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비즈] 사회과학 국제화 기틀 닦은 구두회사 창업주의 꿈

[조선비즈] 사회과학 국제화 기틀 닦은 구두회사 창업주의 꿈

서울대 아시아연구소가 한국 사회과학자료원(이하 자료원)의 사업 이관을 계기로 아시아를 대표하는 사회과학 연구의 요람으로 도약하기 위한 본격적인 준비에 나섰다.

 강명구 서울대학교 아시아연구소 소장/이용성 기자
▲ 강명구 서울대학교 아시아연구소 소장/이용성 기자

한국사회과학자료원은 1983년 구두업체 에스콰이어의 창업자인 고(故) 이인표 회장이 사재를 털어 설립했다. 이 회장이 사회과학계가 문헌 부족으로 연구에 어려움이 많다는 이야기를 접하고 1981년 400억원을 출자해 이인표 재단(현 사회과학자료원재단)을 만든 것이 모태가 됐다.

지난해 5월 기준으로 자료원이 협력을 맺은 기관은 30개 대학과 50개 공공기관을 포함해 총 111개에 달한다. 이를 토대로 1744건의 조사자료 외에 4500종의 각종 저널, 10만권이 넘는 연구보고서와 단행본 등을 소장하고 있다.

“기업 이윤의 사회 환원은 단발적인 지원보다 백년대계를 위한 장기적 투자가 바람직하다”는 이 회장의 평소 소신에 걸맞게 자료원은 지난 30년간 한국 사회과학 발전의 큰 몫을 담당했다.

하지만 1980년대 ‘영에이지’와 ‘미스미스터’ 등의 브랜드로 국내 제화시장을 주름잡았던 에스콰이어가 매출 감소로 올해 초 워크아웃에 돌입하면서 자료원 운영도 좌초 위기에 처했다. 방대한 사회과학 자료를 관리하는데 적잖은 자금이 드는 까닭에 선뜻 이어받겠다고 나선 이가 없었던 것.

2년 간의 논의 끝에 자료원 운영을 이관하기로 결정한 서울대 아시아연구소의 강명구 소장(언론정보학 교수)은 조선비즈와의 인터뷰에서 “개인이 설립한 재단법인에서 공공기관의 자료를 다 관리했다. 국가가 할 일을 중소기업에서 한 셈”이라며 사회과학 연구 발전에 대한 이 회장의 공헌을 높이 평가했다.

“국가 데이터를 발표하는 곳은 통계청이지만 통계를 만드는 건 자료원이 합니다. 다른 나라에서는 대부분 국가 주도로 대학에서 위임받아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일본의 경우는 동경대에서 위임받아 운영합니다. 지원 형식은 국가마다 다르지만 유럽도 대부분 국가 지원이 사회과학 자료 관리에 큰 몫을 차지합니다.”

이 회장은 경성상공실업학교를 졸업한 뒤 서울 명동에서 대동영화, 모던다이제스트 등 양품점을 운영해 돈을 모았다. 1961년 5·16군사정변 이후 정부가 국산품 애용을 강조하면서 수제화 전문점인 에스콰이아제화를 설립했다.

당시에는 국내에서 보기 드물었던 혁신적인 디자인과 최고급 가죽으로 인기를 끌었고, 이후 대량생산 체제로 바꾸면서 1966년 원효로 공장을 시작으로 1970년 성수동 공장 1978년에는 연간 250만 켤레의 생산 능력을 갖춘 성남 제2공장 등을 완공하는 등 사세를 확장하며 국내 대표 구두 브랜드로 자리매김했다.

 아이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생전의 이인표 회장/트위터 캡쳐
▲ 아이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생전의 이인표 회장/트위터 캡쳐

이 회장이 존경받는 경영인으로 많은 이들에 기억에 남아 있는 것은 경영자로서의 뛰어난 수완 외에 사회공헌 활동을 통해 남긴 발자취 때문이기도 하다. 1983년 사직동에 한국사회과학도서관을 세웠고, 1990년과 1993년에는 상계동과 중국 선양[瀋陽]에 각각 인표어린이도서관을 설립하였다. 이후에도 국내외에 계속해서 어린이 도서관을 설립해 총 22개의 도서관을 세우고, 매년 10억 원 이상의 도서관 운영비를 지원했다.

1990년 중반 4000억대의 매출을 올리며 전성기를 구가했던 에스콰이어는 2003년 신용카드 위기의 여파로 구두 상품권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급속도로 내리막길을 걸었다. 이인표 회장은 2000년 장남 이범 전 회장에게 경영권을 물려주고 2002년 노환으로 별세했다.

정부와 대학 차원에서도 선뜻 나서는 곳이 없던 자료원 이관에 강 소장과 아시아연구소가 나선 것은 자료원이 아시아연구소가 아시아의 사회과학 연구의 메카로 성장하기 위한 초석이 될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에서였다. 사회과학자료원재단이 아시아연구소에 매년 4억원씩, 5년간 자료원 운영을 지원하기로 한 것도 큰 힘이 됐다.

자료원과 아시아연구소 간의 시너지가 기대되는 분야는 크게 두 가지다. 아시아 주요 대학과 협력체를 구성해 아시아 사회과학 아카이브를 구축하고, 국가ㆍ사회 통계 개념이 아직 자리잡지 못한 개발도상국이 통계자료를 축적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다.

강 소장은 “(자료원 소장) 자료들에는 오늘날의 한국 사회가 어떤 모습으로 변하는지를 읽을 수 있는 지표들이 포함돼 있다”면서 “학술과 취재 목적은 물론 일반인들도 이용할 수 있는 공공서비스로 자리잡도록 노력하겠다”고 말을 이었다.

아시아연구소는 자료원과의 협력을 위한 첫 시작으로 국가별로 다른 가족의 개념에 다양한 방법으로 접근하는 ‘아시아 가족 지수’(Asia Family Index)를 준비 중이다. 이를 위한 기초작업으로 지난해 한국과 중국, 일본의 가족에 대한 개념을 조사했다.

중국의 경우 조카 까지도 가족으로 인식하는 경우가 많은 반면 일본은 부모와 자녀외에는 가족으로 생각하지 않는 경향이 두드러지는 등 차이가 컸다. 우리나라는 중국과 일본의 중간쯤에 위치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기업들이 바로 써먹을 수 있는 자료도 중요하지만 한 사람의 생애를 통해 일어나는 장기적인 변화화 흐름을 읽어내는 것도 중요한데, 우리나라는 그런 부분이 취약합니다. 사회과학자료원 이관을 계기로 앞으로 5년 안에 아시아연구소에서 세계 학계가 주목할만한 아시아 연구 성과를 내도록 노력하겠습니다.”