로 선발돼 고등학교 때부터 수업료와 생활비를 지원받고 있다. 그는 “동남아시아 수재들 중엔 싱가포르로 오고 싶어 하는 학생들이 많다”고 전했다.

 2007년 싱가포르국립대에 부임한 김상호(생명공학과) 교수는 “학생들의 생활수준은 미국 유명 대학들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다”고 말했다.

 영어를 공용어로 사용하는 것도 싱가포르의 장점이다. 싱가포르의 초·중·고에선 학생들에게 현지어(말레이어·타밀어·중국어)와 함께 영어를 필수로 가르친다. 난양공대 조남준(재료과) 교수는 “외국인 교수와 학생들이 생활하기에는 최적의 조건”이라고 평가했다. 싱가포르국립대는 전교생의 3분의 1이 외국인이다. 난양공대는 교수진의 절반이 외국인이다.

주변 국가 학생들 끌어들여

 싱가포르의 대학들은 철저히 실용주의를 추구한다. 취재팀이 만난 대학 관계자들의 입에서 대학의 이상이나 교육이념 같은 추상적인 단어들은 듣기 힘들었다. 대신 어떻게 하면 더 좋은 연구 성과를 내고 학생들을 잘 가르칠 수 있는지에 집중하는 모습이 역력했다.

 싱가포르 대학은 연구 성과와 경쟁을 중요시하는 미국식 시스템과 수업 및 개별지도에 큰 비중을 두는 영국식 시스템이 섞여 있다. 학생들의 강의평가 점수는 교수 업적평가에 반영한다. 대부분 대학들이 강의평가 결과를 공개하지 않는 한국과는 대조적이다.

 해외 대학과의 제휴에 매우 적극적이라는 점도 인상적이다. 싱가포르국립대는 2005년 미국 듀크대와 공동으로 싱가포르에 의학전문대학원을 세웠다. 난양공대는 미국 MIT와 2800억원 규모의 공동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2000년 설립된 싱가포르경영대(SMU)는 개교 당시부터 미국 펜실베이니아대 와튼 스쿨(MBA)의 교육과정을 도입했다.

 그러나 단순히 서구 대학을 모방하는 것은 아니다. 취재팀이 방문했을 때 싱가포르국립대에선 NUS-예일 인문교양대학 신축 공사가 한창이었다. 300년 넘는 역사를 자랑하는 미국 예일대(1701년 개교)가 해외에 세우는 첫 캠퍼스다. 강의는 두 대학의 교수진이 함께 맡는다. 탄응치에 부총장은 “그동안 대학은 서양철학 등 서구의 지식만을 가르쳤다”며 “앞으로는 중국·인도 등 아시아의 지식과 철학을 함께 가르치게 될 것”이라고 했다. 아시아의 젊은이들에게 아시아의 철학을 교육한다는 말이 눈길을 끌었다. 올해 첫 신입생 157명을 뽑는데 130개국에서 1만1400명이 지원했을 정도로 반응이 뜨거웠다.

서양 대학 모방 넘어 대안 제시

 싱가포르의 사례를 다른 아시아 국가에 그대로 적용하기는 어려울 수도 있다. 그럼에도 싱가포르를 교육강국으로 이끈 두 가지 비결, 즉 정부의 전폭적인 지원과 유연한 사고가 아시아의 대학들이 나아갈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

 대학의 랭킹과 연구실적, 국제화는 분명 중요하다. 그러나 동시에 대학은 자유로운 지성이 마음껏 상상의 나래를 펴는 공간이어야 한다. 요즘 우리 사회의 화두가 되고 있는 창의성도 바로 이런 자유로운 사고에서 나온다. 그런 점에서 대학을 상상력과 창의성이 살아 숨쉬는 공간으로 만드는 것은 싱가포르 대학들과 한국 대학들이 아시아 시대를 맞아 공통적으로 안고 있는 과제다.

싱가포르=이준구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

“리셴룽 총리가 내건 슬로건 21세기 교육 핵심은 창의성”

한국의 중3 또는 고1에 해당하는 싱가포르 15세 학생들의 학습능력은 2009년 국제학업성취도평가(PISA)에서 전 세계 65개국 중 수학은 2위, 과학은 4위를 차지했을 정도로 높다. 동시에 입시 부작용도 많다. 초·중·고를 마칠 때마다 졸업시험이 있고, 이 시험에서 좋은 성적을 받지 못한 학생들은 2년 과정의 직업학교나 3년제 폴리테크닉(Polytechnic) 등에서 직업교육을 받게 된다.

 이 때문에 리셴룽(李顯龍) 싱가포르 총리는 과도한 입시경쟁을 완화하기 위해 2004년 ‘더 적게 가르치고, 더 많이 배우게 하라(Teach less, Learn more)’는 슬로건을 내걸었다. 지난달 30일 싱가포르국립교육원(NIE)의 리싱콩(李盛光·사진) 원장을 만나 싱가포르 교육의 목표와 비전에 대해 들었다. NIE는 한국의 교육대학이나 사범대학과 비슷한 교사 양성기관이다.

 -리 총리가 내건 슬로건의 의미는.

 “과거에는 학생들이 지식을 배울 수 있는 통로가 별로 없었다. 그래서 학생들에게 최대한 많은 지식을 가르치는 것이 가장 중요했다. 그러나 이제 지식은 인터넷 등을 통해 어디서나 쉽게 얻을 수 있다. 더구나 지식은 빠르게 변하고 있다. 이런 시대에는 학교에서 단순한 지식을 많이 가르치는 것은 의미가 없다. 대신 스스로 생각하고 스스로 배우는 방법을 더 많이 가르쳐야 한다.”

 -21세기 교육의 역할은.

 “21세기는 지식에 기반한 사회다. 산업사회에서는 숙련된 기술인력을 기르는 것이 주요 목표였다면 이제는 창의성과 도전정신, 사회적 책임감 등을 길러 줘야 한다.”

 -싱가포르 교육에서 교사의 역할은.

 “교사는 교육의 심장이다. 교사가 어떻게 가르치느냐에 따라 국가의 미래가 결정된다. 우리는 교사를 최고로 대우한다. 연봉을 책정할 때는 회계사나 엔지니어 급여를 기준으로 한다. 매년 100시간의 교육을 통해 교사들이 아이들을 더 잘 가르칠 수 있도록 돕는다.”

 -싱가포르 교육의 과제는.

 “학생들에게 싱가포르인이라는 정체성을 심어 주는 것이다. 싱가포르인들은 세계 각국에서 일하고 있다. 이들이 자신의 모국을 잊어버린다면 인구 500만 명인 싱가포르는 미래를 장담할 수 없다. 전 세계를 무대로 일하지만 싱가포르에 뿌리를 둔 인재를 길러야 한다. 한국이나 다른 국가들도 10년 안에 비슷한 고민을 하게 될 것이다.”

 -한국은 입시교육에 치우쳐 인성교육이 미흡하다는 지적을 받는데.

 “싱가포르도 마찬가지다. 상급학교 진학을 위한 입시를 위해 학원에 다니는 학생이 많다. 그러나 2000년대 들어 학교 수업에 음악과 연극 등 예체능 과목을 도입하고 다양한 특별활동도 개설해 보완하고 있다.”

싱가포르=이한길 기자
김종철 서울대 아시아연구소 선임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